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프로듀싱이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는 작업인지 <러브 앤 머시>만큼 생생하고 그럴 법하게 재현한 영화는 드물다. 비치 보이스의 리더 브라이언 윌슨(폴 다노)은 무대보다 스튜디오에서 평화를 느끼는 뮤지션이다. 스튜디오를 하나의 ‘악기’로 쓴 선구적 프로듀서인 윌슨은, 우연한 소음도 곡의 요소로 더하고 빈 녹음실의 공명까지 감식한다. 그룹 멤버와 세션맨들이 작업 중인 스튜디오를 360도 팬으로 빙 둘러보는 숏은, 녹음실에서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유창하고 확신 넘치는 남자였던 윌슨을 보여준다. 한편 마음의 병이 깊어진 1980년대의 윌슨(존 쿠색)은 자주 홀로 방에 고립된 모습으로 스크린에 등장한다. <러브 앤 머시>는 고독한 남자와 방에 관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07/14
<파스카>에서 가을(김소희)과 요셉(성호준)의 사랑을 양쪽 가족이 질색하며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나이 차다. 지난 주말 ‘관객과의 대화’에 나선 안선경 감독은 여기에 붙여 마흔과 열아홉으로 가을과 요셉의 나이를 각각 정한 데에도 어떤 경계선을 드러내려는 뜻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가을은 생계가 불안정한 시나리오작가다. 글이 팔리지 않는 기간에도 읽고 쓰기에만 몰두하며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남들 눈앞에서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이 그녀에겐 없다. 영화가 보여주는 시간 동안 가을은 분식집에서 김밥을 말고 탁아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버는데, 이 밖에도 다양한 단기적 일자리로 생계를 지탱했으리라는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마흔은 이를테면 ‘그런 식으로’-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실속 없고 전망도 흐릿한 직업에 기대어-사는 일이 ‘용인’되는 북방 한계선 같은 나이다. 가을이 어떤 생각을 가졌건 가족들은 그녀의 삶을 불길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안선경 감독이 더 주목한 면은 연애에 있어서 여자의 나이에 관한 통념이었다. 똑같이 연하 남성과 사귄다고 해도 30대까지는 특이한 사랑으로 인식되지만 여자쪽이 마흔을 넘기면 성욕이 동기로 부각되면서 민망한 추문으로 여겨지기 시작한다고 안 감독은 관찰을 밝혔다. 한편 요셉의 열아홉은 어떤 나라에서는 성인으로 인정되나 이곳에서는 성년으로서 권리와 자격이 보류되는 마지막 해다. 즉, 육체와 정신의 실재와 그에 대한 사회의 처우 사이에 가장 간극이 큰 시점이다. 더구나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군복무를 마치지 않은 채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처지라는 조건은 요셉을 생물학적 나이보다 더 미력한 존재로 만든다. 성인 한 사람 몫의 최선을 다해 가을과 사랑에 대한 책임을 나눠지려는 요셉의 노력은 누차 묵살된다. 스무살이 되도록 어린아이일 뿐이고 마흔만 넘으면 늙었다고 치부된다. 삶이 비좁으니 사랑이 누울 장소를 찾기 어렵다.
07/17
<내일을 위한 시간> 블루레이의 한국판 코멘터리를 녹음하게 되었다. 순발력이라고는 약에 쓰려도 없기 때문에 약간의 노트가 필요했다. 먼저 블루레이 부가영상으로 제공된 주연배우 마리옹 코티야르의 인터뷰를 보았다. 코티야르는 다르덴 형제만큼 만드는 동안 관객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언급하는 감독은 처음이었다고 회고했다. 블록버스터를 포함해 상업영화도 여러 편 경험한 스타 배우가 오늘날 불친절한 예술영화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감독과 작업한 다음 들려주는 이야기치고 독특하다. 하지만 다르덴 형제가 밝힌, 그들이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동기와 코티야르의 증언(?)은 잘 들어맞는다. “요즘 사람들은 타인이 어떻게 사는지 모르고 산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찍어 식당이나 카페에서 함께 보도록 하고 싶었다.” 벨기에의 고향 소도시를 근거지로 노동자들의 역사와 생활에 대한 수십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다가 극영화로 전환한 이유도 심플하다. 극영화는, 다큐멘터리로는 담기 어렵지만 다르덴 형제 생각에 ‘타인이 어떻게 사는지’에 포함되는 결정적 사태- 죽음과 극단적 수난- 를 찍어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나 관객을 생각한다”는 말은 관객이 영화를 편안하게 볼 수 있도록 배려한다는 의미와는 무관하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에 가깝다. 남이 어떻게 사는지를 본다는 행위도 통념과 달리 다르덴 형제에게는 곧장 연민과 공감을 뜻하지 않는다. 뤽 다르덴은 2006년 평론가 조프 앤드루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우리 영화의 관객이, 극중 인물이 어디서 왔으며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지 설명할 수 없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아니, 이건 실패한 캐릭터 구축을 비판할 때 쓰는 말 아닌가? 다르덴 형제에게 캐릭터의 동기와 심리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관객이 영화 밖 삶에서 형성한 기존 가치체계 안에서 인물을 파악하고 요약할 수 있다는 의미다. 내가 본 <로제타> 이후 다르덴 영화는 인물을 동정하거나 판정하려는 관객의 몸에 밴 습성을 집요하고 치밀하게 차단한다. 우선 시나리오가 현재로 대뜸 뛰어든다. <내일을 위한 시간>은 산드라(마리옹 코티야르)를 내내 괴롭히는 우울증의 원인을 언급하지 않는다. <더 차일드>는 젊은 브루노(제레미 레니에)가 어쩌다가 훔치는 족족 써버리는 길거리 인생을 택했는지 맥락을 암시하지 않는다. 관객이 “이 인물이 과연 내가 편들 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인가?”를 판단하는 데에 쓸 변수를 아예 제거하는 것이다. 둘째로 인물의 행태다. 육체노동자, 룸펜 프롤레타리아트, 이민자가 대다수인 다르덴의 캐릭터들은 행위의 동기를 말로 설명하는 일이 드물다. 액션과 몸짓이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훨씬 중요하다. 따라서 행동의 의도를 보는 이가 확정하기 어렵다. 우리는 <아들>의 목수(올리비에 구르메)가 아들을 죽인 살인범 소년의 목을 왜 조르는지, 또 그러다 왜 멈추는지 해명을 얻지 못한다.
