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870년 콜로라도로 배경이 명시돼 있긴 하지만, <슬로우 웨스트>의 서부는 시공을 초월한 이민자들의 혹성처럼 보인다. 스코틀랜드에서 사랑과 희망을 찾아 콜로라도까지 온 열여섯 소년 제이(코디 스밋 맥피)는 아일랜드 혈통의 현상금 사냥꾼, 프랑스어로 노래하는 아프리카인, 북구에서 온 굶주린 가족, 독일계 지식인과 차례로 조우한다. 이들 대부분은 생존 이외 삶의 의미를 잊은 지 오래다. 한편 이 영화의 실제 로케이션은 뉴질랜드-중간계다. 낯선 별에 떨어진 순진한 영혼은 실망을 견디며 순례를 계속한다. 광각으로 집채만 하게 찍힌 버섯에 다가가는 소년을 올려다보는 숏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삽화 같다. 이 희한한 서부극이 자연스레 환상성을 끌어들이는 순간 중 하나다.
09/09
<사도>는 스스로 택한 역사적 소재의 어떤 부분이 호소력을 발휘하는지 상세히 살펴 착실하게 극화했다. 흔히 사극의 필수 구색으로 여겨지는 액션, 스펙터클, 코미디는 현명하게 제어됐다. (적어도) 영화의 본론에서 이준익 감독은, 이금과 이선이라는 특수한 부자간에 일어난 ‘집안일’로서 임오화변의 곡절에 집중한다. 영화의 시간은 90분 시점까지 두 갈래로 흐른다. 주된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과 <한중록> 등의 기록을 중심으로 부자 관계의 전말을 시간순으로 재현한 플래시백 타임라인에 일어나고, 사도세자(유아인)가 뒤주에 갇혀 굶어죽기까지 이레 동안의 일은 그야말로 서사의 ‘궤’(櫃)로만 기능한다. 영조의 극단적 결단에 필시 작용했을 당파간의 정치적 역관계는 <사도>의 관심사가 아니다. <사도>에서 내명부 비빈들의 대화와 관료들의 속삭임은 그 자체로 드라마라기보다, 사료가 전하는 정보- 영조의 습벽, 사약 대신 뒤주를 택한 법적 배경 등- 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주석 기능을 주로 담당한다. 임오화변의 전모를 균형 있게 그리지 못했다고 아쉬워하는 관객도 있겠지만 학계의 해석조차 분분한 사건에 영화가 만족스런 해제를 제시하길 바라는 일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취사선택한 관점과 시야 내에서 재구성한 허구의 일관성과 깊이를 성취하는 것이 사극의 최선이 아닌가 싶다.
그리하여 <사도>는 영조라는 인물의 캐릭터 스터디로서 가장 매력적인 영화다. 타이틀 롤인 사도 역시 동등한 주인공이지만 그의 언행은 근본적으로 주도권을 쥔 군주/아버지의 처분에 대한 리액션이므로 큰 연민은 자아낼지언정 독자적 퍼스낼리티를 구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사도>의 화근은 감독의 전작인 <왕의 남자>의 연산군- 그리고 희미하나마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선조- 이 보여주었듯 제왕의 정신적 콤플렉스와 증후군이다. 전작의 두 왕과 달리 폭군 혹은 무능한 왕으로 치부할 수 없는 영조의 이상심리는 현대 관객의 적극적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사도>가 사료에 기초해 그리는 영조는 광인이 아니라 고도로 지적인 동시에 미신적인 인간이며 이미지 관리에 용의주도한 정치인이다. 필요에 따라 눈물을 연기하고, 권력 유지에 족하지 않고 정정당당한 성군임을 확인받고자 수시로 양위 소동을 벌이며, 편애가 극심해 어여삐 여기는 이와 미운 자가 한데 섞여 있는 꼴도 못 본다. 거슬리는 말 한마디에도 평정이 깨져 귀를 씻고, 문지방의 촛불을 뛰어넘고서야 침소에 든다. 이런 강박증은 권력자의 고독으로 이해될 만하지만 밉보인 신하(세자를 포함해)를 불러 불길함을 전가하는 영조의 못된 버릇은 연민을 차단한다. 관객이 세자 편으로 기우는 분기점은 아마 대리청정 시퀀스일 거다. 실제로도 차기 국왕인 아들의 정치적 포지션과 거기에 따른 본인의 노년과 사후평가를 가늠하는 행위였을 대리청정을, 영화는 치사한 견제심리까지 살려 묘사한다. 이 시점부터 영조는 세자의 그릇과 됨됨이를 염려하는 아버지라기보다 옹졸하고 무정한 인간이다. 이후 영조는 “너, 내 앞에서 앞으로 솔직한 척하지 마라”, “내가 네 오기를 모를 줄 아느냐?” 같은 용렬한 말로 아들을 할퀴어 사태를 악화시킨다. 이 모든 장면이 영조라는 남자의 연약함을 드러내지만, 그가 지닌 힘을 고려하면 치졸한 행태임을 영화는 감추지 않는다. 아버지/남편의 애환에 집중해온 이준익 감독으로서는 다소 뜻밖으로 영조의 결함을 변호하지 않는 연출과 이를 지탱하며 인물을 성립시키는 송강호의 연기는 <사도>의 최대 장점이다.
