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 x cross]
[trans × cross] 스타가 아닌 음악을 비평한다
2015-08-03
글 : 김성훈
사진 : 백종헌
첫 책 <전복과 반전의 순간> 펴낸 강헌 음악평론가

“수십년 동안 강헌은 강호의 여러 공간에서 생계형 강의를 해왔는데, 이를 가까이서 본 사람들마다 하는 소리가 ‘그대로 받아 적기만 해도 책이 된다’는 것이었다.” 문화평론가 정윤수의 이 말은 강헌의 강연이 그만큼 유익하다는 뜻일 것이다. <전복과 반전의 순간>(돌베개 펴냄)은 음악평론가 강헌의 강연을 정리한 책이다. 음악사의 강렬했던 순간 4가지를 주제로 김어준의 ‘벙커1’에서 한 강연이었다. “천하의 구라요, 장안의 이빨”답게 음악의 문외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술술 읽히는 게 이 책의 매력이다. 1990년대 초부터 음악에 관한 글을 써오고 있고, 한때 장산곶매에서 <오! 꿈의 나라>(1989), <파업전야>(1990), <닫힌 교문을 열며>(1992) 같은 독립영화와 프리시네마에서 <정글 스토리>(1996) 같은 상업영화를 만들었으며, 현재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라디오 프로그램 <황교익, 강헌의 맛있는 라디오>에서 ‘먹방’을 하고 있는 그를 만났다. 놀랍게도 이 책이 그의 첫 책이었다.

-책을 여러 권 낸 줄 알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책에서 소개한 대로 호가 의지박약을 줄인 의박이고, 자가 산만이라….

-<전복과 반전의 순간>은 음악 강연을 녹취한 뒤 정리한 글이다. 출판을 염두에 둔 강연이었나.

=아니다. 강연이 끝난 뒤 출판 제안을 받았다. 책을 새로 쓰는 건 언제 끝날지 모른다고 했더니 편집자가 “더 늙으면 영원히 책을 못 낸다”더라. (웃음) 강연을 녹취해 정리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이 책에서 음악사의 역사적 장면으로 재즈와 로큰롤의 혁명, 한국의 통기타 혁명과 그룹사운드, 모차르트와 베토벤, <사의 찬미>와 <목포의 눈물> 속에 숨은 비밀 등 4가지로 나눴다. 기준이 뭔가.

=그 4가지 장면들이 음악사에서 장르와 시대에 상관없이 나한테 가장 매력적인 순간이었다. 프랑스 작가 앙드레 모루아가 그랬던가. 혁명은 잠복기가 길고, 발생기가 짧다. 거대한 변화를 향한 순간은 짧을 수 있고, 그 순간은 시행착오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중요한 변화의 동력이 될 수 있다.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에 주목한다는 건 인간의 본질을 읽어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걸 시간 순서대로 강연을 하면 내용이 지겹고 지루하지 않겠나. 4가지 주제로 나눈 것은 그래서다.

-각각의 주제를 음악에 문외한인 독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했다. 재즈를 ‘꼴림’으로 표현한 것도, 밥 딜런과 비틀스가 왜 음악사에서 가치가 있는지 설명하는 것도 재미있더라.

=예술 전문 잡지나 책은 어렵게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지 않나. 읽기가 어렵다. 대학생뿐만 아니라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도 많이 했는데 이들을 상대로 어렵게 얘기하는 건 웃긴 거다. 이 강연은 대중이 대상이라 중학교 2학년생들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했다.

-음악평론가로서 처음 쓴 글이 가수 김현식에 대한 것이라고 들었다.

=원래 음악평론가를 하려는 생각이 없었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나왔는데, 1년 후배였던 육상효 영화감독이 당시 <일간스포츠> 연예부 기자였다. 그가 김현식의 생애를 다룬 책 <사랑의 가객, 김현식>을 쓰려는데 김현식 음악비평을 써달라고 부탁해왔다. 한국에서 대중음악을 비평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당시 나는 영화를 하고 있었다. 나이 서른이 넘도록 한달에 5만원밖에 못 벌던 때다. 원고료 40만, 50만원에 눈이 멀어 김현식 앨범을 모두 가지고 집에 와서 음악만 듣고 글을 썼다. 그 책이 많이 팔렸다. 덕분에 전화통에 불이 났다. 온갖 매체, 심지어 학보사에서까지 원고 청탁이 밀려들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허술한 사회다. (웃음) 다 승낙했다. 생계형 원고를 많이 써서 돈을 많이 벌었다.

-글을 쓸 때 음악이나 뮤지션은 어떤 기준으로 선정했나.

=매체가 주제를 정해 청탁해올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쓰고 싶은 걸 쓸 수 있도록 자유를 줬다. 돈이 생기면 주로 판을 샀다. 직업 평론가가 되고 난 뒤에는 판을 받지 않고, 샀다. 그러니까 죽이고 싶은 놈들이 정말 많은 거다. 판이 나오면 매니저들이 주기도 했는데, 그걸 받으면 매니저 얼굴이 자꾸 생각난다. 그래서 안 쓰게 되고, 공짜로 받은 판은 더욱 안 듣게 된다. 매니저들한테 ‘저한테 판을 주시면 더 손해다. 첫째로 안 듣고, 둘째로 안 쓴다’고 그랬다. 글을 쓸 때 원칙은 듣고 난 뒤에 돈이 아까운가, 안 안까운가다. 그 뒤에 찬사와 비난이 따른다.

-이미자, 조용필, 한대수, 김현식, 김광석 등 과거 활동했던 가수들에 대한 글은 많이 썼던 반면, 요즘 가수들에 대한 글은 2011년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강헌의 가인열전’에서 쓴 보아 정도였던 것 같다. 요즘 가수들에 대한 글을 쓰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다.

