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몇개의 다큐멘터리영화제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EBS국제다큐영화제(EIDF)가 차지하는 위치는 독특하다. 영화관과 TV브라운관을 통해 동시에 진행된다는 점이 무엇보다 특징적이다. 이러한 상영 방식의 의미는 TV다큐멘터리를 영화관에서 상영될 만한 영화로 확장하는 동시에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영화를 브라운관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의미를 지닌다. 제12회 EBS국제다큐영화제가 8월24일(월)부터 30일(일)까지 7일간 EBS스페이스, 서울역사박물관, 미로 스페이스, 아트하우스 모모 등에서 열린다. ‘세상과 통하다’라는 주제로 32개국 52편의 영화를 상영한다. 영화제 기간 동안 EBS 방송을 통해서도 상영작 중 일부를 만날 수 있다.
개막작 <스톡홀름씨의 좋은 날>은 덴마크의 친환경 낙농업자 스톡홀름씨의 생활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스톡홀름씨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고대 철학자들이 지금 시대에 태어났다면 농사를 짓거나 목축업을 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오랫동안 밭을 일구고 소를 키우면서 얻은 삶의 통찰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고스란히 배어나온다. 슬로모션을 사용한 감각적인 화면과 사운드는 거의 영적인 이미지로 스톡홀름씨의 농장을 묘사하는데, 이것은 단지 시각적인 수사법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주인공의 사고와 감각을 형상화한 것에 가깝다.
<춘희막이>는 또 다른 노년의 삶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다. 노인의 삶을 보여주는 여타의 다큐멘터리 대부분이 혼자 사는 노인이나 노부부 이야기였다면 <춘희막이>는 드물게도 할머니 두분을 주인공으로 한다. 두 할머니는 친구 혹은 자매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본처와 아들을 낳기 위해 들여온 후처라는 묘한 관계다. 본처 최막이 할머니는 후처 김춘희 할머니가 아들을 낳는 소임을 다한 뒤에도 그녀를 차마 내치지 못하고 품었다. 영화의 재미는 구박하는 최막이 할머니와 아이 같은 김춘희 할머니의 대조적인 캐릭터에 바탕한다. 별다른 사건 없이 두 할머니의 삶을 담담히 따라가는 <인간극장>식 다큐멘터리다.
다큐멘터리 감독은 종종 사회적인 문제를 폭로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실험대상으로 삼는다. <시티즌포>는 감독이 익명의 제보자에게 자신이 국가정보기관으로부터 감시를 당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이메일을 받는 것으로 출발한다. 감독은 홍콩에서 비밀리에 제보자 시티즌포와 접속한다. 제보자는 미국에서 자국민을 상대로 암암리에 감시 체계가 진행 중임을 밝힌다. 어쩌면 극영화보다 더 극적인 이야기이며, 그래서 관객이 현실감 있게 받아들이기 힘든 소재이기도 하다. “이제 사람들은 웬만한 것에는 놀라지 않아요.” 영화는 흥미로운 이야기와 구성으로 관객을 빨아들인 뒤 이것은 현실임을 힘주어 이야기하며 무뎌진 관객의 뒤통수를 친다. 2015 아카데미영화상 최우수다큐멘터리상을 비롯해 다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한 화제작이다.
<먹을래? 먹을래!>는 패스트푸드의 유해성을 몸소 증명한 다큐멘터리 <슈퍼 사이즈 미>를 연상시키는 또 다른 자기실험 다큐멘터리다. 친근한 요리 지도 프로그램이 TV를 장악하고 있을 때, 다큐멘터리가 해야 하는 역할은 동조가 아닌 문제 제기인 것 같다. 진열대에 놓인 무수한 상품들을 보며 얼마나 많은 식품들이 버려질까를 고민한 감독 그랜트는 친구 젠과 함께 오직 버려진 음식으로 여섯달간 살아보는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마트에서 가지런히 정돈된 음식과 마트 근처 쓰레기통에 어지럽게 널린 식품의 대조적인 모습을 부감숏을 통해 강조한다. 똑똑한 소비자로서 감독 자신을 세운 뒤, 농부, 숍매니저, 셰프, 작가 등 음식이 소비자에게 가는 어떤 단계적인 인물들을 인터뷰이로 설정한다.
예술가의 일대기는 다큐멘터리에서 친숙한 소재 중 하나다. <라산 롤랜드 커크의 검은 클래식>은 색소폰 연주자 라산 롤랜드 커크를 주인공으로 한 전기다큐멘터리다. 수도를 연결하는 호스를 잘라 불며 놀았던 아이. 재즈 뮤지션 라산 롤랜드 커크의 재능은 일찍부터 예견됐다. 일상의 도구에서 음악을 발견하는 재주가 있었던 그는 이후에도 색소폰이든 리코더든 코코넛이든 어떤 것이라도 음악으로 탄생시켰다. 3개 이상의 악기를 목에 걸고 동시에 연주하거나 코로 연주하는 기이하고도 개성 넘쳤던 그의 모습과 그 외형을 뛰어넘는 커크의 음악을 만날 수 있다.
