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슈아 오펜하이머의 다큐멘터리 <침묵의 시선>은 시종일관 긴장감으로 충만하다. 1965년 인도네시아 대학살 가해자들의 증언과 그것을 듣는 피해자 가족의 표정을 주로 포착하는 이 영화는 말들보다는 말들 사이에 어색하게 끼어드는 침묵의 행간에 집중한다. 형을 학살로 잃고 형의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부모를 대신해 가해자들을 찾아가 사과할 것을 침착하게 요구하는 주인공 아디의 표정을 보는 것은 관객인 나를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나는 물론 상식적인 관전자의 입장에서 아디의 편이다. 그러나 아디는 대부분 자신들의 잘못을 부정하는 상대와 부딪치고 때론 협박을 받는다. 과거의 상황이 현재에 되풀이될지 모른다는 데 대해, 정작 아디는 두려워하지 않는데 관전자들은 두려워하게 된다. 이 소시민적 불안에 대한 근심을 이겨내면서 스크린을 응시하는 게 <침묵의 시선>의 화면에 긴장을 낳는다.
여기서 가해자인 상대방을 만나 직접 쳐다보거나 조슈아 오펜하이머가 촬영한, 가해자들이 의기양양하게 학살의 순간을 증언하는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아디의 그것은 ‘시선’이다. 아디의 시선은 누구에게도 귀속되지 않는 아디의 것이다. 그에 반해 아디가 바라보는 대상을 보는 우리는 응시한다. 아디에게 귀속된 시선과 달리 우리가 보는 것은 응시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응시는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의 실체를 알아차릴 수 없는 두려움과 연관된다. 대다수 사람들의 반응이 그러할 것이듯, 우리도 우리 같지 않은 가해자 인간들을 보는 게 두렵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마을에서 보통 사람과 다름없이 외관상 평범한 아버지와 지역 유지로 살아간다. 그들 마음속에 무엇이 있기에 그들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면서도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보이면서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일까.
<침묵의 시선>은 섣불리 그걸 단정하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이 말하고 또 말하는 사이에, 그리고 그들의 말이 의미의 공전궤도를 따라 공허하게 반복될 때 끼어드는 침묵의 순간들을 관객으로 하여금 느끼게 만들면서 전개되는 것이 <침묵의 시선>의 힘이다. 우리는 당장 그 침묵의 순간들의 참을 수 없이 경직되고 불편한 공기를 버티어낼 수밖에 없다. 감독의 전작 <액트 오브 킬링>에서 학살자의 재연 퍼포먼스가 주는 불쾌감은 학살자의 행동의 기원을 알 수 없다는 것에서 기인하지만 그 영화는 그게 어느 정도는 학살자가 숨기고 있는 죄의식의 위장과 가면일 수 있다는 환원적인 도식 추정으로 우리를 안심시킨다. 우리는 계몽자의 시각에서 그걸 바라볼 수 있다. <침묵의 시선>은 다르다. 가해자들의 완강한 저항 앞에서 아디는 물론이고 관객도 계몽자의 지위를 누릴 수 없다. 수직적인 위치에서 화면에 등장하는 가해자들을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 그저 바라만 보지만 환원적인 답을 얻어낼 수는 없는 이 응시를 통해 우리는 불안해진다. 그런데도 주인공 아디의 시선은 견고하다. 거의 연기하고 있는 게 아닐까 초반엔 의심이 들 만큼 그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이미 대답을 예정하고 있고 그가 예정하고 있는 대답이 상대편으로부터 나오지 않아도 그것과 상관없이 그의 의무는 상대를 끈질기게 바라보고 질문하는 일뿐이라는 듯이 행동한다.
일상의 평온한 시간들이 과거의 죄책감과 포개지는 순간
<침묵의 시선>은 조금도 감상으로 흐르지 않는다. 아디는 냉정한 심문관이다. 그는 오펜하이머가 촬영한 영상과 어머니의 증언을 통해 당시의 세부적인 일들을 잘 알고 있다. 그는 거창한 걸 묻지 않는다. 작고 세부적인 질문들만 해댄다. 이런 질문들을 반복하는 그는 상대방이 부정하거나 힘들어하는 반응을 이끌어낸다. 그를 향해 여전히 공산당이라고 협박하는 상대방은 여전히 그 지역의 권력자들이다. 권력자에게 부역한 하수인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의 의미를 억지로 강변하면서도 당황스러워한다. 가해자들이 힘겨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해자들의 가족도 고통스러워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아버지가 학살자로 저지른 일의 진실을 몰랐던 가해자의 딸이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대신해 아디에게 사과하는 장면에 들어 있다. 아버지를 마냥 자랑스러워했던 그녀는 아버지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무심코 털어놓는 잔인한 학살의 세부기억을 통해 순식간에 아디와 한편이 된다. 그녀는 괴로워한다.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가해자쪽의 변화를 목격하는 순간이다. 감독은 이 장면의 대화 막간에 끼어드는 침묵을 화해의 공명으로 채운다. 바깥에서 가해자 자손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현재형으로 흐르는 일상의 평온한 시간들이 과거의 죄책감과 포개지는 순간의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을 이 장면은 길게 담는다. 아디는 이 상황에서만 유일하게 미소를 짓는다.
