[스페셜2]
흔들림 없이 운명 속으로
2015-07-30
글 : 이주현
새로운 총알을 장전하고 돌아온 최동훈 감독의 배짱 두둑한 승부수 <암살>

최동훈 감독이 돌아왔다. <도둑들>(2012) 이후 3년 만이다. <도둑들>의 주역인 전지현과 이정재는 <암살>에서 다시금 최동훈 감독과 호흡을 맞췄다. 거기에 하정우까지 가세했다. 이름의 조합만으로도 설레는 영화 <암살>이 공개됐다. 개성 강한 캐릭터, 속도감 있는 전개, 맛깔나는 대사, 화려한 배우진 등 최동훈 감독 영화의 단골 요소들이 <암살>에도 그대로 이식되어 있다. 하지만 다르다. 1933년 일제강점기, 친일파 암살 작전에 투입된 무장투쟁 운동가와 밀정, 청부살인업자 이야기인 <암살>은 최동훈 감독의 영화 중 가장 진중하다. 물론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영화가 무엇인지를 잘 아는 최동훈 감독은 특정 시대가 주는 무게에 쉽게 압도당하지 않는다. 새로운 총알을 장전하고 돌아온 최동훈 감독을 <암살>이 공개된 날 만났다.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마라, 이런 거 안 배웠어?” 10년 전, 최동훈 감독은 말했다. <타짜>(2006)의 고니(조승우) 입을 빌려서.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2004)을 필두로 최동훈 감독은 언제나 확실한 승부수를 던져온 ‘선수’다. 영화판에서 ‘확실한 카드’라는 말은 실상 공수표나 다름없지만 최동훈 감독은 흥행 성적으로 자신의 승부수가 옳았음을 매번 증명해왔다. 영화라는 미혹의 매체를 통해 그가 펼쳐 보인 건 사기, 도박, 도술, 절도 행각이었고, 주인공은 대개 “구라치다 걸리면 피본다”(<타짜>)는 사실을 잘 알기에 더욱 치밀하게 거짓말과 사기를 연마하는 이들이었다. 최동훈 감독의 천만 흥행작 <도둑들> 역시 “인격은 지갑에서 나오는 거”라고 믿는 자들이 국제적으로 도둑질을 하는 영화였다. <도둑들>은 여러모로 최동훈 감독의 인장이 확실한, 최동훈 감독의 장기가 십분 발휘된 영화였다.

이름 없는 독립군의 사진에서 시작된 이야기

<도둑들>의 성공 이후 최동훈 감독은 <도둑들>로부터 최대한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일제강점기라는 낯선 시대, 상하이와 경성이라는 낯선 공간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갔다. <암살>은 1933년 상하이와 경성을 배경으로 친일파 암살작전에 투입된 독립군과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장르적으로 풀어낸 영화다. <암살>을 얘기하며 최동훈 감독이 자주 입에 올린 단어는 “도전”과 “전환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최동훈의 시대극, 최동훈의 대하드라마는 본인에게도 관객에게도 무척 낯설다. 비단 장르의 문제 때문이 아니다. 대의와 명분을 위해 몸 바치는 투사의 이야기는 세속적인 욕망을 위해 몸 던졌던 최동훈의 영화 속 인물들과 대척점에 서 있다. 게다가 역사적 숭고함과 비장함은 또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최동훈 감독이 1년간 썼던 시나리오를 완전히 엎어버린 것도, 결국은 이러한 고민과 물음에 제대로 답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그의 선택은 자신의 장기를 버리고 “정공법”으로 가는 거였다. “시간과 공간을 뒤섞고, 쿨하고 재치 있는 대사들을 던지는 캐릭터들이 후다닥 후다닥 움직이는 패턴으로는 이 이야기를 진행할 수 없었다. 드라마를 압축하거나 건너뛰지 않고 아주 천천히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액션보다 액션 전의 조용한 시간이 더 중요했다.”

