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폴 러드♥
2015-09-10
글 : 김혜리

※<앤트맨>과 <아메리칸 울트라>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폴리나>

예술을 가르치는 일은 애초에 가능한가? 좋은 예술 교육이란 무엇인가? 바스티엥 비베스의 만화 <폴리나>에 등장하는 무용 교수 보진스키와 <미라클 벨리에>의 음악 교사 토마슨(엘릭 엘모스니노)이 힌트를 줬다. 위대한 스승에 관한 일반적 관념과 달리, 두 교사는 제자의 대리 부모 역을 자임하지 않는다. 학생이 말하기 전에 집안 사정을 묻는 법이 없고, 인생의 금과옥조가 될 대명제를 던져주지도 않는다. 대신 본인의 교실에 들어온 예술가 지망생에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정확히 어떤 종류의 재능인지 파악해서 알려준다. 무엇보다 나쁜 습관이 어린 몸에 배지 않도록 경계한다. 세상은 네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고 따끔하게 환기시키는 이 선생님들은 동시에 자신의 콤플렉스를 학생에게 전가하지 않도록 유의한다.

08/20

에드거 라이트가 중도하차하고 페이튼 리드의 연출로 완성된 <앤트맨>은 평이하게 재미있다. 금고털이(heist) 장르가 무늬로 들어 있긴 하나, 전체 인상은 <애들이 줄었어요> <인간 로켓티어> 같은 90년대 디즈니 가족영화의 추억을 소환한다. 별도로 <앤트맨>이 내게 준 선물은 배우 폴 러드에 관해 쓸 기회다. 외모도, 경력도 경이적으로 꾸준한 이 40대 배우는 분량이 미미한 조연을 마다 하는 법이 없고, 주연작의 다수가 할리우드에서 점점 홀대받는 중급 예산 드라마와 주드 아파토우 사단표 남성 앙상블 코미디라 배우론을 쓸 계기가 마땅치 않았다. 마침내 <앤트맨>으로 1019호 <씨네21> 표지를 장식한 폴 러드의 사진을 보며 나는 남몰래 눈물을 훔치진 않았지만, 자못 감격했다.

<앤트맨>의 주인공 스콧 랭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규모의 관객에게 폴 러드를 인지시킬 슈퍼히어로일 뿐 아니라, 폴 러드라는 배우가 일관되게 표출해온 개성과 호소력도 십분 활용한 캐릭터다(폴 러드는 각본에도 참여했다). 이를테면? 스콧 랭은 전기공학 석사 학위를 가진 전과자다. 부당이득을 취한 기업을 해킹해 고객에게 차액을 돌려주고, 총수의 고급승용차를 수영장에 처박은 다음 장부를 온라인에 공개했다가 2년형을 살았다고 영화는 전한다. 스콧은 폭력이 싫어서 맥가이버 스타일의 과학 지식과 재주로 감쪽같이 훔치기를 선호하는 도둑고양이형 절도범이다(<앤트맨>의 액션 클라이맥스에 스콧 랭 본연의 장기가 배제된 점은 아깝다). 강탈을 금기시하는 그를 두고 극중 누군가가 “계집애 같다”고 비아냥거리지만 스콧은 불쾌한 기색이 없다. 스콧 랭의 지성은 시종 행위로 표현될 뿐 대사로는 표나지 않는다. 환경법에 관심을 가진 법대생으로 분한 출세작 <클루리스>(1995)부터 <내가 사랑한 사람>(1998), <아이 러브 유, 맨>(2009) 등에서도 폴 러드는 능력 있지만 자기 능력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남자, 그리고 동료 엘리자베스 뱅크스의 표현에 따르면 “잘생겼지만 안 잘생긴 것처럼 행동하는” 남자였다(폴 러드가 영화에서 막춤 추는 장면만 모아도 5분짜리 클립은 너끈히 나올 것이다). 한데 남부럽지 않게 똑똑한 스콧 랭은 도둑질하러 온 게 아니라 훔친 걸 되돌려주러 왔다고 해명하다 체포된다. 보통 같으면 말도 안되는 바보짓에 각본가의 자질을 의심하겠지만, 폴 러드라면 얘기가 다르다. 멀쩡히 똑똑하면서도 얼간이의 실수를 심심찮게 저지르는 남자로 그는 그럴싸하다. 여기에는 ‘타인의 악의에 대한 방심’으로 요약할 수 있는 폴 러드 캐릭터 특유의 성향도 무관하지 않다. <아워 이디엇 브라더>(2011)의 농부 네드(폴 러드)는 우울증을 호소하는 정복 입은 경찰에게 유기농 대마를 한줌 집어줬다가 옥살이를 해서 못난 놈 취급을 받는다. 이유 없이 남이 날 해칠리 없다고 대충 믿는 폴 러드의 인물들은 위태로운 상황에 빠져도 천진하게 유유하다. 며칠 전 털라던 행크 핌 박사(마이클 더글러스)의 집에서 영문도 모르고 깨어난 직후 “차 마시겠나?”라는 질문을 받은 스콧은 순순히 끄덕이며 설탕까지 청한다. 생판 남인 부녀가 자기 앞에서 열띤 설전을 벌이는데 끼어들지도, 자리를 피하지도 않고 물끄러미 관전한다.

