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액션/리액션
2015-10-15
글 : 이화정
사진 : 오계옥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정재영, 김민희 대담
정재영, 김민희(왼쪽부터)

정재영은 이미 <우리 선희>(2013)에서 선희(정유미)의 상대역 재학으로 홍상수 감독과 한 차례 인연을 맺었다. 그때 문수(이선균), 최 교수(김상중)와 함께 ‘선희의 남자’들 중 한명으로 등장한 것과 달리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는 영화감독 함춘수로 분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역할은 달라졌지만, 늘어진 청바지도 그대로고 스타일링이라고는 모르는 부스스한 머리도 그때나 진배없이 익숙하다. 정재영은 홍상수 감독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많은 남자, 영화감독들 중 하나지만 연기의 톤은 조금 다르다. 김상경, 유준상, 이선균이 뻔뻔하거나 엉뚱한 속성으로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웃음을 주었다면, 그는 ‘이렇다 할’ 무언가로 특징지워지지 않는데, 웃음기를 제거한 그 사실적인 모습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새롭게 관객의 집중을 요구하는 지점이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1부와 2부가 ‘틀린그림찾기’의 A, B컷처럼 연속 구성되는 독특한 이야기다. 특강을 하러 수원에 내려왔다 화가 윤희정(김민희)과 만나 펼치는 감정의 줄다리기에서 함춘수는, 한번은(1부) 자신을 치장해 윤희정의 호감을 사려 하고, 또 한번은(2부) 단도직입적으로 솔직하게 윤희정의 호감을 산다. 이 하루 동안의 차이 나는 ‘연애’를 도드라지게 만들어주는 건 1부와 2부에서 마치 1인2역을 하듯 달라지는 김민희의 세밀한 연기다. 고현정, 예지원, 정유미 등 홍상수 감독 영화 속 여자들의 계보를 잇지만 분위기는 새롭다. 전작들의 경우, 한 사람이 다양한 시간이나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망 속에 노출되어 그 차이와 변화의 지점들을 살피는 데 치중했다면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관찰방식은 확연히 달라진다. 홍상수 감독은 다른 시간과 관계들을 배제하고 온전히 함춘수의 ‘액션’에 반응하는 윤희정의 ‘리액션’을 기술한다. 그러나 이 액션과 리액션은 한 방향으로만 전개되는 대신, 세계의 공기를 구성하는 상호적인 흐름이 된다. 영화의 마지막 눈 내리는 풍경은 이 미미한 두 사람의 액션과 리액션이 교환되며 만들어낸 아름다운 공기다. 정재영과 김민희는 시종 감탄을 부르는 차이의 연기로 함춘수와 윤희정, 둘의 그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해낸다. 홍상수 영화의 새로움에 일조한 두 배우에게 이번엔 홍상수 감독과의 작업에서 배우가 얻은 ‘새로움’이 무엇인지 물었다.

정재영_민희랑은 이전에 같이 작업한 적은 없는데 사실 작품만 안 했지 시사회 뒤풀이 때 많이 보기도 했고 아는 사이긴 했다. 배우 김민희만의 특유의 신비로움이 있는데 그게 홍상수 감독님 작품과 맞을 것 같더라. 이전부터 (이)선균이가 민희한테 감독님과 잘 맞을 것 같다는 말을 많이 했다.

김민희_<우리 선희>에 나온 재영 선배를 보는데 눈에서 불이 튀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 잘 어울리더라.

정재영_가장 무식한 캐릭터. 홍상수 감독님 영화에 출연한 사람들 중 내가 가장 지적인 부분이 떨어진다.(웃음) 같은 감독이라고 해도 앞선 배우들이 연기하는 캐릭터와 다르게 단순하다. 내가 감독님과 인연을 맺은 건 (유)준상씨 소개를 통해서였다. <내가 살인범이다>(2012) 홍보기간이었는데 감독님께 전화가 왔다. 같이 작업해보자고. 스케줄 때문에 안 돼서 못한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감독님이 이틀만 시간을 빼달라고 하시더라. 촬영이 늘어나 결국 3일을 촬영했는데 선균이랑 술 마시는 장면 촬영과 <내가 살인범이다> GV가 겹쳤다. 원신 원컷인데 오케이는 안 나고 예정된 GV는 가야 하고, 도무지 집중이 안 되더라. 감독님의 영화를 찍을 때는 술을 진짜로 마시니까 취했는데, GV에 가서는 안 취한 척하느라 엄청 애먹은 기억이 난다. (웃음) 끝나자마자 다시 또 촬영장으로 가서 마무리 작업을 했다.

김민희_나를 아는 분들은 항상 내가 감독님 영화에 잘 어울릴 거라는 말을 많이 했다. 선균 선배도 그 이야기를 많이 했고 윤여정 선생님도 항상 그러셨다. 궁금하고 항상 작업해보고 싶었는데 연락이 와서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바로 하겠다고 했다. 감독님이 내 연락처도 모르고 하니까 선균 선배한테 물어봤다고 하더라.

정재영_내가 감독님 작품에 참여한 건 감독님 작품을 통해서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아침에 시나리오를 바로 받아서 그걸 외운다는 게 배우에게는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다. 처음엔 그런 과정으로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걱정도 컸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신기하게도 외워지더라. 끊임없이 대사를 주고받는 거라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럼에도 이번 작품은 대사가 한층 더 많아져서 쉽진 않더라. (웃음)

김민희_나도 처음엔 대사에 대한 부담이 있었다. 그런데 감독님 작품이 다른 작품들보다 대사 외우기가 훨씬 쉽더라. 배우를 정말 빛나게 해주는 이유가 이 대사들 때문이지 싶다. 대사들이 모두 생활용어다. 일부러 만들어낸 게 아니라 우리가 정말 쓸 것 같은 대사다. 말투도 내가 쓰는 대로 하면 되고.

