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이선균] 스펙트럼을 넓히다
2015-10-12
글 : 이예지
사진 : 오계옥
<성난 변호사> 이선균

이번에는 변호사다. 셰프부터 의사, 건축가, 형사 등을 두루 맡아온 ‘전문직’ 전문 배우 이선균이 <성난 변호사>로 돌아왔다. 드라마 <파스타>에서 샘 킴 셰프에게 직접 칼 쓰는 법과 요리를 배웠고, <하얀 거탑>과 <골든타임>에선 수술을 참관하며 의학지식을 익혔던 그는 이번 <성난 변호사>에선 재판을 참관하는 데서 나아가 교회 설교, 각종 홈쇼핑 및 토크쇼를 섭렵했다. 그렇게까지 한 이유는 “뛰어난 언변으로 법정을 압도하는 변호사 ‘변호성’ 캐릭터를 제대로 소화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새로운 옷을 입고 관객과 마주할 준비를 마친 이선균을 만났다.

<성난 변호사>의 변호성은 ‘이기는 게 정의’라는 신념하에 돈 냄새 나는 사건만 맡아 일사천리로 해결하는 능력 있는 변호사다. 제목만 보면 본격적인 법정 드라마 같지만, 이 변호사는 발로 뛰어야 하는 사건에 맞닥뜨리고 급기야 구르고 깨지며 몸을 혹사시킨다. 가히 <끝까지 간다>의 고건수 형사에 못지않은 활동량이다. 지난해 그에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최우수연기상을 안긴 <끝까지 간다> 이후 그의 연기 인생엔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그전까진 로맨틱 코미디가 더 많이 들어왔는데, <끝까지 간다> 이후엔 몸을 쓰는 형사물, 스릴러 위주로 작품이 들어왔다. 그리고 부담스럽게 원톱영화들이 많이 들어오더라. (웃음)” 물밀듯 들어온 작품들 중 <성난 변호사>를 택하게 된 까닭은 무얼까. 그는 차기작을 정하는 기준 중 하나로 “전작”을 꼽는다. “한번에 180도 바뀌는 모습은 아니어도, 전작의 모습에서 연기의 폭을 5도, 10도씩 키우며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히려 한다. <성난 변호사>는 그만큼의 폭을 더 확보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돌이켜보면 그의 스펙트럼은 언제나 넓어지는 과정에 있었다. 이선균이 최초로 대중에게 각인된 이미지는 ‘부드럽고 선한 남자’였다. 드라마 <하얀 거탑>에서 인간적인 가치를 지키려 노력하는 의사 최도영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그는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말 그대로 ‘프린스’ 같은 로맨티스트 최한성으로 분해 여심을 사로잡았다. 진폭이 넓고 울림이 깊은 중저음의 목소리는 그에게 ‘동굴 목소리’라는 애칭까지 선사했고, 한동안 그는 다정하고 따뜻하며 섬세한 어떤 남자의 전형으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반전을 보여준 것은 <파스타> 때다. 한없이 자상할 것만 같았던 그는 팬을 든 폭군이 됐고, ‘내 주방에 여자는 없다’고 선언하는 까칠한 셰프로 변신했다. 다정하던 동굴 목소리는 시도 때도 없이 ‘버럭’하는 성량 좋은 목소리가 됐건만 능력 있는 셰프의 밀어주고 당겨주는 연애 앞에 여심은 이번에도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그런 위악이 전부가 아니라는 듯, 그는 금세 홍상수 감독의 <옥희의 영화> <우리 선희> 등에서 ‘찌질’하고 그래서 더 절실한 남자의 모습을 입었다. 홍 감독의 영화에서 생활연기를 체득한 그는 <쩨쩨한 로맨스> <내 아내의 모든 것> 등에서 적당히 지질하고 적당히 현실적인, 보통 남자들을 대변하는 캐릭터가 됐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선균’이라는 캐릭터는 로맨틱 코미디나 멜로의 주인공으로 더 익숙한 이미지였다.

그의 스펙트럼이 뜨거운 에너지로 응축되는 순간

<끝까지 간다>는 그랬던 이선균이 캐릭터를 넘어 장르의 영역을 확장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는 영화에서 일체의 러브라인 없이 남성 캐릭터와의 힘겨루기만으로 극을 견인해갔다. “<끝까지 간다>는 전환점 혹은 하나의 언덕 같은 것이었다. 새로운 장르에 대한 시도였을 뿐 아니라 극을 끌고 가는 책임감도 알게끔 해준 작품이다. <성난 변호사>는 그 터닝 포인트 이후 내딛은 첫걸음이다. 원톱에 대한 부담감이 컸지만 까짓 거 한번 부딪혀보자고 생각했다.” 부딪힌 결과는 꽤 낙관적으로 보인다. <끝까지 간다>의 고건수가 사건에 휘말렸다면, <성난 변호사>의 변호성은 사건을 주도한다. <성난 변호사>를 연출한 허종호 감독이 말했듯 “조진웅이 없는” 이 영화에서, 이선균은 온전히 캐릭터의 힘으로 극을 장악했다. “<끝까지 간다>는 사건 중심의 영화라 캐릭터가 뚜렷하지는 않다. 그러나 변호성은 프라이드가 강하고 톡톡 튀는 캐릭터다. 이런 캐릭터가 사건에 직면할 때마다 어떻게 대처하는지 보여주는 것이 관건이었다. 캐릭터를 연기하는 재미가 있었지.”

