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우혜경의 영화비평] 두개의 지금
2015-10-06
글 : 우혜경 (영화평론가)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 같지만 다른 사건의 병렬이 의미하는 것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북촌방향>에서 성준(유준상)은 선배 영호(김상중)와 함께 술집 ‘소설’을 세번 방문한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세번 반복된 사건인지, 아니면 흐트러진 시간 혹은 흐려진 정신이 만들어낸 ‘분신술’인지 영화는 잘 설명하지 않는다. ‘소설’의 주인 예전(김보경)은 술자리에 매번 늦게 도착해 자신의 부재에 대해 (거의) 똑같이 미안함을 전한다. 성준과 영호도 마치 매번 이곳에 처음 온 것처럼 그런 예전에게 (거의) 똑같이 인사를 건넨다. 그런데 영화가 이렇게 ‘시치미’를 떼기 시작하면 곤란해지는 것은 바로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영화로부터 따돌림받은 우리를 어느 순간 보람(송선미)이 슬쩍 잡는다. 첫 번째 술자리에서 보람은 뒤늦게 가게로 돌아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예전에게 웃으며 인사한 뒤, 옆에 있던 영호에게만 지나가듯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는 거 아니야?”라며 작게 이야기한다. 두 번째엔 좀 노골적으로 예전을 타박하더니, 세 번째에 와서 보람은 화를 버럭 내며 “이 밤중에 저 사람은 도대체 어딜 다니는 거야?”라고 소리까지 지른다. 그런데 보람의 감정이 세번의 반복 속에서 이렇게 차례로 고양되어 갈 때, 영화 속에서 길을 잃었던 우리는 비로소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게 된다. 홍상수의 열일곱번째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그의 열두 번째 영화 <북촌방향>을 먼저 꺼내든 건 우리를 위해 소리를 질러주었던 그녀, ‘보람’이 이 영화에선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121분의 상영시간을 거의 정확하게 둘로 쪼개놓은 이 영화는 ‘그때는맞고지금은틀리다’라는 제목의 전반부(이하 1부)와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라는 제목의 후반부(이하 2부)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가 시작하면 영화제 참석차 수원에 도착한 감독 함춘수(정재영)가 우연히 그림을 그리는 윤희정(김민희)을 만나 술을 마시며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영화 상영이 끝난 뒤 수원을 떠나는 만 하루 동안의 이야기가 약 59분 동안 선형 진행된다. 어리둥절해지는 것은 이렇게 끝난 1부 뒤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함춘수의 거의 똑같은 하루 여정이, 거의 똑같은 상영시간 동안 다시 한번 2부에서 고스란히 반복되면서부터이다. 순서로만 본다면 2부는 1부의 반복일 수밖에 없지만, 무언가 자꾸만 미세하게 어긋나 있어 마음 편하게 ‘반복’이라고 부르기도, 그렇다고 1부는 함춘수의 시점에서, 2부는 조금 더 객관적인 시점에서 ‘사건’을 재구성한 것이라 여기기도, 어딘가 영 편치 않다. 한 인터뷰에서 홍상수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인물의 감정적 태도의 변화, 그에 따른 제스처, 얼굴 표정, 말투 등의 변화를 가지고 1부, 2부의 차이를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 1부와 2부가 ‘다른 두 세계’처럼 느껴졌으면 했습니다. ‘다른 두 세계’가 독립된 세계처럼 느껴질 수 있도록 ‘더 많은 다른 세계들’의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게 되길 기대했습니다.” 더 많은 ‘다른’ 세계들이 가능한 독립된 세계. 말하자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1부의 세계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린’ 2부의 세계는 서로 다른 사건, 확률의 언어로 따지면 하나의 사건의 발생이 나머지 하나의 사건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는 ‘독립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홍상수의 이 말에 수긍하며 생각을 멈추면 안 된다. 이제까지 홍상수는 이렇게 완벽하게 독립된 세계의 반복을 다룬 적이 거의 없었다. 정말 1부와 2부는 ‘독립된’ 사건일까? 그렇다면 무엇이 이 독립된 두개의 세계를 하나의 영화 안에 공존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우리는 이 ‘차이’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따져 물어보아야 한다.

