푹푹 찌는 여름날. 텍사스주 한 작은 마을에 자동차 판매원으로 들어온 해리(돈 존슨)는 당신과 나, 우리 모두와 비슷한 사람이다. 우리가 그렇듯이 그도 자신을 꽤 괜찮은 사람으로 여긴다. 준수한 용모. 30대 중반에 아직까지는 유지하고 있는 젊은 육체. 그래서 그는 행운이 그에게 그냥 다가오길 기다리지 않는다. 젊은 시절에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직접 손에 넣어야 한다. 빨리 ‘한탕’을 쳐야 인생을 편히 살 수 있다. 그것이 그의 인생철학이다. 그런 해리의 눈에 그 시골 마을의 은행 보안이 매우 허술하다는 사실이 들어온다.
우린 이런 인물들에 대해 익숙하다. 그리고 오랫동안 사랑해왔다. <리피피>(감독 줄스 다신, 1955)의 토니가 그랬고 그래서 당연히 <암흑가의 세 사람>(감독 장 피에르 멜빌, 1970)의 코리가 그랬다. <우아한 세계>(감독 한재림, 2007)의 강인구도 그랬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한탕’하고 깨끗하게 손을 씻은 뒤 그 바닥을 떠나려 했다. <가르시아>(감독 샘 페킨파, 1974)의 베니 역시 갑작스레 눈앞에 굴러들어온 100만달러가 아니었다면 오늘도 유쾌하게 술집에서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차이니즈 부키의 죽음>(감독 존 카사베츠, 1976)의 코스모는 노름빚만 없었더라도 그가 운영하던 스트립 바의 쇼는 오늘도 계속되었을 것이다. 갑자기 눈앞에 어른거리는 일확천금의 유혹. 어쩌다 불어난 노름빚의 짓눌림. 이게 그토록 큰 죄란 말인가. 그들도, 우리도, 해리 매덕스도 모두 그곳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심지어 베니와는 다르게 해리는 자기 분수를 아는 사람이다. 종국에 이르러 도대체 왜 알프레도 가르시아의 ‘머리’ 때문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는가를 알기 위해 갱단과 일대 격전을 벌이는 베니와 달리 해리는 자기의 행동에 대한 성찰이 전혀 없다. 그는 샘 페킨파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 혹은 <악질 경찰>(감독 아벨 페라라, 1992)의 ‘경찰’처럼 구원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거나 개과천선하기에는 자신의 죄가 너무 경미하다고 믿는다. 심지어 그는 같은 회사에 다니는 경리직원 글로리아(제니퍼 코넬리, 그렇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청순했던 데보라는 6년 뒤에 어른이 되어 이 영화에 출연했다)에게 연민마저 느끼지 않는가(물론 단순한 연민이라고 말하기엔 그녀의 외모는 너무도 빼어나지만). 해리는 여전히 가슴이 어느 정도는 뜨거운, 굳이 나쁜 놈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흔히 볼 수 있는, 장삼이사, 그런 남자다.
하지만 해리의 악행일지는 간단하게 끝나지 않는다. 자동차 판매 회사의 젊은 사모님 돌리(버지니아 매드슨)는 해리를 끈질기게 유혹하고 해리는 그녀를 굳이 마다하지 않는다. 그냥 마다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다. 사장이 주말 사냥을 위해 집을 비웠다는 사실을 안 해리는 깊은 밤, 돌리가 혼자 있는 집으로 구렁이처럼 미끄러져 들어가 그녀와 몸을 섞는다. 하지만 역시 그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내가 여기서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불현듯 정신을 차린 해리는 돌리에게 능욕의 한마디를 던진다. “이 정도 미끼는 나도 너끈히 피할 수 있어. 너 같은 계집이 파놓은 함정에 내가 빠질 것 같아? 별것도 아니면서.” 왜냐. 그는 마음속으로 순수하게 글로리아만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시 우리의 해리.
해리는 자신의 ‘철학’대로 마을 한 건물에 불을 낸 뒤 은행원들이 전부 의용 소방대원으로 진화에 나섰을 때 유유히 은행을 턴다. 은행을 털 때 누굴 죽인 것도 아니고 폭행을 휘둘렀던 것도 아니다. 단지 현금 뭉텅이를 자루에 담아 마을 어귀 야산에 깊이 묻었을 뿐이다. 해리가 늘 담배 한모금을 맛있게 빨듯이 이 일은 간단하게 끝이 났다.
