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웅의 경사기도권]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누가 이 똥을 쌌나?
2015-09-24
글 : 허지웅 (작가)
일러스트레이션 : 민소원 (일러스트레이션)
스튜디오의 조바심이 <판타스틱4>에 미친 악영향

여러분에게 <판타스틱4>에 관련된 어마어마한 이야기 두 가지를 들려주겠다. 첫 번째. 극 초반 소년 리드가 공간이동 기계를 발명하고 있던 창고는, <백 투 더 퓨처2>에서 비프가 자기 차를 주차해놓고 쓰던 차고와 같은 곳이다! 소오름! 두 번째. 앞선 첫 번째 이야기를 제외하고 나면 이 거대한 쓰레기 더미 같은 영화에 대해 더이상 언급할 만한 게 없다는 사실이다. 소오름!

정말 소름끼치는 영화가 아닐 수 없다.

창작자의 과도하고 구체적이지 않은 비전은 때로 영화 제작 전반의 불확실성을 증가시킨다. 창작자의 머릿속에서만 성립하고 정작 밖으로 끄집어냈을 때 아무도 알아먹을 수 없는 비문 같은 영화들이 존재한다. 잘 통제된 비전과 그렇지 못한 비전의 차이는 크로넨버그와 타셈 싱의 영화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자의식 강한 영화들의 스토리텔링이 종종 먹다 남은 과자 부스러기처럼 산산이 부서지는 건 그 때문이다. 지난 수십년 동안 스튜디오 시스템은 그러한 불확실성을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왔다. 의사진행과 결정에 참여하는 주체들이 구체화되고 과정은 선명해졌다. 시스템이 견고해질수록 사고의 확률은 줄어들었다. 물론 그와 더불어 예상을 뒤엎는 예외적 영화들의 등장 또한 줄어들었다(본래 모든 종류의 시스템이란 특출난 것을 양산하는 데 쓰이는 게 아니라, 전체적인 평균값을 끌어올리는 공식과 같은 것이다. 애초 ‘특출난’ 것은 ‘양산’되지 않는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대문 앞에 느닷없이 누군가 싸놓고 간 똥, 같은 영화는 거의 사라졌다. 그래서 <판타스틱4>가 관객에게 선사하는 놀라움은 더욱 강력하다. 이러니저러니해도

쌀 놈은 싼다는 것이다.

<판타스틱4>의 연출은 조시 트랭크다. 이건 언뜻 근사한 선택이었다. 그는 1인칭 시점 아이디어와 안티 히어로 이야기를 적절하게 배합한 영화 <크로니클>을 선보인 바 있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아키라>처럼 보일 정도로 <크로니클>은 꽤 준수한 영화였다. <판타스틱4>의 리부트 기획에 조시 트랭크가 기용되었다는 소식은 그래서 더욱 설렜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수 스톰이 제시카 알바가 아닌 케이트 마라이기 때문에? 닥터 둠의 후드가 컵라면 사발처럼 생겨서? 굳이 제이미 벨씩이나 캐스팅해놓고 더 씽을 연기시킨 까닭에? <위플래쉬>의 마일스 텔러가 아직은 이런 대형영화에 어울리는 배우가 아니기 때문에? 이도저도 아니고 그냥 감독이 신인이라서?

디즈니-마블 스튜디오의 마블 코믹스 프랜차이즈가 죄다 흥행하면서 (역시 마블 코믹스의 대표적인 작품인) <엑스맨>과 <판타스틱4> <데어데블>의 영화 판권을 가지고 있는 이십세기 폭스는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특히 폭스는 <판타스틱4>의 리부트를 2015년까지 무조건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있었다. 후속편을 만들지 않으면 <판타스틱4>의 캐릭터들을 마블에 반환해야 하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반환하는 게 훨씬 더 나은 선택이었겠지만 장사하는 입장에서 그런 결정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폭스는 <엑스맨>과 <판타스틱4> 프랜차이즈를 이어나가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조시 트랭크가 작업한 <판타스틱4>의 초기 시나리오는 호평을 받았고 캐스팅 열기는 뜨거웠다. 모든 게 순조로워 보였다.