=많은 이유가 있다. 일단 쓸 데가 없다. 아무도 원고 청탁을 하지 않는다. 영화는 <씨네21>이라는 전문 잡지가 있지만, 음악은 그게 없다. 신문은 음악 담당 기자들이 직접 쓰고.

-웹이 있지 않나.

=게을러서 SNS도 하지 않는다. 돈을 받지 않고 글을 쓰는 건 내 인생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지금 시대는 평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K팝이니 한류 붐이 일어난 뒤로 음악은 SM 같은 거대 군산복합체의 한 부품일 뿐이다. 그런 회사는 음반이 아닌 스타를 판다. 나는 스타를 비평하는 평론가가 아니다. 지금은 예능이 필요한 시대다. 현재 한국 대중문화의 거대 권력이자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예능은 비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소비를 필요로 할 뿐이다. 요즘 가수에 대해 난 쓸 말이 없다. 예능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장산곶매에서 <오! 꿈의 나라> <파업전야> <닫힌 교문을 열며> 같은 작품을 동료들과 함께 만들었다. 원래 영화를 좋아했나.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영화에 관심이 없었다. 소설가가 되기 위해 국어국문학과에 갔다가 음악이 좋을 것 같아 음악대학원 음악학과로 진로를 바꿨는데 재미가 없었다. 이것 참 심각하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영화가 차세대 트렌드가 될 것 같아 무작정 충무로로 갔다.

-장산곶매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또래였던 이은 명필름 대표를 만났다. 그때는 장산곶매라는 이름도 없었다. <오! 꿈의 나라>를 찍고 난 뒤 상영을 할 때 이름이 필요해서 만들었다. 한편 찍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는데 모인 김에 계속하자고 해서 뭉치게 됐다. 전교조 투쟁을 그린 <닫힌 교문을 열며>가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 없이 상영해 기소됐다. 그래서 영화법 위헌 신청을 했고, 헌법재판소는 검열이 헌법에 명시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고 신해철이 음악감독으로 참여했던 <정글 스토리>를 제작한 뒤 영화를 그만두게 된 계기가 뭔가.

=장산곶매를 그만둔 뒤 김인수 영화진흥위원회 전 사무국장과 함께 파트너로 제작사 프리시네마를 만들었다. A4 한장에 <정글 스토리> 시놉시스를 딱 10줄 써서 삼성영상사업단에 들고 갔는데 투자를 받았다.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다. 두 번째 제작 영화 <넘버.3>(1997)가 흥행에 성공해 해외 마켓에 팔고, 비디오 판권 신기록을 세우는 걸 보면서 영화는 비즈니스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상업영화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마침 음악평론가로서 먹고살만 했고,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한 것이다.

-축구를 무척 좋아한다고. 응원하는 팀이 있나.

=리버풀. 비틀스의 고향이기도 하고, 내 고향 부산과 같은 항구도시이고, 팬들의 충성심이 감동적이라 1980년대부터 응원해왔다. 홈구장인 안필드에 가서 제라드를 보는 게 꿈이었는데 제라드가 떠나서…. 최근 스털링도 맨체스터 시티로 떠나지 않았냐고? 그놈 같은 잔머리는 떠나야 한다.

-명리학에도 관심이 많다고 들었다. 계기가 있나.

=2004년 대동맥이 파열돼 거의 죽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는데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전라남도에 내려가 장기 요양을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역술가였던 친구의 아버지께서 사주를 봐주신 적이 있다. 40대 초반에 큰 위기가 있지만 죽지는 않고, 결혼을 3번 하고, 글을 써서 먹고산다는 등 그런 얘기였는데, 요양을 하면서 삶을 되돌아보니 그 사람 말대로 살고 있는 거다. 서울에 사는 후배한테 전화해 명리학 책을 보내라고 해서 미친 듯이 읽었다.

-현재 준비하고 있는 책이 많다고 들었다.

=<전복과 반전의 순간>은 출판사가 계속 내주면 올해 말에 2권, 내년 상반기에 3권이 나온다. 내년쯤에는 좀 딱딱하더라도 한국 대중문화사를 정리할 생각이고. 20년 동안 인연을 이어온 신해철에 관한 책은 그의 1주기가 되는 올해 10월에는 낼 것 같다. 명리학 책은 거의 마무리됐다. 음식에 관한 책도 한권 낼 계획이다.

강헌이 꼽은 한국 명반 베스트5

강헌 음악평론가의 방 한쪽 벽면은 음반으로 가득 차 있다. 그가 생각하는 한국 대중음악 명반이 궁금해 베스트5를 꼽아달라고 부탁했다. 1위는 “록이라는 서구의 도구로 한국 대중음악의 풍토를 쓴 진정한 독립 선언”이라는 《신중현과 엽전들 1집》(1974)이다. 2위는 “국가권력의 심의 때문에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게 되는 힘든 시기를 겪으면서도 서정적인 예술가의 통찰력을 감동적으로 보여줬던” 정태춘의 다섯 번째 정규 앨범인 《아, 대한민국…》. 3위는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 <바람과 나> 등 명곡이 수록된 한대수 1집 앨범 《멀고 먼 길》(11974). 4위는 “히트곡 중심의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앨범 전체의 완성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들국화 1집 《들국화》(11985)이다. 마지막으로 “사랑 타령, 자연 예찬의 수준에 머물러 있던 한국 대중음악의 지평을 연” 넥스트 2집 앨범인 《The Being》(1994)을 5위로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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