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다>(2007), <풍산개>(2011)의 전재홍 감독이 세 번째 장편 <살인재능>(2015)을 만들었다. 보험회사에서 8년째 사원으로 일하다 명예퇴직을 한 32살의 남자 민수(김범준)가 자신이 살인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감독은 이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건 제작사 전재홍 필름을 차렸고, 3500만원의 자비를 들이길 주저하지 않았다. 연출, 각본, 촬영까지 도맡으며 오직 영화 만들기에 몰두했던 시간이었다. 개봉(7월30일)을 앞두고 전재홍 감독에게 만남을 청했다. 기어코 영화를 만들어내고 말겠다는 그의 집념과 그 결실인 <살인재능>에 대해서 궁금한 것들을 물어봤다.
-줄곧 김기덕 필름에서 작업해오다 전재홍 필름을 차리고 영화를 만들게 된 이유부터 들어보자.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루이 비통의 수석 디자이너인 그가 그 브랜드의 전통을 살리면서 동시에 뉴욕에는 자신의 브랜드를 가지고 있더라. 김기덕 필름의 전통을 지키면서 나의 색을 넣은 게 <풍산개>였다면 지금은 조금 더 나만의 창의성이 묻어나는 작품이라 하겠다. 혹자는 김기덕 사단을 벗어나려 하느냐고 묻는데 그럴 거면 내가 왜 스승님께 배웠겠나. 그저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영화를 하고 싶은 마음과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작품을 만들고 싶은 생각에 시작한 일이다. 또 언젠가는 제작자로도 일해보고 싶다. 김기덕 필름, 전재홍 필름 둘 다를 오가며 계속 영화를 만들 생각이다.
-<풍산개>를 끝내고 메이저 투자사로부터 연출 제의를 받았으나 결과적으로 진행이 잘 안 된 걸로 안다. <살인재능>을 만들기까지 긴 공백기의 시작이었는데.
=‘무슨 일이었다’라고 지금 와서 말하는 건 작품을 연출한 분들에게 예의가 아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게 다 내게는 경험이고 힘이 됐다. 삶의 밑바닥을 쳤구나 싶었는데 밑바닥은 또 있더라. (웃음) 그때의 경험으로 만든 게 <살인재능>이다. 전작들에 비해 그만큼 만들 당시의 내 생각이 많이 들어갔다. 겉으로 보이는 건 잔인하지 않더라도 그 속은 잔인한 영화를 찍고 싶었다.
-2013년 부산국제영화제에 다녀온 경험이 <살인재능>의 시나리오를 써내려가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고 들었다.
=그때 김기덕 감독님의 <뫼비우스>(2013)와 나와 친한 문시현 감독의 <신의 선물>(2013)이 부산국제영화제에 상영됐다. 같이 영화를 보고 있자니 숨이 막히더라. 나는 폐인처럼 신세한탄이나 하고 있는데 이렇게 감독님들은 영화를 만들고 계시니. ‘전재홍, 너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면서 영화제 중간에 서울로 먼저 올라왔다. 그리고 4~5일 동안 쓴 게 <살인재능>이다. 그때 다음해에는 꼭 내 영화로 부산을 찾자 다짐했고 정말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에 <살인재능>이 상영됐다. 그 어느 영화제보다도 내겐 지난해의 부산이 특별했다.
-순수 제작비 3500만원을 사비로 조달했다.
=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 여행을 가려고 모아둔 돈이었다. 근데 부산에서 돌아와서 내가 내 자아를 찾는 건 결국 영화를 만들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내 돈으로 찍어보자 결심했다. 주위 사람들이 다 말리더라. 그때 무조건 영화를 찍으라고 한 분이 김기덕 감독님이셨다. ‘전 재산을 다 써서라도 찍는 게 맞다, 네가 버티기 위해서라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한번은 감독님께서 ‘네 몸에는 흉터가 많다. 그런데 상처는 없다. 상처가 다 아물어서 흉터가 많아졌을 뿐이다. 그러니 흉터를 보며 아파하지 말라’고도 하셨다. 몇달 전에도 감독님이 화선지에 ‘재홍아, 많이 힘들지. 앞으로는 더 힘들 거야’라고 써주시더라. (웃음)
-명예 퇴직을 한 주인공 민수는 구직을 하려고 하나 번번이 퇴짜를 맞는다. 그러다 뜻하지 않게 사람을 죽이게 되는데 거기서 묘한 성적 황홀경까지 경험하는 것 같다.