다른 장면에서 가해자의 가족들은 가해자의 증언 자체를 부정한다. 그들은 자신들은 몰랐던 일이라고 줄곧 주장하며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에 저항한다. 그들은 피해자들이 잊지 못하는 기억의 봉인을 푸는 일을 두려워한다. 감독이 촬영한 가해자의 증언 영상을 보면서도 그들은 부정한다. 더이상 취재에 응하지 않겠다고 하는 그들을 향해 아디는 계속 똑같은 어조로 가해자의 증언에 대한 확인을 요구한다. 아디는 냉정하고 그의 곁에 있는 오펜하이머의 카메라도 침착하다. 가해자의 가족들이 그만 됐다고 할 때 감독은 가해자의 증언이 담긴 다른 영상을 보지 않겠느냐고 재차 권유한다. 그들이 수치와 죄책감으로 흔들릴 때 그들은 부정하면서 도망치고 외면하려 한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가해자와 그들의 가족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반응들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여기서 아디의 질문은 추상적인 명분에 가린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다. 영상 증거물을 들이밀고 그것을 뒷받침할 세부사항을 추가로 묻는 식이다. 상대방의 자제심은 무너진다. 그들이 보이는 격한 거부반응조차도 그들의 고통의 증거이다. 그들의 고통을 통해 현재와 과거의 경계는 무너진다. 과거의 상처들은 현재로 마구 밀고 들어온다.
과거의 업을 현재에 물려받고 있는 사람들
아디가 그토록 의연하게 시선의 주체로 계속 존재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아디의 어머니는 여전히 과거 속에 산다. 그녀의 현재는 과거에 결박당해 있다. 아디의 아버지는 쇠잔한 육체와 사라진 기억을 안고 현재를 고통 속에 산다. 그는 공포가 몸에 배어 움츠러든 채 행동하는 것으로 살아 있음을 나타낸다. 아디는 그들 부모의 고통을 자신에게서 끊어내려고 한다. 무고한 사람들을 공산당으로 몰아 인간사냥했던 역사를 정당화하는 학교 선생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자기 아이들에게 그는 그건 그렇지 않다고 정정해준다. 그는 자신의 아이들이 겁에 질려 사는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더이상 앓지 않기를 바란다.
영화 내내 그는 오펜하이머가 찍은 영상을 홀로 방에 앉아 뚫어지게 바라본다. 학살이 있던 강가에서 아디의 형의 음경을 잘라내는 상황을 재연하는, 이제는 늙은 가해자들의 의기양양한 모습을 아디는 본다. 그건 응시가 아니다. 상대방을 전혀 읽어내지 못하는 가운데 찾아오는 미지의 것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그 존재들을 관통하려는 듯이 바라본다. 오펜하이머는 아디의 이 시선을 강조하고 아디가 가해자와 가해자의 가족들을 만날 때마다 줄곧 아디의 시선을 카메라에 중점적으로 포착한다. 아디의 시선은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것도,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는 것도, 애걸하는 것도, 공감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그들에게 팩트를 들이밀고 그들의 반응을 지켜본다.
아디의 흔들리지 않는 시선 덕분에 관객은 비로소 응시의 불안을 거둔다. <액트 오브 킬링>에서처럼 수직적인 계몽자의 위치 비슷한 곳에 서서 학살자들의 죄의식을 굳이 정의하지 않고도 우리는 가해자와 가해자의 반응에 대해 수평적으로 바라보면서 결과적으로 어떻게든 업을 받고 있는 그들을 지켜본다. 그들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과거의 업을 현재에 물려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가해자의 죄는 가해자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가족에게까지 미친다. 가해자의 가족들은 방관자였거나 공모자였다. 방관했거나 공모했거나 어느 쪽으로든 그들의 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디는 그 점을 계속 지적할 뿐이다. 가해자의 가족들뿐만 아니라 아디의 외삼촌처럼 보다 적극적으로 가해자들의 학살에 공모한 사람들도 있다. 아디는 외삼촌에게 묻는다. “제 형이 죽는다는 걸 알았나요?” 아디의 외삼촌은 아디의 형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그 상황을 몰랐다고 주장한다. 그는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는 걸 안 건 나중이었다고 강변한다. 아디는 나중에 그걸 알고도 계속 그 일을 계속 했던 외삼촌을 명시적으로 비난하지는 않는다. 그는 역시 계속 물을 뿐이다. 아디가 외삼촌의 집을 떠날 때 아디를 배웅하는 외삼촌의 모습에선 어떤 극적 변화도 감지되지 않는다. 회개나 참회나 사과는 좀처럼 이뤄지지 않지만 아디의 시선 속에 포섭된 그들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가해자의 편이지만 그들은 어제의 의기양양하거나 평온한 모습과는 달리 동요하는 존재들이다.