문제는 조시 트랭크가 들고온 편집본에 폭스가 전혀 만족하지 않으면서 벌어졌다. 폭스는 <판타스틱4>의 2시간20분짜리 감독판을 길고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폭스가 원한 것은 단순 편집이 아니었다. 그들은 재촬영을 요구했다. 상당한 분량이었다. 당초 <판타스틱4> 리부트는 2015년 3월에 북미 개봉을 예정에 두고 있었다. 폭스가 재촬영을 요구한 건 2015년 1월이다. 그들이 얼마나 조바심을 내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개봉은 여름으로 미뤄지고 재촬영이 이루어졌다. 폭스의 생각에 수 스톰은 무조건 금발이어야 했고, 케이트 마라는 가발을 쓴 채 다시 연기해야만 했다. 재촬영과 편집을 거쳐 2시간20분짜리 영화가 1시간30분으로 줄어들었다.

조시 트랭크의 2시간20분짜리 감독판이었다면 <판타스틱4>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달라졌을까? 그건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는 팔다리가 늘어나고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 날아다니고 투명인간이 되고 돌덩이가 되는 슈퍼히어로는 영화 캐릭터로 더이상 별다른 매력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능력이라고는 그저 작아지는 것밖에 없는 슈퍼히어로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확인한 관객에게 그런 말은 별 설득력이 없다. 스튜디오의 개입이 늘 형편없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 확실한 건 <판타스틱4> 리부트가 2000년 이후 만들어진 슈퍼히어로영화 가운데 확연히 덜떨어졌다는 사실뿐이다. 디즈니-마블 스튜디오가 벌여놓은 슈퍼히어로 유니버스 안에서 적어도 베지터 정도의 지분을 차지하길 바랐던 이십세기 폭스는 이제 와 그냥 야무치가 되고 말았다. 영화가 공개된 이후 조시 트랭크는 이 모든 게 자기 탓이 아닌 폭스 책임이라는 요지의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하고 있다.

디즈니-마블 스튜디오의 <앤트맨>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앤트맨은 코믹스팬이 아닌 이상 인지도가 떨어지는 캐릭터다. <판타스틱4>가 여타 마블 코믹스의 히어로들 가운데 인기나 인지도가 덜하다고들 하는데, 그걸 인정하고 보더라도 <앤트맨>에 비할 바는 아니다. 심지어 코믹스팬들조차 앤트맨을 그리 좋아히지 않는다. 코믹스팬들의 기억 속에 앤트맨-행크 핌은 그냥 ‘아내를 때리는 정신이 불안정한 천재’이기 때문이다. <앤트맨>은 본래 기획을 이끌었던 에드거 라이트가 연출에서 하차하는 내분마저 겪었다. 실패할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던 <앤트맨>은, 그러나 보기 좋게 흥행에 성공했다. 크기가 작아지는 것뿐인 슈퍼히어로의 단출한 능력을 조롱하면서도 그 매력을 다양한 액션의 합으로 극대화시켰다. 1대 앤트맨 행크 핌을 멘토 역할로 치워두고 2대 앤트맨 스캇 랭을 중심에 둘 만큼 영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앤트맨>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이야기의 확장성에 있다. 관객은 <앤트맨>에서 <어벤져스>에 관련된 농담을 듣고, 아무렇지 않게 등장하는 어벤져스 본부와 팔콘을 목격하며,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로 이어질 다음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다. <아이언맨>부터 시작된 디즈니-마블 스튜디오의 마블 유니버스는 이제 독립되고 단절된 이야기들을 넘어 하나의 유기적인 대체 역사가 되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코믹스에서 그러했듯 마블 영웅들의 이야기가 우리 시간대에 존재하는 멀티 유니버스가 된 것이다. 스칼렛 위치가 정신분열을 일으켜 이 멀티 유니버스를 지워버리지 않는 이상, 다른 제작사의 마블 영화가 디즈니-마블 스튜디오의 마블 영화를 뛰어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블 스튜디오가 스파이더맨 캐릭터를 사용할 수 있게 동의한 소니의 선택은 ‘매우’ 옳다.

폭스에는 아직 <엑스맨> 프랜차이즈가 남아 있다. 이 시리즈는 매튜 본의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이후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다. <엑스맨: 아포칼립스>가 폭스에 “신에게는 아직 열두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가 될지 “브루투스 너마저”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엑스맨> 시리즈 역시 향후 마블 유니버스에 편입되지 않는 이상 시간여행과 같은 아이디어만으로 연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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