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자료원은 9월15일(화)부터 19일(토)까지 ‘마키노 마사히로 감독전’을 개최한다. 마키노 마사히로 감독은 국내 관객에게는 그의 대표작인 <원앙새 노래대항전>(1939)이나 다카쿠라 겐이 나오는 의협영화 시리즈 정도로 알려졌을 뿐 거의 무명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마키노 마사히로는 “일본영화를 체현한다”고까지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 마키노 쇼조가 “일본영화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반은 장난으로 ‘마키노 마사히로=일본영화’라고 부르는 것이지만, 우연하게라도 마키노의 작품을 보게 된다면 그래서 그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찾아본다면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마키노 마사히로는 정말이지 장난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는 18살에 데뷔하여 실질적 은퇴작인 <관동의 붉은 벚꽃 일가>(1972)에 이르기까지 40여년 동안 약 260편의 작품을 연출했다. 상대적으로 스튜디오 시스템이 견고하고 리메이크가 활성화된 일본 영화계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260이라는 숫자는 경이롭다. 일본의 거장들, 예컨대 미조구치 겐지는 약 100편, 오즈 야스지로는 50여편, 구로사와 아키라는 약 40편의 작품을 연출했다. 이도 적은 수치는 절대 아니지만, 마키노에 비할 바 아니다. 마키노가 초기에 아버지의 후광을 입은 것은 부인할 수 없을지라도, 아버지 사후 마키노 프로덕션이 도산한 뒤에 거대 스튜디오들을 두루 거치며 만든 작품들만 150편이 넘는다.
상식적으로, 거대 스튜디오들이 아무 감독이나 기용하여 몇 십편씩 연출을 맡기지는 않았을 터. 마키노의 행보는 그의 영화들이 얼마나 재미있는지를 방증한다. 그의 작품들은 “무조건 즐거운 영화”라든가 “오락영화의 정수”, “행복감으로 가득 찬 영화”라는 식의 평가와 더불어 관객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고, 경영 위기에 빠진 영화사들은 그를 “구세주”라 불렀다. 이는 “싸게, 빠르게, 히트시킨다”는 마키노 마사히로의 영화 신조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이를 두고 마키노를 ‘B급’이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데뷔 3년째이던 1928년 <키네마준보> 베스트10에는 1위 <낭인가>를 비롯하여 그의 작품이 무려 3편이나 포함되어 있으며, 이듬해 연출한 <죽음의 자리>로 2년 연속 베스트 1위를 기록했다.
이는 마키노가 무성영화가 제작되던 시기에 이미 수십편의 작품을 연출하면서 카메라의 적확한 위치와 에누리 없는 편집점을 “본능적”으로 체득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미지뿐만이 아니다. 마키노는, 일본 최초의 토키 작품으로 알려진 고쇼 헤이노스케의 <마담과 아내>(1931)보다 2년 앞서 <돌아오는 다리>를 통해 불완전하게나마 토키를 시도했고 녹음기사로도 활동하면서 영화에 자연스럽고도 자유롭게 사운드를 녹여내곤 했다. 아역배우 출신이기도 한 만큼 배우들의 생동감 있는 연기를 끌어내는 데도 일가견이 있었다. 거장 감독들이 롱테이크나 피사체와의 거리, 미장센 등을 통해 예술적 인장을 찍을 때, 마키노는 그러한 인장 대신 영화의 다양한 요소들이 “놀” 수 있도록 “움직임”을 “잇고” 또 “빼”면서 그때그때 최적의 숏들을 잡아냈다. “일본영화를 체현”한다고 일컬어지면서도 그의 작품들이 ‘일본영화’라는 경계에 국한되지 않고 오히려 이를 흔들어버리는 느낌마저 주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마키노의 작품들도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고작’ 100편 남짓으로 그중에 이번 감독전을 통해 볼 수 있는 작품이 <다카다노바바 결투>(1937), <원앙새 노래대항전>, <시미즈항>(1940) 등 7편이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언젠가 한국에서도 마키노의 남겨진 작품들이 모두 상영되고, 국내 관객이 그가 어떻게, 무엇을 “체현”했는지 즐겁게 고민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해본다(상영작과 일정은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www.koreafilm.or.kr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