=일단 살인이라는 걸로 설정한 건 뭔가 기존에는 없던 영화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민수 본인을 위한, 그의 비밀스러운 쾌감의 유일한 순간이 살인이다. 중독이란 얼마나 무섭나. 민수도 그게 잘못됐다고는 느끼지만 끊지를 못한다. 사실 저마다 느끼는 쾌감의 순간이 있지 않나. 나는 영화 작업이 그렇다. 가끔은 내 돈 뿌려가면서까지 왜 이러고 있나 싶지만 정작 영화를 다 만들고 관객에게 보여줄 생각을 하면 엄청난 쾌감을 느낀다.
-민수의 퇴사 소식에 누구보다 불같이 화를 내는 건 여자친구 수진(배정화)이다.
=수진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을 인격화한 거라고 보면 된다. 나이가 들수록, 영화 일을 하면서 과연 내가 결혼은 할 수 있을까, 집 마련은 가능할까와 같은 현실적인 걱정이 커진다. 민수와 결혼을 꿈꾸는 수진이 딱 그렇다. 그녀가 못된 사람은 아니다. 민수가 명품 가방을 사줘도 잘 쓰지도 않고 계속 카페에서 일하며 자기 생활을 이어가고 있지 않나.
-민수 역의 김범준 배우와는 <아름답다> <풍산개>에 이어 또 한번 같이 작업했다.
=단편까지 합치면 총 4편을 함께했다. 길거리 캐스팅을 한 배우다. 내 작품뿐 아니라 김기덕 감독님의 <피에타>(2012), <뫼비우스>, 문시현 감독의 <홈 스위트 홈>(2011), <신의 선물>까지 김기덕 필름의 작품을 6편이나 했다. 많은 조•단역 배우들이 언젠가는 주연을 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일을 하잖나. 아무리 저예산영화라도 감독이 되는 것도, 주연배우가 되는 것도 어렵다. 이쯤 되면 주연을 할 때가 됐다는 생각에 시나리오 쓸 때부터 그를 염두에 두고 썼다. 사실 처음에는 좀 힘들었다. 워낙 조•단역을 오래해서인지 연기 호흡이 짧아졌더라. 그런데 내가 항상 배우를 혹사시키는 걸 좋아한다. <아름답다>의 차수연, <풍산개>의 윤계상 배우와도 그랬고. 배우의 기존 이미지를 파괴하고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데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게 또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가능하면 메이저가 아닌 곳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친구들과 일해보고 싶다.
-다음 작품도 구상 중인가
=다음 웹툰 <0.0메가헤르츠>를 원작으로 하는 공포영화를 준비한다. 내가 고어영화를 싫어해서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런데 제대로 읽어보니 잘할 수 있겠더라. 에일리언, 귀신, 괴물이 나오는 영화를 꼭 찍고 싶었다. 시각적으로도 시도해보고 싶은 게 많고. 지금도 시간날 때마다 시나리오 옆에 그림을 그린다. 짜릿짜릿하다. 현재 캐스팅 중이고 내년 여름께 개봉이 목표다.
-이젠 조금 더 편안하고 단단한 마음으로 작품에 임할 수 있겠다.
=겁날 것도 없다. 불이 뜨거운 줄 모르면 화상을 입잖나. 이젠 불이 무섭다는 걸 알았고 불에 손을 대지 않고도 불을 이용할 줄 아는 현명함이 생긴 것 같다. 나이가 들어서 좋은 점이기도 하고. 다양한 유의 영화를 찍고 싶다. 다음 영화도 또 다른 변화를 시도할 생각이다. 리안 감독은 <헐크>(2003), <라이프 오브 파이>(2012) 등 여러 장르를 오가면서도 항상 자신만의 인장을 작품에 남긴다. 나 역시 영화의 규모나 예산과는 상관없이 여러 종류의 영화를 찍으면서도 나만의 색을 잃지 않고 보여주고 싶다. 빨리 가려고 하기보다는 나를 유지하며 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