하지만 인생사가 어떻게 담배 한 모금처럼 간단한가. 누군가가 새어나오는 담배 연기를 보기 마련이다. 경찰은 마을에 새롭게 나타난 해리를 의심한다. 경찰은 화재가 난 뒤 20분 뒤에야 해리가 현장에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그때 처음부터 화재 현장에서 그를 봤다는, 해리에게 매우 유리한 목격자가 나타난다. 다름 아닌 돌리. 이 증언으로 해리는 경찰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돌리의 손아귀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두 사람의 밀회는 끈끈한 여름날처럼 질퍽거리며 계속된다.
해리가 깊은 밤 돌리를 찾아갈 때면, 언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게, 어디선가 블루스가 들려온다. 흐느끼는 슬라이드 기타의 선율. 그리고 외로움, 고단함, 배고픔, 그럼에도 들끓는 육욕으로 가득 찬 존 리 후커의 낮은 신음이 늪지대의 강물처럼 스멀스멀 흐른다. 그 신음은 자기 발로 찾아갔지만 이내 그를 기다렸다는 듯이 유혹하는 돌리 앞에서 토해내는 해리의 신음과 뒤섞여버린다.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위해 결성된 블루스 밴드는 단 이틀 동안에 모든 녹음을 마쳤다. 존 리 후커가 대부분 보컬을 맡았고(단 한곡에서 타즈 마할이 노래를 불렀다) 기타에 타즈 마할과 로이 로저스, 베이스에 팀 드러먼드, 드럼에 얼 팔머. 거의 하나의 주제로부터 파생된 것 같은 여러 변주곡은 일사천리로 녹음되었다. 여기에 녹음 셋쨋날 마일스 데이비스가 스튜디오에 찾아왔다. 그는 이미 녹음된 밴드의 연주를 들으면서 그의 트럼펫으로 제2의 보컬라인을 즉석에서 만들어나갔다. 그의 뮤트 트럼펫 선율은 팽팽한 긴장 속에 부풀어오른 은밀한 죄악이 가냘픈 기적을 울리며 경미한 틈새로 새어가는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을 준다.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 음반에는 감독 데니스 호퍼가 쓴 마일스 데이비스에 대한 짤막한 회고가 실려 있다. 어느 날 마일스 데이비스는 자신 앞에서 마약상 한명을 때려눕히더니 이렇게 이야기했다는 거다. “내가 또다시 헤로인을 하면 저놈이 날 죽여도 좋다고 했지.” 하지만 마일스 데이비스가 평생 마약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듯이 해리 역시 악의 올가미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한다. 급기야 글로리아의 어린 시절의 약점을 쥐고서 그녀로부터 오랫동안 금품을 갈취해온 마을 미장이 윌리엄(프랭크 새들러)과 다투다가 해리는 그를 살해하고 만다. 불쌍한 자기 애인을 지키겠다는 연민과 정의감 혹은 자신의 죄가 커질수록 그녀를 통해 구원받고 싶었던 그의 욕망이 더 큰 죄악을 불러온 것이다. 가슴 한복판이 뻥뚫린 채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윌리엄을 해리가 황망하게 내려다보고 있을 때 마일스 데이비스의 트럼펫은 싸늘한 경적을 울린다. 그리고 마일스 데이비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목젖을 미시시피강 진흙에 재웠다가 꺼낸 것 같은 존 리 후커의 신음은 더이상 출구가 없는 해리의 한숨을 대변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의 해리는 이 죄악에서 빠져나오려고 한다. 그리고 글로리아를 구해내려고 한다. 그는 자신과 순결한 글로리아가 선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선함이란 절대적일까? 혹시 그 선함이란 탐욕적인 돌리, 비열한 윌리엄의 틈바구니에서 만들어진 허상은 아닐까? 우리의 죄악은 서로 얽혀 있는 것은 아닐까? 존 리 후커의 목소리와 마일스 데이비스의 트럼펫은 그것을 한번쯤 들여다보라고 이야기한다. 이 눅눅한 여름이 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