<타짜>가 개봉하던 즈음부터 최동훈 감독이 머릿속에 품고 있었던 <암살>의 이야기는 이름 없는 독립군의 사진에서 출발했다. “흔들림 없이 자신의 운명 속으로 걸어가는 한 사람의 이미지”가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고, 그 한 사람은 안옥윤(전지현)이라는 캐릭터로 형상화됐다. <암살> 역시 최동훈 감독의 전작이 그랬던 것처럼 사건보다 캐릭터가 도드라지는 작품이다. 안옥윤, 염석진(이정재), 하와이 피스톨(하정우)을 중심으로, 이해관계가 얽힌 여러 캐릭터가 정신없이 등장했다 사라진다. 인물들은 크게 세 무리로 나뉜다. 우선 암살작전에 투입되는 안옥윤, 속사포(조진웅), 황덕삼(최덕문). 이들은 조선주둔군 사령관 가와구치 마모루와 친일파 강인국(이경영)을 암살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경성으로 건너온다. 조선의 독립이라는 대의가 이들 행동의 동기이자 명분이다. 다음으로, 이들 세명을 불러모으는 임시정부 경무국 대장 염석진이 있다. 염석진은 1911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 사건을 주도한 독립투사였지만 이후 오직 살기 위해 변절하는 인물이다. “이들과 아무 상관없는 곳에서 쑤욱 날아온 캐릭터”가 상하이의 청부살인업자 하와이 피스톨과 그의 파트너 영감(오달수)이다. 이들을 움직이는 건 오직 돈이다. 하와이 피스톨은 염석진으로부터 안옥윤, 속사포, 황덕삼의 살인을 의뢰받고 경성으로 향한다.

“조용하고 천천히 걸을 줄 아는 여자”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묵직한 힘은 안옥윤에게서 비롯된다. 만주 이청천 독립군 부대의 저격수인 안옥윤은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을 통틀어 가장 길고 무겁고 투박한 총을 들고 다닌다. 그리고 자신을 맞이하는 거대한 운명 앞에서 바위처럼 단단하고 꿋꿋하게 서 있는 여자다. 최동훈 감독은 <도둑들>의 예니콜과 비교하며 안옥윤을 “조용하고 천천히 걸을 줄 아는 여자”라고도 했다. 한쪽 알이 깨진 동그란 안경을 얼굴에 무심히 척 걸치고, 길이 1m가 넘는 장총 모신나강으로 상대를 단번에 저격하는 안옥윤의 모습은 그 어떤 현란한 액션보다 멋있다. 최동훈 감독은 여전사 캐릭터에게 덧입히기 쉬운 여러 장치를 떼어낸 채 영화 내내 오롯이 “대장”으로서 안옥윤을 대우한다. 그렇다고 안옥윤이 투박하기만 한 캐릭터는 아니다. 경성에 가면 무얼 하고 싶냐고 묻는 염석진에게 “커피도 마셔보고 싶고, 연애도 해보고 싶다”고 말할 때라든지, 경성의 아네모네 카페에서 술과 음악과 춤에 취해 있는 무리에 섞여 난생처음 춰보는 듯 어색하게 춤을 출 때, 안옥윤의 입체감은 증폭된다. <범죄의 재구성>의 서인경(염정아), <타짜>의 정 마담(김혜수), <도둑들>의 펩시(김혜수)와 예니콜(전지현) 등 팜므파탈 혹은 여성성이 강조된 최동훈의 여성 캐릭터들과 비교했을 때, 안옥윤은 더욱 낯설고 특별하게 다가온다.

안옥윤이 처음과 끝이 같은 인물이라면 염석진과 하와이 피스톨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극적인 내적 변화를 겪는 인물이다. 최동훈 감독은 염석진을 “안옥윤과 대칭을 이루는 캐릭터”로 설정했다. 독립투사로 출발하지만 결국엔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되는 두 인물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바를 끝까지 고수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하와이 피스톨은 김동인의 단편소설 <붉은 산>에 등장하는 캐릭터 ‘삵’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캐릭터라고 한다. “어릴 적 교과서에 실린 <붉은 산>을 읽고 어떻게 이런 사람이 세상에 있을 수 있나 싶었다. 하와이 피스톨은 굉장히 장르영화적인 인물이지만, 후반부쯤 되면 자신의 판단이 서는 인물이다. 내게는 이상향 같은 캐릭터가 하나 필요했다.”(<붉은 산>의 삵은 싸움꾼으로 이름난 동네 망나니였지만, 소작농의 죽음을 목격하고는 만주인 지주에게 소작농의 죽음을 대신 대갚음하는 인물이다.) 한편 하와이 피스톨과 안옥윤은 부모 세대의 잘못을 기꺼이 제 손으로 청산하려는 젊은 세대를 상징하기도 한다. 세대간의 갈등을 부각시키진 않지만, 살부계 이야기까지 보태져 거대하고 비극적인 ‘운명’에 대처하는 인물 군상의 이야기가 다채롭게 직조된다.