무엇보다 다르덴의 인물들은 관객의 응시를 좀처럼 되돌려주지 않는다. 배우가 카메라와 눈을 맞추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스크린에 슬픔이나 기쁨, 고통을 훤히 드러냄으로써 보는 이에게 잠정적으로 소통했다는 착각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카메라가 인물에 밀착한 작품 <아들>의 주인공은 공교롭게도 도수 높은 안경 탓에 눈동자를 읽기 어려웠다. 다르덴의 인물들도 물론 영화 속에서 운다. 그러나 그 정확한 이유를 관객이 적시할 수 있는 예는 적다. 다르덴 영화를 관람하는 일이 힘겹게 느껴지는 데에는 핸드헬드 촬영 기법이 주는 어지럼증도 있지만 메아리 없는 응시가 주는 쓸쓸함도 한몫하는 셈이다. 이는 관객의 응시를 인물이 받아들이고 어떤 방식으로든 돌려주는 주류영화와 다르덴 영화 메커니즘의 근본적 차이다(어쩌면 마리옹 코티야르라는 아름다운 스타 배우가 우울증을 앓는 인물을 연기한 <내일을 위한 시간>이 그나마 가장자리에 걸친 경우일 것이다). 이 메커니즘에는 배우의 연기도 연기지만 카메라, 곧 감독의 자리가 결정적이다.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적재적소’에 있지 않다. 우리가 타인과 세계를 바라볼 때 그렇듯 언제나 흔들리며 움직이고, 장애물이 시야를 가려 결정적 순간을 놓치기도 하면서 애써 설 자리를 찾고 따라간다. “다큐멘터리에서 배운 점은 우리의 카메라가 모든 걸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찍는 현상은 종종 카메라를 거절한다.” 언젠가 밑줄 그었던 다르덴 형제의 인터뷰다. 이 거절까지 포함해 찍는 게 맞는 방식이라고 그들은 믿는다. 결국 스토리, 인물, 카메라가 동정, 분노, 판단을 철저히 거절함으로써 관객의 자문은 “나는 이 인물과 사건을 어떻게 평가하는가?”에서 “나는 왜 어떻게 어디서 저들을 ‘보고’ 있는가?”로 이동한다. 나와 영화 사이의 거리가 의미심장해진다. 관객은 고작, 그러나 치열하게 깨닫는다. 나는 절대 영화 속 저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데 그들이 나와 같은 세계에 존재함을 인지하고 두 시간 동안 포기하지 않고 지켜볼 수는 있다. ‘고작’이라고 썼지만 그것이 어떤 감독에게는 영화라는 예술이 다다를 수 있는 최선이다. 다시 코티야르의 인터뷰로 돌아가자. “언제나 관객을 생각한다”라는 진술은, 감독을 포함한 관객이 영화를 응시하는 자리를 매 순간 염두에 두는 일이 다르덴 형제의 영화 만들기에서 가장 결정적인 과제라는 의미로 읽힌다. 영화의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카메라가 넘지 말아야 할 180도 선, 제4의 벽보다 더욱 절대적인 보이지 않는 선이 다르덴 형제의 머릿속에는 그려져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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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미야자와 리에
<토니 타키타니>와 <종이 달>의 미야자와 리에는, 사랑받는 것 외에는 무기가 없어 보이는 섬약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충동을 숙명에 이르기까지 가차없이 밀어붙이는 인물을 연기한다. <토니 타키타니>의 단정한 주부 에이코는 옷 가게에만 들어가면 자제심을 잃고 <종이 달>의 조용한 은행원 리카는 어느 날 고객의 예금에 손을 댄 후 두집살림까지 차리고 횡령의 규모를 불려간다. 딱히 에이코가 허영이 많아서, 리카가 사랑에 눈멀어 전락하는 이야기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들의 충동은 무엇을 소유하려는 욕심이라기보다 자기 증식 자체가 목적인 인간의 부조리한 관성으로 보인다. 마치 이유 없이 성장과 함께 커지는 반점 같다. 미야자와 리에가 연기하는 여자들은 누구에게 떠밀리거나 탓할 사람 없이 파멸과 눈을 맞추며 그것을 향해 페달을 밟는다. 자그맣고 메마른 그녀들은 어쨌든 단단하다. 식물의 씨앗처럼, 쪼갤 수 없는 존재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