시간의 틀을 거스르다

이 영화는 제목 타이틀을 제외하면 1부는 25개의 숏, 2부는 23개의 숏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부에는 존재하지만 2부에는 존재하지 않는 숏들(감독지망생 염보라(고아성)와 함께 숙소 앞에서 담배를 피운 다음, 함께 썰매장에 가는 두개의 숏, 함춘수가 관광객들을 피해 잠시 ‘복내당’을 빠져나와 행궁을 거니는 장면, 작업실에서 창밖을 향해 담배를 피우던 윤희정의 뒷모습, 영화 상영 후 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GV, ‘수원화성박물관’ 간판의 독립적 클로즈업, 함춘수가 선물받은 시집의 클로즈업)과 2부에는 존재하지만 1부에는 존재하지 않는 숏들(작업실 옥상에서 함춘수와 윤희정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시인과 농부’ 앞에서 김원호(기주봉)가 담배를 피우다 가게를 떠나는 둘을 배웅하는 장면, 강원도에 가자며 윤희정을 설득하는 함춘수가 서 있던 밤거리, 윤희정이 집 앞 골목에서 엄마(윤여정)의 전화를 받는 장면, 영화 보러 극장에 들어온 윤희정과 그녀를 따라 들어온 함춘수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 각각 덧셈과 뺄셈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이 숏들의 차이는 우선 사건의 디테일의 차이, 그러니까 ‘그때는 이랬는데, 지금은 이렇다’는 식의 미끄러짐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1부에서 함춘수는 ‘너무 예뻐 조심해야 한다던’ 염보라와 함께 썰매장에 가지만, 2부의 함춘수에겐 그러한 장면이 없다. 2부에서 술에 취해 옷을 벗던 함춘수의 행동은 1부에서 보지 못한 것이었다. 한편으로 숏의 차이는 지연된 대구의 형태로 2부에서 변주되기도 한다. 1부의 두 번째 숏에서 함춘수는 자신의 숙소인 유스호스텔에 올라가 창밖으로 주차장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곳엔 ‘예뻐서 조심해야 하는’ 염보라가 서 있다. 하지만 2부의 두 번째 숏은 숙소 주차장에서 방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함춘수를 올려다본다. 대구를 이루는 이 두개의 숏에서 1부의 시선은 함춘수의 것이었지만, 2부의 시선은 염보라의 것이다. 1부의 일식집에서 함춘수가 간절히 찾던(그렇지만 없었던) 반지를 2부의 함춘수가 가게 앞에서 우연히 (마침맞게) 줍기도 한다. 2부에서 우리는 작업실에서 윤희정이 그리던 그림을 보지 못했지만, 1부에서 이미 보았던 그녀의 그림을 자연스럽게 그 자리로 불러온다. 물론 홍상수 영화를 한두편쯤 본 관객이라면 이러한 ‘반복과 차이’가 정확하게 맞물리는 인과관계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사건들이 무작위로 일어난다고 보기도 어렵다. 때로 이 ‘반복’은 서로 다른 인물들 사이에서 일어나기도 하고(<극장전> <우리 선희>), 거꾸로 서로 다른 인물이 한명의 배우에 의해 재현되면서 발생하기도 하며(<다른나라에서> <북촌방향>), 때로 시간차로 인해 생겨나기도 한다(<옥희의 영화> <자유의 언덕>). 