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엘리자베스 뱅크스] 금발 미녀의 전형을 깨다
2015-08-04
글 : 송경원
<러브 앤 머시> 엘리자베스 뱅크스
<러브 앤 머시>

영화 <헝거게임: 더 파이널>(2015) <피치 퍼펙트: 언프리티 걸즈>(2015) <러브 앤 머시>(2014) <모든 비밀스러운 것들>(2014) <워크 오브 셰임>(2014) <헝거게임: 모킹제이>(2014) <레고무비>(2014) <헝거게임: 캣칭파이어>(2013) <피치 퍼펙트>(2012)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2012) <맨 온 렛지>(2012) <디테일스>(2011) <아워 이디엇 브라더>(2011) <쓰리데이즈>(2010) <안나와 알렉스: 두 자매 이야기>(2009) <산타는 괴로워>(2007) <슬리더>(2006) <40살까지 못해본 남자>(2005) <씨비스킷>(2003) <스파이더맨>(2002) <서랜더 도로시>(1998)

화사한 금발과 인형 같은 몸매, 거기다 시원한 미소까지 더하면 이른바 전형적인 미인의 완성이다. 그 전형적이라는 말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녀의 진가를 가려왔는지 모른다. 엘리자베스 뱅크스는 금발 미녀의 표본과도 같다. 2012년 두 번째 아이를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언론 석상에 드러난 그녀의 몸매를 두고 여러 패션지에서 ‘관리의 승리’라는 칭송이 나올 만큼 독보적인 몸매다. 하지만 그 빛나는 외모로 인해 뱅크스는 수많은 금발 미녀 군중에 묻혀 꽤 오랜 무명 시절을 거쳐야 했다. 뱅크스가 이 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코미디 연기를 통해서였다. 2005년 <40살까지 못해본 남자>에서 소심남 스티브 카렐에게 들이대는 섹시한 여성으로 출연한 뱅크스는 이전까지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단역이었음에도 심상치 않은 존재감을 드러낸다. <40살까지 못해본 남자>의 섹시녀 베스는 단순히 섹스 어필로 소비되는 캐릭터 이상의 깊은 사연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리고 끝내 세스 로건과 끝내주는 장면을 찍는다. 이후 두 사람은 <잭 앤 미리 포르노 만들기>(2008)에서 다시금 호흡을 맞추며 인상 깊은 코미디 연기를 선보인다.

엘리자베스 뱅크스에게 코미디가 중요한 이유는 어쩌면 그 과장된 몸짓이야말로 그녀의 진가를 드러낼 최적의 무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섹시녀를 연기할 때도 뱅크스의 코미디가 뇌리에 남는 건 그 이면에 어떤 사연 같은 것이 읽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꽤 오랜 정극 연기를 통해 다져진 감정일 것이다. 금발의 미녀배우 중에 이 정도로 표정이 다채롭고 주름이 깊은 배우는 흔치 않다. 그녀는 클로즈업 화면에서도 오직 자신의 얼굴만으로 영화를 이끌어가는 드문 배우 중 한 사람이다. 코미디로 주목 받았지만 사실 출발은 정극 연기였다. <서랜더 도로시>로 영화판에 처음 발을 들인 뱅크스는 크고 작은 조연을 오가며 얼굴 알리기에 애썼다. 2003년 <씨비스킷>은 큰 기회였다. 제프 브리지스가 연기한 찰스 하워드의 아내 역을 맡으며 미국배우조합이 수여하는 신인연기부문의 후보에까지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그 이후의 도약이 쉽지 않았다. 그녀의 활동 폭이 넓어진 건 <40살까지 못해본 남자> <산타는 괴로워> 등 코미디 연기를 통해 대중적으로 얼굴을 알린 이후다.

물론 그렇다고 코미디영화에 올인했다는 말은 아니다. 뱅크스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코미디영화를 계기로 “모든 역할을 사랑할 수 있게 된” 여유를 얻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확실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마스크는 이미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비서 역할을 통해 증명됐다. 2002년 <스파이더맨> 1편부터 2007년 3편까지 줄곧 피터 파커를 응원하는 신문사 비서 미스 브랜트 역을 연기했는데, 몇몇 팬들은 그녀를 시리즈의 트레이드 마크로 여길 정도였다. 미스 브랜트가 “곧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 힘내요”라고 격려를 할라치면 짧은 대사와 정황 속에서도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 무게감은 온전히 배우 스스로의 것이다. 정극, 드라마, 로맨스, 호러, 코미디, 블록버스터까지 엘리자베스 뱅크스는 영화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달성하며 다양한 모습을 선보인다. 단순하게 변신의 귀재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스스로의 캐릭터를 부각시키는 대신 상대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넉넉한 포용의 자세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오랜 무명생활과 수많은 단역, 정극 드라마로 다져진 연기력과 작품에 대한 이해가 오늘날 다채로운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는 엘리자베스 뱅크스를 만들었다. 그녀를 설명하는 데 있어 ‘팔색조’만큼 정확하고 의미 있는 단어도 없을 듯하다.

