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판타스틱4] 원작 빼고 다 바꿨어요
2015-08-24
글 : 송경원
<판타스틱4>는 왜 기존 시리즈를 뒤엎고 리부트했나

지난 8월7일, <판타스틱4>가 북미에서 개봉했다. 2005년 <판타스틱4> 이후 10년 만의 리부트다.반응은 부정적인 의미로 놀랍다. 로튼토마토 등 평점 사이트에서는 사상 최악의 평점 행진이 이어지고 있고 개봉 첫주 성적도 2600만달러로 역대 최저 수준이다. 이쯤되면 차라리 궁금해진다. 웬만해선 실패하기 힘들다는 슈퍼히어로 원작을, 그것도 1억2천만달러나 들인 블록버스터가 어쩌다 이런 결과를 빚은 걸까. 2편까지 나온 시리즈를 왜 원점으로 돌아가 리부트했어야 했는지, 감독의 야심은 무엇이었는지, 세간의 평처럼 <판타스틱4>가 진정 문제작인지 알아보기 위해 개봉에 앞서 여러 요소들을 뜯어봤다. 어설프게 평가가 갈리는 영화보다 지금의 <판타스틱4>를 둘러싼 반응이 훨씬 더 흥미롭다. 그저 쓰라린 괴작으로 기억될 수도 있지만 슈퍼히어로영화 위주의 흐름에 대한 일대 점검의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슈퍼히어로영화에 애정이 있는 장르 팬이라면 눈으로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의외의 재미와 숨겨진 의도를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니까.

독자적인 재해석 vs 원작 팬의 저항감

원작 코믹스 <판타스틱4>는 DC 코믹스의 저스티스 리그에 자극받아 1961년 스탠 리가 만든 마블 최초의 히어로 팀이다(참고로 ‘어벤져스’는 1963년 데뷔). 마블 코믹스에서 ‘어벤져스’, ‘엑스맨’ 등과 더불어 마블 코믹스에서 손꼽히는 인기 프랜차이즈 중 하나로 기본적으로 따뜻한 가족 히어로물을 표방한다. 천재 과학자 리드 리처드(=미스터 판타스틱), 그의 부인 수잔 스톰(=인비서블 우먼), 수잔 스톰의 동생 쟈니 스톰(=휴먼 토치), 리처드의 동료 벤 그림(=더 씽)의 4인조로 구성된다. 작품 전체의 컨셉이 평범한 인간이 힘을 얻게 되는 ‘가족 히어로의 모험’에 가깝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밝고 경쾌한 것이 특징이다. 팀 리더이자 과학자 리드 리처드를 중심으로 기발한 과학실험과 우주여행, 외계인과의 조우 등의 소재로 독자들의 관심을 샀다. 참고로 리드 리처드는 마블 유니버스 전체 설정에서 인간 중에는 가장 높은 지능의 소유자다. 이번 영화에서는 원작의 설정을 탈피하고 있는데, 리드 리처드의 어린 시절이나 수잔 스톰의 아버지 프랭클린 스톰이 등장하는 등 몇몇 부분에서는 오히려 2005년에 제작된 <판타스틱4>보다 원작에 충실하기도 하다.

조시 트랭크 감독은 “기본 설정을 바탕으로 하되 상당 부분 ‘얼티미트 판타스틱4’(2000년 이후 신규 독자 유입을 위해 새롭게 재창조한 시리즈)에 기초했다”고 밝혔다. 우주방사선에 노출되어 초능력을 얻었던 원작과 달리 차원 이동 장치를 개발해 행성간 이동을 시도하며 초능력을 얻게 된다는 설정이나 고등학생 리드 리처드가 뛰어난 재능으로 도리어 선생과 친구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등 어두운 면모를 드러낸다는 점이 대표적으로 바뀐 부분이다. 물론 이미 3번이나 제작된 영화인 만큼 세세한 설정보다 세계관에 대한 감독의 해석이 더 중요할 것이고, 조시 트랭크는 자신에게 친숙하고 자기가 잘하는 쪽으로 영화를 이끌고 갔다.