고통과 기억에 관한 알레고리
이 영화에서 가장 가슴 아픈 질문은 그렇게 불현듯 관객에게 다가온다. 가만히 있는 것은 결과적으로 공모자가 되는 것이라는 질문이 나 같은 관객에게는 아프다. 피해자들은 결코 과거의 악행을 잊을 수 없는데 그걸 잊은 사람들은 모두 공모자들이다. 그건 가해자의 꼭대기 그룹에 있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디의 시선은 집요하게 그걸 묻고 들이대는 것처럼 느껴진다. 대다수의 피해자들조차 가해자 꼭대기 그룹이 원하는 대로 공포에 짓눌려 억지로 기억을 봉인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디는 피해자의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로서, 가해자들의 기억을 억지로 끌어내기 위해 흔들리지 않는 시선을 담지하고 있다. 그의 주체적인 시선의 향배는 그를 지켜보는 관객인 우리에게로도 향한다. 말로만 들어도 끔찍한 학살 상황을 영화 초•중반에 가해자들로 하여금 다시 부연하게 한 다음에 그것을 피해자의 반응과 결합시키는 대신,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이, 일정한 시간이 흐른 다음에, 가해자와 그의 가족들에게 다시 그 상황을 묻고 그들의 반응을 지켜보는 이 영화의 구성방식은 피해자를 대변하는 아디의 시선을 축으로 한 것 때문에 혁신적이다. 카메라가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인 자리를 굳이 가늠하지 않고 아디의 시선에 방점을 찍는 것은 피해자의 단호한 시선으로 가해자를 바라보는 그 수평적 견고함 때문에 관객에게 메아리치는 공명을 불러일으킨다.
<침묵의 시선>의 상당 부분은 보고 있는 것이 면구스러울 만큼 고통에 관한 기억의 집적과 확인 작업으로 채워지지만 화면은 아주 시적이다. 죄의식을 업적으로 거짓 치장하는 추악한 얼굴들을 담은 다음에 그걸 화면으로 보고 있는 아디를 정물화의 프레임처럼 담는 식이다. 아디가 증언을 청취하는 장면들에서 카메라는 고요함을 환기시키는 위치에 침착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 침착함과 고요함이 환기시키는 것은 외형상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고통이다. 아디의 아이들이 나비의 유충을 갖고 천진하게 놀고 있는 영화 속 한 장면은 평화롭고 아름답지만 그게 다른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장난감처럼 갖고 놀면서 죽였던 가해자들의 학살 상황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선 고통스럽다. 아디의 어머니는 아이들과 달리 나비 유충을 살살 다룬다. 마치 금방이라도 그것들이 껍데기를 벗고 날아오르기라도 할 것처럼. 무심한 풍경의 이미지는 어느 것도 허투루 낭비되지 않고 현재의 고통 속에 깊이 끼어들어온다. 외형적인 일상의 평온은 영화 내내 전부 고통의 은유처럼 생각될 정도다. 아디의 아버지가 번데기보다 못한 형상으로 방구석에 쪼그라들어 있는 평소 모습은 또 어떤가. 밝은 햇살 아래 놓여 있는 그의 형상은 그 어떤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잔인하다.
<침묵의 시선>은 고통과 기억에 관한 알레고리다. 사람들의 시력을 교정시켜주는 안경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아디는 가해자들에게 시력측정기를 씌워주며 접근한다. 교정렌즈를 끼고 어떤 이들은 더 잘 보인다 하고 어떤 이들은 똑같다고 한다. 너무 명백해 보여서 간절함이 떨어지는 이 알레고리는 거듭 말한 대로 안경을 씌워주는 주체, 안경사 아디의 시선 덕분에 구체적인 살과 뼈를 얻는다. 이 영화 속 가해자들과 가해자들의 대체적인 반응은 우리가 위로받을 수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팩트를 부정하는 그들의 모습은 용서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쪽은 피해자뿐이라는 걸 거꾸로 강조한다. 그들이 이제 잊어버리자고 하는 것은 용서해달라는 것의 뻔뻔한 표현이다. 아디는 절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은 채 상대방이 화를 내거나 참회할 때까지 지켜본다. 인간이 인간답게 있을 수 있는 건 기억할 수 있을 때뿐이라는 걸 절감하면서 희망과는 도통 연결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인도네시아의 현재를 다루는 이 다큐멘터리는 가해자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강인해지는 주인공을 통해 희망에 다가설 수 있는 기분을 북돋워준다. 억지로 상투적인 희망을 발견할 필요는 없다. 고통의 기억을 정확히 인지하고 상대방 가해자에게 그걸 요구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걸 할 수 있다. <침묵의 시선>은 얼핏 평범해 보이는 구성의 다큐멘터리인데도 피해자 주인공의 강인한 의지와 그 의지를 담지한 시선을 카메라가 곁에서 충실히 도와주는 것만으로 대단한 다큐멘터리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