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이 지쳤던 걸까? 6년간의 휴식없이 쫓기는 연기생활이 “한때는 눈빛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었다”던 소년의 눈빛을 어떻게 바꾸어놓았나. 스물세살의 나이에 <휴머니스트>로 데뷔한 영화신인 안재모. <파란대문> <닥터K>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등에 단역으로 얼굴을 비치기도 했지만 주연으로는 첫 작품인 <휴머니스트>의 개봉을 앞둔 그는, 여느 배우들과 달랐다. 그의 눈빛엔 첫 작품을 앞둔 신인배우의 얼버무림이나 머뭇거림 따윈 없었다. 그리고 아쉽게도 설렘이나 기대감도 없어보였다. “데뷔 이후 한번도 쉰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물론 일이 끊이지 않았다는 건 복이기도 하지만, 배우에겐 좋지 않은거죠. 다른 모습을 보여줄 틈이 없으니까요.”
플래시가 터지는 카메라 앞에 서면 TV 드라마 <귀여운 여인>의 ‘준휘’같이 터프한 포즈나 <학교>의 ‘건이’처럼 맑고 순한 웃음을 지어보이던 그는, 조명의 환상이 꺼지면 이내 지친 일상의 표정으로 돌아오곤 했다. 무언지 모르지만 세상을 향한 분노를 꾹꾹 누르고 있는 듯, 그래서 조금만 건드려도 터져나올 것만 같은….
중학교
3학년, 이것저것 하고 싶었던 게 많았던 안재모는 TV를 보다가 불현듯 “배우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연기 속에선 판사도, 검사도, 운동선수도 될 수 있으니까요.” 원하던 연기를 하기 위해 안양예고에 입학하고 방과후 학교에 남아 열심히 배우로서의 자신을 다져나갔다. 희곡을 쌓아놓고 밤새워 읽기도 하고, 홀로 극장에서 발성과 연기연습으로 밤새우는 일도 잦았다. “어느 날, 자정쯤인가 혼자 극장에 남아 있는데, 무대에 ‘펑’하고 조명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리고 한 열명쯤 됐나. 하얗게 가부키 분장을 한 배우들이 등장하더니 두패로 나뉘어 전쟁을 하더라구요. 한참을 그렇게 싸우다 모두 한꺼번에 배에 칼을 꽂고 할복을 하는데…, 무대 위로 점점 피가 차올랐어요. 그 공연이 끝났을 때가 새벽 3시쯤? 꿈이 아니에요. 정말 귀신을 본 거예요. 왜, 극장귀신을 보면 배우로 성공한다잖아요.” 그렇게 ‘혼령까지 봐가며’ 기본기를 닦았다는 안재모는 그 덕일까 연기나 발성이 또래들에 비해 안정적이다. 게다가 “학습도 빠르고 적응도 빠르고 면역력도 강한” 그의 성격 탓인지 청소년드라마의 모범생에서 <용의 눈물>의 순하고 어진 세종으로, <왕과 비>의 연산군으로, 짧은 시간에 결코 쉽지 않은 변화를 소화해내며 기대를 한몸에 받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사극으로 이름을 알린 그는 “당분간은 사극은 사양하고 싶다”고 했다. “사극이 재미는 있죠. 연산 할 때는 묘한 카타르시스 같은 걸 느끼기도 했고요. 하지만 현대물에 비해 에너지 소모가 10배 이상이에요. 너무 빨리 지치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예민한 편이라 수염 붙이고, 무겁고 불편한 옷 입는 걸 잘 못 참고요.”
“세상에 태어나 처음 해본다”는 노랗게 물들인 머리색은 곧이어 들어갈 작품 <조폭마누라>를 위한 배려다. <휴머니스트>의 마태오 다음으로 선택한 역할은 조직의 넘버2인 신은경 옆에서 아양떨며 붙어 있는 깡패 ‘빠다’. “촌놈인데 서울놈처럼 보이려고 노력하는, 그걸 감추기 위해 세련된 척 뺀질거리는 놈”이라고 설명한다. “이미지와 잘 안 맞지만 재미있을 것 같아서 선택했어요. ‘어떻게 보여야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식의 이미지 관리 때문에 재미있는 작품을 놓치고 싶진 않거든요.” 맑고 선하고 착한 역할은 “답답해서 싫고”, 깨고 던지고 부수고 욕하고 소리치는 역할이 “쌓인 스트레스를 풀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하는 그의 낯선 눈빛. 여전히 아비의 생매장을 꿈꾸었던 패륜아, 마태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그날 밤, 연기를 향한 열정으로 들떠 있던 어린 배우는 연기의 재능을 내린 무대의 혼령에게 선한 눈매와 순수한 영혼을 바쳤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