연기와 관련해 <사도>의 형식적 아쉬움을 말하자면, 거추장스러우리만큼 줄곧 드라마를 거드는 음악과 빈번한 초점 이동(rack focus) 촬영이다. 실내극 성격이 강한 <사도>는 한숏 안에서 앞뒤로 위치한 둘 이상 인물이 말하거나 반응할 때 거의 예외 없이 초점을 왕복시켜 관객이 주시할 사람을 꼭 집어 지정한다. 보통 시각적 정보를 감춰 ‘발견’을 유예하기 위해 구사되는 이 기법이 영화 전반에 지속적으로 쓰임으로써 우리는 이를테면 수렴청정 중 영조의 말을 듣는 사도의 얼굴을, 사도에 반응하는 영조의 표정을 알 수 없다. 관객이 상호작용을 종합할 기회가 적은 셈이다. 에필로그에서 영조 옆에서 포커스 아웃된 정조(소지섭)의 흐릿한 프로필은 사도와 무척 닮았는데, 앞부분에서 초점 이동이 그토록 남용되지 않았다면 특별한 감흥을 낳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09/10
한국영화 전반을 돌아봐도 나쁜 아버지는 차고 넘치지만 어떻게 나쁜가를 <사도>만큼 구체화한 드라마는 드물다. 송강호의 기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변호인>에서 지적이면서 ‘촌스러운’ 인물을 구현했던 그는 <사도>에서 비열하고도 끝내 떳떳한 인물을 덤덤히 완성한다. 지금까지 송강호가 연기한 주인공들은 관객이 편들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비단 송강호뿐 아니라 한국영화에서 조연 말고 주연이 관객의 동일시와 감정적 지지에 기대지 않고 설득하는 예는 희귀하다. <사도>의 송강호는 호감을 배제한 채 생생함만으로 스크린에서 육중하게 버틴다. 그의 연기는 영조를 이해해달라고 호소하지 않는다. 관객이 영조에게 동조하거나 완벽히 이해할 필요가 없음을 그는 잘 안다. 변고의 날, 휘령전에 불려나온 사도가 “지금까지 나를 아들로 대했소?”라고 절규할 때 “니가… 긴 말 말자”라고 성가셔하는 냉담함, 대리청정의 뒷자리에서 아들의 개혁적 결단이 혹시 노론 세도를 엎어치기할 수 있을까 재빠른 시선으로 살피다 중과부적이라 판단되자 세자를 비난하는 쪽으로 곧장 돌아서는 교활한 얼굴은 잊기 어렵다. “차라리 미쳐서 발광을 해라!”라는 일갈에는 그저 분노를 넘어 아들이 광인으로 폐세자되는 길이 차선책이라는 현실적 판단이 실려 있어 모골이 송연하다(이것이 사도가 유일하게 만족시킨 아버지의 여망이다). <사도>는 영조가 임오화변을 후회했다는 금등지사의 일화를 생략한다. 죽기 전까지 끅끅거리는 음성으로 집요하게 자신을 정당화하는 송강호의 늙은 영조는 미움에 중독된 병자이자 기어이 병을 부정하는 석회질의 인물이다. 이 배우는 이제, 우리의 동일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슬아슬한 대목도 있다. 영조가 아들을 주살할 수밖에 없음을 구술하는 독백으로 시작해 뒤주로 다가가 사도의 절명을 몸소 확인하는 신이다. 이 대사는 도중에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의 부자간 대화로 변했다가 다시 화면 안 영조의 독백과 눈물로 돌아간다. “(아버지 입장을) 알기에 이해하려 노력했소.” “어찌하여 우리는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까지 와서야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단 말이냐. (중략) 내가 왕이 아니고 네가 왕자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느냐.