또 좀더 느슨한 형태로 꿈을 경유하여 반복되거나(<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영화 속 영화(혹은 이야기)의 이중구조를 통해 발현되는 경우도 있다(<극장전> <다른나라에서> <하하하>). 그런데 그 다양한 방식보다 더 환기해야 할 것은 이제까지 홍상수의 대부분의 영화에서 이 모든 반복의 중심에 ‘누빔점’들이 거의 항상 영화 안에 존재해왔다는 점이다. <다른나라에서>의 서로 다른 세명의 안나(이자벨 위페르)의 반복(과 차이)은 이 이야기들을 구상하는 원주(정유미)에 의해서 고정되며, <자유의 언덕>에서 모리(가세 료)의 반복적 일상은 권(서영화)이 흩었다 다시 추린 모리의 편지에 의해 다시 조립된다. 이때 꿈이나 우연은 더 느슨한 형태의 누빔점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북촌방향>에서 보람과 성준이 거리에서 세번 우연히 만난 여배우는 성준의 반복을 일깨워 헐겁게나마 영화를 시간으로 붙들어맨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영화가 아무런 누빔점 없이 두개의 ‘독립된’ 사건을 그저 앞뒤로 배치해놓았다는 것은 꽤 이례적인 일이다. 무엇보다 1부와 2부는 거의 비슷하게 ‘반복’되지만 이제껏 홍상수가 보여주었던 ‘반복’과는 그 양상이 사뭇 다르다. 심지어 이 영화는 1부와 2부를 느슨하게나마 엮어줄 (이제까지 홍상수가 빈번하게 사용해왔던) ‘꿈’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2부에서 함춘수는 1부에서 그랬던 것처럼 복내당 기둥에 기대 잠을 청한다. 하지만 그가 잠이 채 들기도 전에, 윤희정이 비닐봉지를 부스럭거리며 바나나 우유를 꺼내는 소리로 침입한다. 윤희정의 대사, “제가 오히려 감독님 주무시는데 깨운 건 아닌지….” 꿈꾸는 것을 저지당한 함춘수는 1부의 이야기를 2부 안으로 끌어오는 데 실패한다. 동시에 이 영화의 1부와 2부의 반복은 선형적 시간의 흐름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지금’과 ‘그때’라는 제목의 표현 때문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될 것 같은 이 영화의 시간은 오히려 이로 인해 더 혼란스러워졌다. 여기에 한번 더 생각해야 할 것은 ‘그때’라는 단어이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인 <Right Now, Wrong Then>에서 ‘그때’를 뜻하는 ‘then’은 ‘과거’의 ‘그때’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정반대로 ‘미래’의 ‘그때’를 부를 때에도 사용된다. 이러한 용법은 한글, ‘그때’도 크게 다르지 않다(“‘그때’ 그곳에 갔었니?”도 가능하지만 “네가 그곳에 가게 된다면, ‘그때’ 나도 불러줘”도 가능하다). 그 말인즉,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선형도식 위에 이 영화를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유의 언덕>에서 모리는 영선(문소리)에게 이런 말을 한다. “시간은 우리 몸이나 탁자 같은 실체가 아닙니다. 우리 뇌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틀을 만들어내는 거죠. 하지만 꼭 그런 틀을 통해 삶을 경험할 필요는 없습니다.”