앤트맨은 작아짐으로써 파워를 응집하고 필요에 따라 적당한 사이즈로 변할 수 있지만 원래 몸보다 커지지는 않는다. 그가 어벤져스에게조차 위협적인 상대인 이유는 (작아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앤트맨의 이같은 특징들은 배우 폴 러드의 매력과 통한다. 폴 러드는 실물 크기 이상으로 설정된 매력남, 액션 히어로를 연기한 적이 거의 없다. <웨트 핫 아메리칸 서머>(2001)에서처럼 코믹 조연일 때 도리어 천재성을 번득이기도 한다. 영화 속 그는 자기보다 작고 약하거나 뒤처진 상대들과, 가르치려는 자세 없이 쉽게 어울린다. 초등학생도, 집주인 할머니도 그를 붙들고 하소연한다. <40살까지 못해본 남자> <사고 친 후에>(이상 2007)에서 유치한 철부지 남자들과 소파에서 속없이 뒹굴거리고 있는 반듯한 폴 러드를 보고 있자면 “이봐, 당신은 거기 속하지 않는다고” 라고 외치며 귀를 잡고 끌어내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는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중이다. 동물도 예외가 아니다. 원조 앤트맨 행크 핌 박사에게 개미 군단은 피실험 동물에 불과하지만, 스콧 랭은 개미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말을 걸며 정을 붙인다.