<성난 변호사>가 변호성 원톱의 영화라면, 이 캐릭터가 ‘성이 난 것’은 영화를 추동하는 힘이다.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나는 걸 못 참는 변호성이 승부사 기질을 발휘할 때, 영화는 가속도가 붙으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곱씹어보면, 이선균의 캐릭터가 성을 내는 것은 자못 익숙한 일이다. <파스타>에서 만족스럽지 않은 요리에 버럭 소리치고,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 자신을 떠나려는 해원을 타박하고, <끝까지 간다>에서 욕지거리를 내뱉듯 말이다. 분에 못 이기는 듯 폭발적으로 말을 쏟아내는 그의 연기에서는 마치 타고난 것 같은 기질적 뜨거움이 느껴진다. 그리고 <성난 변호사>에서 그 기질은 서사를 견인하는 원동력이 된다. ‘성난’ 변호성은, 한때 차분하고 자상했다가, 까칠했다가, 지질해지기도 하며 점점 캐릭터의 온도를 높여온 이선균의 스펙트럼이 뜨거운 에너지로 응축되는 순간이라 명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별로 로맨틱하지도 까칠하지도 않은, 그저 솔직한 스타일”

가지각색 캐릭터들을 거쳐온 그는 길었던 자신의 이미지 변천사에 “수식어는 언제든 바뀌는 것이더라”는 현답을 내렸다. “언제는 로맨틱 가이고, 언제는 ‘찌질’한 남자다. (웃음) 배우는 캐릭터를 통해 이미지를 운용하지만, 내 경우는 의도한 건 아니다. 그때그때 표현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준 게 아닐까 한다. 경험을 쌓으면서 폭을 넓혀갔는데, 중요한 건 내가 즐기고 있다는 거다.” 그가 연기한 캐릭터들 중에 실제 그 자신과 가까운 모습도 있었을까. “실제의 나는 별로 로맨틱하지도 까칠하지도 않다. (웃음) 나는 그저 솔직한 스타일이다. 연기도 멋 부리고 포장하기보단 힘을 빼고 하는 연기를 좋아한다.” 스스로를 “신비감이 없는 사람”이라고 정의한 그는 자신과 닮은 캐릭터의 모습을 슬그머니 털어놓기도 했다. “사실 가장 닮아 있는 건 홍상수 감독 영화들에서의 모습이다. 말투도 비슷하다. 물론, 그런 ‘찌질’한 연애를 해본 건 아니다. (웃음)”

홍상수 감독을 비롯해 여러 작품을 함께해온 감독들은 그에게 다양한 모습을 채워넣은 장본인들이다. “홍상수 감독과의 작업은 일상적인 생활연기를 체득하게 해줬다. 당시 시나리오가 나오니 순간에 집중하게 되는 쾌감이 있었다. <태릉선수촌> <커피프린스 1호점>의 이윤정 PD는 배우와의 소통을 중시하고 그에게 맞는 옷을 준다. <파스타> <미스코리아>의 권석장 PD는 배우에게 연기를 믿고 맡긴다. 극단처럼 한팀으로 가는 걸 선호해 나와 배우 이성민이 쭉 같이해왔다.” <성난 변호사>를 함께한 허종호 감독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동문이다. “재학 시절 허종호 감독의 단편에 출연하기도 하며 친하게 지냈다. <성난 변호사>를 하게 된 계기 중 반은 감독과의 인연 때문이다. 가까운 사이니까 더 후회 없이 찍자고 끊임없이 서로를 채찍질했다. 그 결과로 겉치레 없이 재미있게 잘 찍은 것 같다.” 그는 “그들과 함께한 모든 작업이 날 고민케 했고, 살찌워왔고, 지금까지 오게 했다”며 함께한 인연들에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까지 보여준 그의 행보는 종결형이 아니다. 쏟아지는 러브콜에 정해진 차기작만 벌써 두개다. 배우 김혜수와 출연하는 누아르 <소중한 여인>(감독 이안규)과 사극 <임금님의 사건수첩>(감독 문현성)이 그것이다. “첫 누아르고, 첫 사극이다. 안 해봤던 장르라 잘할 수 있을까 겁이 날 수도 있는데, 이번엔 기대감이 우선한다. 아마 내가 누아르, 사극을 한다고 하면 세간의 우려가 있을 거다. 하지만 ‘이선균이 누아르 못할 줄 알았지? 보여줄게’ 이런 심정이랄까. (웃음) 제대로 즐기고 싶다. 당당해지고 싶은 마음으로 열심히 준비할 거다.” 또 다른 도전 앞에 여전히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이선균. 끊임없는 확장과 전회의 과정이 그를 구축해왔듯, 그의 스펙트럼은 계속해서 새로운 궤적을 그려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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