차이를 의식하는 자 누구인가

다시 돌아가 영화 제목을 천천히 다시 읽어주길 바란다. 사실 이것은 문법상 틀린 문장이다. ‘지금은 맞고’는 ‘지금’이라는 현재시제와 ‘맞고’라는 현재시제 술어가 호응을 이루고 있지만, 과거 혹은 미래를 나타내는 ‘그때’와 호응하는 술어 (‘틀렸다’도 ‘틀릴 것이다’도 아닌) ‘틀리다’는 현재시제로 남아 있다. 영어 제목엔 형용사 ‘right’와 ‘wrong’을 주어와 이어줄 ‘be’동사가 사라져 우리는 이 문장의 시제를 판단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오롯이 남는 것은 ‘현재’뿐이다. 즉, 이 영화에는 자의적 선후관계만을 가진 두개의 ‘지금’이 나란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두개의 이야기는 반복이되 반복이 아니다. 다시 한번 홍상수의 말. ‘두개의 다른 독립적인 세계’, 반복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았으니, 이제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1부와 2부의) ‘미세한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할 차례인 것 같다. 많은 이들이 1부의 인물들과 2부의 인물들을 비교하며 2부의 인물들이 ‘더 솔직해졌다’고 말한다. 홍상수는 1부가 끝난 다음, 편집본을 주인공 역을 맡은 두 배우에게 보여주며 ‘더 외롭다’와 ‘더 솔직하다’라는 두개의 말로 2부의 방향을 설명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정말 더 솔직해진 걸까? 2부의 함춘수는 윤희정의 그림을 보고 “퀄리티는 있지만, 상투적인 것으로 위로를 받고 있다”며 “희정씨에게 더 솔직하려고 그런다”라고 말한다. 일견 더 솔직해진 것도 같다. 그러나 사실 2부의 함춘수가 ‘더’ 솔직해 보이는 것(혹은 윤희정이 더 ‘외로워’ 보이는 것)은 우리가 1부에서 ‘덜’ 솔직한 함춘수의 모습(혹은 좀더 밝은 윤희정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 더 크다. 그런데 잠깐만, 두개의 다른 독립적인 세계, 그러니까 누빔점도 없이 반복된 이 두개의 세계를 엮어 ‘더’ 혹은 ‘덜’이라는 비교를 하기 시작하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우리’라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전까지 홍상수의 영화에선 그게 꿈이 되었든, 흩어진 편지가 되었든 이러한 반복들을 엮어내는 지점들이 존재했고, 우리는 그저 그 세계에 초대된 손님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홍상수는 이러한 누빔점을 없애고 그 자리에 직접 우리를 불러앉힌다. 1부가 시작하고 2부가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흩어진 편지를 애써 모아 읽어내려갔던 ‘권’처럼(<자유의 언덕>) 서로 다른 독립적인 세계, 1부와 2부 사이에서 ‘반복과 차이’를 바쁘게 만들어나가기 시작한다. 홍상수는 그저 이 두편을 하나의 ‘영화’ 안에 묶어놓았을 뿐이다. 이것이 가능해지는 것은 서로 상관관계가 없는 두개의 사건이 병치될 때 어떤 심리적 간섭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이야기의 쿨레쇼프 효과’라고나 할까?

2부의 함춘수가 복내당에서 윤희정에게 커피나 한잔하러 가자고 이야기할 때, 저 멀리서 종소리가 네번 반복해 들린다. 앞에서 1부를 경험한 우리는 이 종소리를 듣는 순간, 1부의 마지막, 윤희정의 집 뒤에서 보았던 불상을 (파블로프의 실험처럼) 떠올린다. 여기에는 마치 도돌이표처럼 자꾸만 ‘현재’를 반복시키려는 홍상수의 ‘시간의 환영술’이 있다. 상영을 마친 함춘수는 수원을 떠날 수 있었을까? 영화를 보고 나오는 윤희정은 행궁에서 길을 잃지 않고 집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을까? 돌아가는 윤희정의 뒷모습에 (홍상수의 말을 빌리자면, “하늘이 그렇게 하라고 시킨 듯한”) 눈이 내린다. 이 불길한 눈을 우리는 <북촌방향>에서 본 적이 있다. 북촌을 헤매다 이곳에 온 유일한 이유, 영호마저 연락이 되지 않는 막막한 성준의 머리 위에도 눈이 내렸다.

어쩐지 엔딩크레딧이 올라간 텅 빈 화면 뒤로 (아직) 서울에 가지 못한 함춘수가 복내당에 앉아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그곳엔 함춘수와의 ‘조화’(造化)로운 만남을 (다시) 기다리며 윤희정이 바나나 우유를 마시고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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