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현실인지 환상인지 어사무사한 이 이상한 대화는 화해로 오인되기 쉬우나, 영화적 정황상 영조의 머릿속 자기최면일 수밖에 없다. 사도의 죽음을 확인한 후 회궁길에 개선가를 연주하도록 명하는 영조의 대사가 그 방증이다. 영조 자신에게, 백관과 백성에게, 임오화변이 정당한 처사였음을 위압적으로 천명하는 퍼포먼스인 셈이다. 이 시퀀스는 금천교 위에 대죄하여 부복한 사도의 영혼을, 부왕의 가마가 무심히 밟고 지나가는 숏으로 끝난다. 나는 이 지점에서 <사도>가 이해할 수 없기에 강렬한 가족 비극으로 끝나길 바랐다.
09/11
그러나 이준익 감독은 온전한 비극을 완결해놓고도 비극적 코다는 수용하지 않는다. 14년 후 장성한 정조를 등장시켜 구태여 영화를 역사의 섭리에 대한 통찰로 확장하고 정반합의 삼단구조를 완결하고자 한다. 분망한 에필로그 와중에 비극의 주역인 영조는 합당한 맺음을 누리지 못하고 영화에서 퇴장한다. 연출 의도와 달리 <사도>의 정조는 역사적 정반합의 합으로 존재하기 어렵다. 영조와 사도가 정과 반으로 수립될 만큼 둘의 정치관과 세계관이 명료하게 대립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정조는 아버지의 한풀이를 하는 제주(祭主)로 영화 속에 서 있을 따름이다. <사도>는 환대의 시간을 넘기는 바람에 폐를 끼치는 손님이 돼버린다. 혜경궁 앞에서 생황 연주에 맞춰 정조가 부채춤을 추는 꽤 긴 장면은, 음악과 연희를 통해 서사를 해소하는 ‘의례’에 애착하는 이준익 감독의 취향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공연 클라이맥스가 서사적으로 용해되는 <왕의 남자>와 <즐거운 인생>도 있었지만 <사도>의 경우는 과잉이자 일탈이다. 이 후주는 관객의 눈물을 말리고 반추를 차단한다. 이야기의 승화가 반드시 러닝타임 안에 이뤄질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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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 플레이타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국내 첫 공개되는 두기봉 감독의 신작 <화려한 샐러리맨>은 무대극의 형식을 고스란히 가져온 뮤지컬이다. 실내외를 막론하고 극중 모든 공간은 반쯤 추상화된 세트로 등장한다. 천장과 벽 대신 투명하고 반짝이는 재질의 프레임과 구조물이 사무실, 병원, 거리를 표현한다. 분필로 마을 전체를 그렸던 <도그빌>의 부유한 버전이라고 해도 좋다. 증권거래소 전광판의 리듬으로 경쾌하게 운동하는 <화려한 샐러리맨> 안에는 권력투쟁, 빛바랜 사랑, 고속성장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탈락할까 불안한 중국인의 심경이 뒤엉켜 있다. 세트의 외양이 위장하는 바와 반대로 곧고 선명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동시에, 외부의 시선을 향해 스스로를 전시하면서도 언제든 쉽게 허물어질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화려한 샐러리맨>의 세트는 영화의 주제에 부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