캐스팅의 파격

제목 빼고 모든 걸 바꾸었다. ‘판타스틱4’ 팀원 전원이 교체되고 우주물리학을 연구한 과학자들이라는 2005년 버전의 설정도 특별한 실험에 참가한 청소년들로 바뀌었다. 리드 리처드 역에 <위플래쉬>(2014)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마일스 텔러가, 수잔 스톰 역에 열여섯에 화려하게 데뷔한 후 꽤 오랜 침체를 딛고 미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이며 우뚝 선 케이트 마라가, 쟈니 스톰 역에 <크로니클>(2012)에서 함께 작업했던 마이클 B. 조던이, 벤 그림 역에 우리에게도 친숙한 연기파 배우 제이미 벨이 각각 캐스팅됐다. 얼핏 의외의 선택처럼 보일 수도 있다. 기존의 <판타스틱4> 이미지와는 확실히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조시 트랭크 감독의 머릿속에는 확실한 비전이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파격인 건 수잔 스톰의 동생인 쟈니 스톰 역에 흑인인 마이클 B. 조던의 기용인데, 감독은 그를 쟈니 역에 캐스팅하기 위해 오누이인 수잔 스톰이 입양된 것으로 설정까지 바꾸었다. 감독의 말에 따르면 “다문화 가정과 입양이 보편화된 현 시대를 반영”한 설정이라고 하는데 얼마나 설득력 있게 극에 녹여냈는가에 따라 팬들의 반응도 갈릴 것이다.

1994년 영화화, 2005년 부활, 2015년 다시 새 출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건 2005년 이십세기 폭스가 제작한 <판타스틱4>와 2007년 <판타스틱4: 실버서퍼의 위협>이다. 하지만 <판타스틱4>의 첫 번째 공식 영화는 1994년 로저 코먼이 제작한 <판타스틱4>다. 슈퍼히어로 코믹스가 영화 소재로 주목받지 못했던 80년대 중반에 콘스탄틴 필름은 <판타스틱4>의 판권을 구입한다. 그러다 1989년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이 성공하며 슈퍼히어로영화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지자 마블은 영화제작의 의지가 없다고 판단될 시 판권을 다른 곳에 넘기겠다고 경고한다. 이에 제작사는 판권을 지키기 위해 B무비의 제왕 로저 코먼과 연계해 1992년 12월 제작에 착수하고 100만달러 예산, 한달 남짓한 기간에 영화를 완성해낸다. 처음엔 각종 홍보를 하는 등 개봉할 것처럼 보였지만 1994년까지 미루다 결국 극장 개봉을 하지 못한다. 이후 마블에서 마스터 필름을 회수, 폐기했지만 일부가 유출되어 팬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유통되며 희대의 괴작이란 평을 얻었다(예산상의 문제로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특수효과를 제외하고 스토리라인은 의외로 괜찮다는 평도 있다). 2005년 이십세기 폭스에 의해 부활한 <판타스틱4>는 평단과 원작 팬들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성공적인 흥행을 기록(1억8천만달러)하며 2편까지 제작됐다. 하지만 아쉽게도 <판타스틱4: 실버서퍼의 위협>의 흥행 부진으로 3편 제작까진 이어지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고 이번에 야심차게 새롭게 리부트하며 시리즈를 정비 중이다. 마블 원작 중에서도 워낙 인기 시리즈라 제대로 프랜차이즈하고 싶은 마음은 십분 이해가 간다. 아마도 문제가 있다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속편을 지나치게 의식한 구성과 설정, 설명 위주의 전개로 인해 무너지는 슈퍼히어로영화를 우리는 심심찮게 봐왔다. 적어도 프랜차이즈 세계관 안에서 다음 작품을 위한 설정이 아닌, 그저 한 작품으로 좋은 영화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족 히어로냐, 호러 SF냐

원작은 물론 기존의 2005년 <판타스틱4>와 비교해 리부트된 <판타스틱4>의 결정적인 차이는 작품 전반의 정서가 어둡고 무겁다는 점이다. 조시 트랭크 감독은 인터뷰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사실적이고 어두운 영화”로 만들 것을 언급했고, “원작에 구애받지 않는 새로운 해석을 원한다”고 밝혔다. 팬들의 질문에 대해 자신의 트위터에서 이 영화를 “SF와 보디호러 장르의 결합”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관건은 가족 히어로와 카리스마 악당 닥터 둠이 주요 포인트였던 원작을 얼마나 다르게 재창조해냈는가에 달렸다. 아마도 조시 트랭크 감독의 전작 <크로니클>의 어두운 정서가 참고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005년 <판타스틱4>가 유난히 혹평에 시달렸던 부분이 지나치게 가벼운 분위기와 우연히 얻은 힘에도 전혀 고뇌하지 않는 캐릭터의 얄팍함이었다는 걸 상기해보면 조시 트랭크 감독의 선택이 완전 엉뚱한 것만은 아니다. 다만 심각하고 진지한 ‘판타스틱4’가 관객에게 어디까지 설득력 있게 다가올지가 관전 포인트 중 하나일 것이다.