섬세하게 재현한 당시의 모더니티

1930년대의 경성과 상하이를 재현하는 데도 영화는 많은 공을 들였다. 극장을 빠져나온 염석진의 머리 위로 1933년 개봉작인 <킹콩>의 광고 간판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섬세함이 캐릭터와 이야기에 더욱 몰입하게끔 만든다는 것을 최동훈 감독과 류성희 미술감독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동서양의 문화가 신비롭게 어울린, 동양에서 가장 화려한 문화를 자랑했던 1930년대 상하이의 풍경은 <쿵푸허슬>(2004), <색,계>(2007), <대상해>(2012)의 촬영지이기도 한 상하이 처둔 세트장에서 촬영했다. 60만평 규모의 처둔 세트장에는 상하이 최대 번화가인 남경대로의 옛 풍경이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이곳에서 경성의 거리와 미쓰코시 백화점 장면도 찍었다. 류성희 미술감독은 “철저한 고증으로 진실되게 출발하되 관객의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영화의 스펙터클에 걸맞은 모습으로 공간을 마무리하자고 원칙을 세웠다”고 했다. 영화 속 미쓰코시 백화점(현재 명동 신세계 백화점 위치에 자리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백화점)이 그러한 원칙으로 구현된 대표적 장소다. 서사의 흐름에서도 중요한 공간인 미쓰코시 백화점은 1930년대 경성의 모더니티를 보여주는 장소여야 했다. “자료를 보면서 깜짝 놀랐을 정도로 당시의 경성은 부유하고 호화로운 면이 있었다. 상류층 사람들은 굉장히 화려한 생활을 했는데, 그 절정에 있는 것이 제국주의 문화정책이 반영된 미쓰코시 백화점이었다. 실제로도 화려했지만 감독님은 좀더 화려하게 이 공간을 가져가자고 주문했다. 백화점 내부로 발을 들였을 때, 이 공간이 압도적으로 화려해서 어떤 대항조차 할 엄두가 나지 않게끔 말이다.” 류성희 미술감독의 얘기다.

캐릭터의 특징을 반영해 캐릭터별로 총기를 할당할 만큼, <암살>은 총격전에도 상당히 힘을 싣는다. 영화의 막바지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벌어지는 총격 신은 특히 웨딩드레스를 입은 안옥윤의 모습이 강렬하게 기억되는 장면이다. 최동훈 감독은 피 묻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총을 든 여자의 이미지를 생각하며 <암살>의 시나리오를 썼다고 밝혔다. “총기 액션이 찍는 입장에선 단순하다. 쏘는 사람, 맞는 사람, 그거면 되니까. (웃음) 물론 어떻게 긴장감 있게 찍을지 고민을 많이 했다.” 최동훈 감독의 여유가 묻어나는 이 대답은 <암살>의 총격 신이 스펙터클로서가 아니라 긴장감을 구축하는 요소로서 쓰였음을 말해준다. <암살>의 액션은 그러니 <도둑들>의 현란하고 영화적인 액션과는 딴판이다. 동선을 시원시원하고 유연하게 가져가는 데 능한 최동훈 감독의 장기는 물론 이번에도 어김없이 발휘된다.

180억원의 제작비를 들여, 낭만주의와 모더니즘이 흥했던 1930년대를 배경으로 무명의 독립투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은 아마도 최동훈 감독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거다. 시대를 구현하는 데 품이 많이 들고,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기도 어렵고, 아직까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흥행한 전사도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낭만과 모던을 아는 최동훈 감독은 배짱 두둑하게 승부수를 던졌다. “총알에도 눈이 있다고 생각하자”, “낙엽이 지기 전에 무기를 준비해 압록강을 건너야겠다”는 낭만적인 대사와 “가난한 독립군들이랑 엮이면 골치 아프다”, “독립운동도 배불러야 한다”는 대사를 이질감 없이 꿸 줄 아는 그는 비장하지 않게 우리 역사의 암흑기를 보여준다. 배우들의 시너지는 아쉽지만 전지현, 이정재, 하정우 등 최고의 배우들에게도 멋진 얼굴을 하나씩 안겨주었다. 여러 의미로 <암살>은 한국 상업영화의 현재를 보여주는 영화다. 그리고 최동훈 감독은 관객의 심리를 주무르는 데 능한 테크니션임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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