08/21

배우가 보유한 자질을 곧장 슈퍼히어로 캐릭터로 연장했다는 점에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토니 스타크와 폴 러드의 스콧 랭은 유사한 예다. 한편 코미디가 우세한 마블 스튜디오 영화로서 크리스 프랫이 실없는 히어로로 활약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앤트맨>은 한데 묶이기도 한다. 단, 다우니 주니어와 프랫에겐 없고 폴 러드에게 있는 것은, 삶에 모서리가 군데군데 닳은 부드러운 단념의 표정이다. 그의 캐릭터들은 실망하더라도 티를 내거나 곧장 노하지 않는다. <아이 러브 유, 맨>에서 동성 또래 친구를 사귀러 나간 자리에 할아버지가 나온 걸 본 피터(폴 러드)는 낙심하면서도 이런저런 담소를 나눈다. <앤트맨>의 핌 박사는 2대째 앤트맨이 되길 소망하는 딸 호프(에반젤린 릴리)를 스콧이 뻔히 듣는 앞에서 “위험해서 안 된다”며 일축한다. 스콧은 그럼 나는 죽어도 되냐고 반문하지 않는다. 위험까지 감안해 지원한 엄연한 일자리니까. 대신 서운해하는 호프에게 찾아가 “나는 대체 가능한 소모품이지만 당신은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명랑하게 위로한다. 스크린의 폴 러드는 언제나 지나치게 애쓰지 않는 남자다. 노력 분야는 농담 정도다. 영화 밖에서도 만만찮은 장난꾼이어서 <앤트맨> 촬영장에서 스콧이 줄어드는 장면의 상대역 연기를 찍을라치면 도와준다고 옆에서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거나 소파 뒤로 다이빙해 폭소로 인한 NG를 냈다고 한다. 이 장난스런 태평함에 로맨틱한 페이소스를 불어넣는 요소는 독특한 눈이다. 크게 치뜨는 일이 드문 폴 러드의 아주 옅은 카키색 눈은 때로는 저 너머를 보는 듯도 하고 다른 때는 안쪽으로 끝없이 가라앉아 있는 것도 같다(물론 그가 자주 하는 숙취에서 덜 깬 연기에도 매우 유용한 눈이다). <앤트맨>의 페이튼 리드 감독은, <아이언맨> 시리즈와 달리 앤트맨의 헬멧 내부 숏을 찍지 않고, 슈트 입은 스콧이 헬멧을 젖힌 모습을 넣은 이유를 묻자 “폴 러드는 매우 아름다운 눈을 가졌다. 앤트맨일 때도 그 눈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언젠가 베티 데이비스처럼 이 배우의 눈에 헌정된 팝송이 나오더라도 나는 놀라지 않을 거다. 어쩌면 벌써 나왔을지도?

08/22

20년 전 폴 러드가 줄리엣의 구혼자로 분한 <로미오와 줄리엣>을 오랜만에 다시 봤다. 그는 로미오에게 시선을 앗긴 줄리엣의 손을 붙들고 열심히 막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아가씨, 로미오 말고 저 물색없는 남자를 택해! 그래야 훨씬 길고 복된 생애를 누릴 수 있어! 폴 러드가 연기하는 남자들은 숭배하진 않을지언정 싫어하기 매우 어렵다. 오죽하면 폴 러드는 어떤 외부자도 끝내 끼어들지 못한 6인조 시트콤 <프렌즈>의 일곱 번째 ‘프렌드’였다. 영화 안팎의 남녀노소는 성적 취향을 넘어 폴러드가 연기하는 남자에게 호감을 갖는다. 예외라면 그가 친구 없는 남자로 분한 <아이 러브 유, 맨>인데, 이성애자이면서도 보통 남자들의 문화에 적응 못하는 남자를 그린 이 영화는 단순히 성적 취향으로 규정된 캐릭터로부터 한발 더 나아간 폴 러드의 섬세한 진면목을 경험하게 해주는 최고작 중 한편이다. 호들갑 없이 꼭 필요한 연기를 꼭 필요한 만큼 완수하는 동시에 관객과의 친근감을 지속하는 이 배우는, 미국 배우와 영국 배우의 미덕을 아무렇지도 않게 아우른 케이스인지도 모르겠다.

<아메리칸 울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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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자동차

<아메리칸 울트라>는 기억이 지워진 특수요원이 능력을 자각하는 <본 아이덴티티>식 설정을 청춘 로맨스와 결합해 B급 상상력을 펼치는 영화다. 공황장애와 마약 의존증을 앓는 청년 마이크(제시 아이젠버그)에게 연인이자 보호자인 피비(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온 세상이나 다름없다. <아메리칸 울트라>에는 은유 둘이 등장하는데 하나는 인간에 의해 망망 우주에 던져진 원숭이 비행사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과분한 여자친구에게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이크의 불안을 담은 비유다. 어느 날 밤, 도로변 나무를 들이받고 견인되는 자동차를 바라보던 청년은 울기 시작한다. “평생 한자리에 서 있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나무가 처음으로 뭔가를 했는데, 그게 세상 곳곳을 멋지게 누비던 아름다운 존재를 멈춘 일이야. 내가 저 나무이고, 너는 저 자동차야.” 이 메타포는, 많은 비밀이 밝혀지고 상황이 급전된 후 두 연인의 간절한 암호문이 되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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