모험 혹은 드림팀

이십세기 폭스는 ‘판타스틱4’를 새롭게 부활시키기 위해 과감한 모험을 시도한다. 파운드 푸티지 장르와 슈퍼히어로물의 결합으로 화제를 모은 <크로니클>의 조시 트랭크 감독을 전격 기용한 것이다. 1984년생 조시 트랭크는 두 번째 연출에 거대 프랜차이즈의 밑그림을 그릴 설계자로 발탁된다. 폭스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관객의 마음을 훔친 <크로니클>의 재치가 이번에도 발휘되길 빌었을 것이다. 실제로 리부트 <판타스틱4>는 <크로니클>에서 선보인 불안과 비틀린 성장담의 그늘 아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크로니클>은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차용한만큼 영화가 주는 현실감이 탁월하다. “세상 어딘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느낌이 들어야 좋은 영화”라는 인터뷰에서 그가 지향하는 영화의 기본을 어렴풋이 읽을 수 있다. 2005년 <판타스틱4>가 힘을 얻은 주인공들이 아무런 고뇌도 하지 않고 쉽게 자신의 입장을 받아들이는 가벼운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신체변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의 공포와 어둠을 확실히 표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감독이 스스로 밝힌 영화의 비전이자 <크로니클>에서 선보인 장기이기도 하다. 조시 트랭크는 <스타워즈> 앤솔러지의 두 번째 영화 연출에 내정되며 일약 SF 장르의 최대 기대주로 떠오르기도 했는데 얼마 전 하차를 발표하며 팬들의 아쉬움을 자아냈다. “대중의 관심에서 자유로운 오리지널 영화를 차기작으로 하고 싶다”는 조시 트랭크의 고백에서 시리즈에 대한 중압감을 읽을 수 있다. 그만큼 리부트되는 <판타스틱4>는 단지 한편의 영화를 넘어서 ‘마블 유니버스’의 경우처럼 여타 프랜차이즈와의 합종연횡을 꿈꾸는 프로젝트다.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2014)의 작가 사이먼 킨버그가 각본을 맡은 것만 봐도 이십세기 폭스의 의도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심지어 뒤늦게 매튜 본이 제작에 참여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 거대 프로젝트의 밑그림이 애초의 의도대로 얼마나 정교하고, 새롭게, 과감하게 그려졌는지는 영화를 직접 보고 판단할 일이다.

닥터 둠, 매력적인 악역이 될까

슈퍼히어로물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매력적인 악역이 필수다. 때때로 악역의 존재감이 작품의 향방을 좌우하기도 한다. 마블 세계관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인기 캐릭터이자 카리스마 악역 닥터 둠의 역할은 그래서 중요하다. 2005년 <판타스틱4>에 쏟아진 팬들의 실망감은 상당 부분 닥터 둠의 약해진 모습 탓이기도 했다. 감독의 전작 <크로니클>이 일종의 안티 히어로물이란 점을 감안할 때 조시 트랭크가 닥터 둠에 쏟아부을 애정이 어느 정도일지 능히 짐작 가능하다. 원작 코믹스의 닥터 둠은 마법과 과학 능력을 결합한 초월적인 존재에 가깝지만 영화에서는 현실적인 수준으로 재조정됐다. 하지만 중요한 건 힘의 크기가 아니라 소위 ‘둠간지’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로 넘치는 카리스마를 어떻게 구현하느냐에 달렸다. 닥터 둠은 리드 리처드에게 일말의 열등감을 품고 있는 존재로 묘사되는데 이번 리부트에서는 그 어두운 부분이 훨씬 증폭됐다. 자괴감에 시달리는 천재 프로그래머라는 설정은 거의 오리지널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변형된 셈이지만 리드 리처드에 대한 질투에 휩싸인다는 점이나 리드 리처드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를 형성한다는 점은 그의 존재를 부각시키기에 충분해 보인다. 닥터 둠 역을 맡은 토비 캠벨에 대해 조시 트랭크 감독은 “이보다 더 닥터 둠과 닮은 사람을 찾기도 힘들 것”이라며 높은 싱크로율에 대해 자신감을 표했다. 공개된 영상의 비주얼을 두고 설왕설래 말이 많지만 우주복이 그대로 녹아붙은 듯한 금속성의 전신에서 그로테스크하고 어딘지 비틀린 공포를 느낄 수 있다. 원작의 닥터 둠이 조시 트랭크의 손에서 어떻게 해석됐는지 살펴보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관전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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