북극의 에스키모에 대한 이미지가 아직도 <북극의 나누크>에 머물러 있다면 <수메-혁명의 사운드>는 그 이미지를 깨기 위한 좋은 대안이 될 것 같다. <수메-혁명의 사운드>는 추운 북극과는 가장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는 록밴드 수메의 뜨거운 음악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린란드에서 74년 결성된 수메는 70년대 록이 가졌던 저항정신을 공유하고 있으며 그들은 그린란드의 독립을 부르짖었다. 혁명을 부르짖는다고 해도 마냥 강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딘가 긍정적이고 독특한 음악 스타일이 지금 들어도 묘한 중독성이 있다. 설산을 배경으로 빨간 스피커가 놓여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수메의 음악이 그린란드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하나의 메타포다. 멤버들과 팬들, 그들 가족의 인터뷰를 과거 자료화면과 교차해서 보여준다. 팬들이 각자 자신의 집에서 수메의 음악을 듣는 순간을 보여주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재개발을 둘러싼 분쟁은 한국 독립다큐멘터리 역사를 논할 때 뺄 수 없는 중요한 소재다. 대부분 다큐멘터리는 홍보 창구를 지닌 도시개발 결정권자의 입장 대신, 결정에 따른 피해를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는 주민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이런 다큐멘터리에 익숙하다면 <다퉁(大同) 개발 프로젝트>가 선보이는 방식은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카메라의 방향이 개발 결정권자인 다퉁시의 겅옌보 시장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퉁시는 1600년 전 중국의 수도였지만, 현재는 중국에서 가장 오염된 도시로 불린다. 이에 겅옌보는 다퉁을 세계인들에게 중국 역사의 위대함을 알릴 수 있는 문화도시로 만들기 위해 개발을 강행하는 과감한 행보를 보인다. 당장 삶의 터전을 잃게 될 이들은 분노하지만, 겅옌보는 애초에 불법으로 지어진 건물이라며 원칙을 강조한다. 개발을 둘러싼 답답한 상황은 우리가 익히 보아온 대로다. 그러나 주민들과 직접 대화를 피하지 않는 시장의 모습이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2015 선댄스영화제 월드시네마 다큐멘터리 심사위원특별상 수상작이다.
“시 한편에 150페소입니다. 짧은 글은 100페소, 소설 발췌 부분은 50페소에 읽어드려요.” 콜롬비아 뒷골목을 걸어다니다 보면 이렇게 외치는 소년을 만나게 될 것 같다. <시를 파는 소년>은 구걸하는 대신 검은 봉지 속에 책 몇권을 넣고 다니며 글을 읽어주는 어린 전도사 혹은 작은 철학자 케빈의 이야기다. 보다보면 ‘케빈은 어떻게 시를 팔 생각을 했을까’ 하는 등의 의문이 생기지만, 인터뷰가 없는 영화는 궁금증을 풀어줄 생각이 없다. 그저 케빈이 헤매고 다니는 마을 곳곳을 세심하게 보여줄 뿐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케빈과 할머니뻘 친구 아멜리아의 관계다. 케빈은 종종 아멜리아의 집을 찾아 그녀가 요구하는 대로 계산서 따위를 읽어주는데 어쩐지 그 소리가 그 어떤 시보다 더 아름답게 들린다.
재현할 수 없는 이미지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홀로코스트의 아이들>이 선택한 방법은 애니메이션이다. 이 작품은 홀로코스트 생존자 6명의 이야기를 차례로 엮은 인터뷰 다큐멘터리다. 이들이 각각 자신이 겪었던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목소리를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삽입하고, 그 이후에 이들의 현재 얼굴과 인터뷰를 덧붙인다. 이러한 나열적인 방식은 어떤 거대한 이미지로 각인된 홀로코스트를 개별화하는 과정인 동시에 이들이 유럽 각지에 흩어져 살았던 바, 홀로코스트를 확장적으로 사유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홀로코스트의 이미지를 간명하게 표현한 애니메이션의 그림체와 분위기는 오랜 침묵을 깨고 카메라를 마주 본 이들의 담담한 태도와 조화를 이룬다.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란다.” 이제 누군가에게는 싫증난 말일지 모르겠지만, <드림캐처>에서 브렌다의 이 말은 좀 다르다. 드림캐처 재단의 활동가 브렌다는 가족과의 갈등 혹은 가정 내 성폭행 등으로 집에서 독립해 홀로 살다가 성매매 산업의 유혹에 빠지는 여성들을 위한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그녀는 사무실에 자리잡고 앉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여성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녀는 직접 위험에 처한 여성들을 만나러 간다. 그래서 상담 장소는 주로 봉고차나 거리의 벤치 등이다. 그녀는 자신의 어려움을 고백하는 여성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여러 차례에 걸쳐 그녀들의 잘못이 아님을 힘주어 말한다. 브렌다의 눈빛과 태도는 그 말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2015 선댄스영화제 월드시네마 다큐멘터리 감독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