눈에 띄는 외모임에도 불구하고 뱅크스는 자신의 얼굴을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스타일이 아니다. 영화가 원하는 바, 장르가 필요로 하는 역할 속에 철저히 녹아들어가는 쪽에 가까운 배우다. 그런 그녀가 대중적으로 크게 각인된 역할이 <헝거게임>의 진행자 에피 트링켓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화려하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한 화장과 퍼레이드 의상 같은 드레스로 대중의 이목을 단숨에 사로잡는 에피 트링켓은 영화에서도 철저히 ‘진행자’라는 캐릭터를 소화해내는 인물이다. 얼마나 화려하게 보일 수 있을지에 집착하는 이 의상도착증 환자가 가장 매력적으로 보이는 순간은 역설적으로 화장을 지운 민낯을 보일 때다. <헝거게임: 모킹제이>에서 혁명군에 끌려와 수감생활 중인 에피 트링켓을 첫 대면할 때의 충격은 거의 에피소드1에서 그녀의 모습을 처음 봤을 때에 맞먹는다. 하지만 우리가 이 과장된 인물에 끌리는 이유는 그 이면에 숨겨진 배려심과 주인공 캣니스(제니퍼 로렌스)를 향한 따뜻한 애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가면 같은 분장을 했을 때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던 그 마음이 민낯의 엘리자베스 뱅크스를 접하는 순간 선명하게 읽힌다. 보랏빛 드레스로 자신을 꾸몄던 에피 트링켓과 배우 엘리자베스 뱅크스는 여러 지점에서 닮았다. 둘 다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고 때로는 과장된 제스처도 취하지만 본질적으로 상대를 이해하는 인간애로 충만하다. 엘리자베스 뱅크스는 천변만화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상대에 대한 이해와 이를 받아줄 넉넉한 여유가 묻어 있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가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존재감 있고 빼어난 조연 중 한 사람인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1960년대를 풍미한 비치 보이스의 리더인 브라이언 윌슨의 명암을 그린 <러브 앤 머시>에서 좌절한 천재 뮤지션 윌슨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는 여성 멜린다 역에 엘리자베스 뱅크스를 캐스팅한 건 신의 한수라 할 만하다. 멜린다의 외견은 전형적인 금발 미녀에다 그녀에게 주어진 역할이란 건 결국 윌슨을 포용하고 다독여주는 것이지만, 영화 속 멜린다는 그런 전형성에 조금씩 금을 내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윌슨의 옆에 머문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멜린다가 윌슨의 이야기를 들어줄 때의 표정이다. 그녀는 그저 담담하게, 가끔은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최대한 정성껏 그의 말을 들어준다. 무조건적인 표용이나 억눌러온 감정을 갑작스레 폭발시키는 대신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간혹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 이야기를 들어주려는 태도를 끝까지 유지한다. 이때 간혹 느껴지는 불편함을 구태여 숨기려 하지도 않는데, 그 복잡 미묘한 표정이야말로 멜린다에게 생기를 부여하는 원동력이다. 그녀는 단순히 고정된 역할에 그치지 않고 거기에 자신만의 해석을 한줌 더 부여할 줄 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엘리자베스 뱅크스는 지적인 배우다. <워크 오브 셰임>처럼 금발 미녀에 대한 고정관념을 고스란히 활용한 코미디 연기와 정적인 드라마, 폭발하는 연기와 망가지는 코미디를 자연스럽게 넘나들기 위해서는 캐릭터에 대한 이해와 작품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 모든 영역의 캐릭터를 균형감 있게 소화하는 그녀는 상대에 대한 이해, 궁극적으로는 자신에 대한 이해가 충분한 배우다. 감독 겸 제작자로 나선 <피치 퍼펙트: 언프리티 걸즈>의 성공은 진부한 듯 한끗이 달랐던, 엘리자베스 뱅크스 고유의 통찰과 균형의 결과라 해도 무방하다. 지난 7월27일 제7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그녀가 이번엔 어떤 혜안과 분석력을 보여줄지 기대해봐도 좋을 듯하다.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
<헝거게임: 모킹제이>

변신 성공!

엘리자베스 뱅크스는 몰라도 <헝거게임>의 에피 트링켓을 모르긴 어려울 것이다. 형형색색의 가발을 쓰고 가발의 모양으로 그날의 기분을 피력하는 이 활기찬 헝거게임 추첨 수행원은 이미 영화의 아이콘 중 하나다. 기본적으론 독재정권 캐피톨의 정책에 순응하는 인물이지만 본인도 모르는 사이 인간적인 측면을 드러내며 캣니스를 끝까지 돕는 그녀는 왠지 미워할 수 없는 푼수처럼 보인다. 현명한 조언자는 아니지만 마음 편한 상담자라는 점에서 엘리자베스 뱅크스의 진가를 발휘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시리즈 3편에 선보이는 맨 얼굴의 충격은 1편의 첫 등장만큼이나 강렬한데, 긴 경력에 비해 수상 경력은 상대적으로 모자란 엘리자베스 뱅크스에게 ‘MTV영화제 최고의 영화 속 변신상’을 2번이나 안긴 희대의 캐릭터다(2012년 <헝거게임: 캣칭파이어>, 2015년 <헝거게임: 모킹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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