정재영_민희가 밖으로 보여지는 이미지는 굉장히 차갑고 거리가 있을 것 같은데, 실제는 많이 다르다. 이번에 나도 같이 작업하면서 그런 점을 많이 봤고. 이번 작업하면서 그런 부분을 더 많이 느낀 것 같다. 무엇보다 본인이 이 작업을 전혀 힘들어하지 않고 잘 맞아하니 즐겁더라. 그리고 작업을 하면서 옆에서 지켜보니 홍상수 감독님이랑 민희랑 코드가 참 잘 맞는다. 촬영 중에 시간이 나는데 그럴 때 감독님 방에서 티타임을 많이 했다. 방에 피아노가 있는데 감독님도 피아노를 치시고, 민희도 피아노를 잘 친다. 둘이 피아노를 치면 그 모습이 나는 너무 어색하고 닭살이 돋는데 감독님은 속도 모르고 “재영아, 피아노 치는 민희를 좀 그려봐봐” 하신다. 감독님이 워낙 다정하게 조용조용하게 말씀하시는 스타일이다. 솔직히 나는 그런 분위기 별로 안 좋아한다. (웃음) 그래도 두 번째 작업이라 이제는 좀 적응이 된 것 같다. 희한하면서도 재밌다.

정재영

김민희_현장에서 너무 편했다. 촬영하는데도 편하게 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배우와 감독을 떠나 감독님과 잘 맞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내가 더 적극적으로 들어가게 된 것도 그래서였다. 작품을 하면서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다. 잘 맞는 것 같아서 너무 좋다고. 그런데 첫 촬영하는 날은 갑자기 겁이 나더라. 그날 촬영한 부분이 행궁에서 뒷모습으로 걸어가는 장면 하나였다. 내 대사가 한마디도 없었다. 고아성씨 대사 맞춰주면서 현장에 있는데 기분이 묘하더라. 윤희정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나 혼자 현장에 뚝 떨어진 기분이었다. 하루를 그렇게 보내고 집에 가니 기분이 이상했다. 내일은 뭘 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태였고, 나는 뭐지 이런 생각이 들더라. 그때 정말 외롭다고 느꼈다.

정재영_진짜 민희는 첫날 촬영에서 지문 하나밖에 없었다. ‘윤희정이 들어간다. 비닐봉지 들고.’ 감독님이 민희한테는 좀더 외로워지라는 말을 했는데, 촬영 첫날 그런 기분을 많이 느끼게 해주시려고 한 게 아닐까.

김민희_그런데 촬영 때만 그런 감정을 받았고 막상 본격적으로 대화를 하는 장면이 시작되고부터는 너무 재밌었다. 재영 선배 말처럼 현장이 즐거웠다. 정말 그때부터는 즐기면서 연기한 것 같다. 이번 작업이 나에게 주는 새로움이 있었다. 보통 작품 미팅을 하면 낯도 가리고 어색해지게 마련인데 홍상수 감독님과는 처음부터 그런 게 없었다. 다른 미팅이랑 많이 달랐던 것 중 하나가 내가 감독님께 내 이야기를 정말 많이 했다. 시나리오 이야기가 아니었다. 감독님이 “형제는 어떻게 돼?” 하고 물으시면 내가 그것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이것저것 많이 하고 있더라. 친구들 만나서 수다 떠는 기분으로 이야기를 했다.

정재영_그렇게 대화를 많이 하니, 감독님과 작업하면 어쩔 수 없이 내가 가지고 있는 습관이나 특성이 영화에 반영된다.

김민희_감독님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커피를 안 마셨었다. 원래 커피를 안 마시는 건 아닌데 그 당시 몸이 좀 안 좋아서 커피를 안 마시고 있었다. 감독님이 “커피는 안 좋아하냐”고 물으시더라. 그래서 이것저것 대답했는데 그게 윤희정의 캐릭터에 반영이 됐더라.

정재영_감독님이 배우들을 관찰하고 캐릭터에 반영하는데 그럼에도 평소 내 모습을 뭔가 특별히 꼬집어서 반영한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캐릭터에 제 모습은 너무 없는 거 아니에요?” 했더니 “너를 보면 정말 그런 건(이성적인 연애 감정)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아”라고 하시더라. (웃음) 이번엔 그래서 감독님 작품 중 연애 장면이 가장 약하다는 말을 듣기도 하는데. 하긴 아무리 홍상수 감독님 영화라고 하더라도 너무 연애 감정을 드러내는 연기를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다. 나는 여태껏 작품하면서 멜로 연기를 한 적이 거의 없다. 가볍게 입맞춤하는 장면 말고 키스 신은 <우리 선희>에서 처음 해본 건데,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뛴다. (웃음)

김민희_못해요가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선배도 감독님이 하라고 하면 그런 것도 할 거 아닌가. (웃음)

“타임워프한 기분이랄까, 전생을 다시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정재영_감독님이 원래 1, 2부로 나뉘는 지금의 구성을 생각하시긴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찍을 경우 너무 위험하다, 차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걱정을 하신 것 같다. 그래서 1, 2부로 찍을 것인가 아니면 그냥 아예 다른 이야기를 가져갈까 등 몇 가지를 생각하셨던 것 같다. 원래 감독님이 영화 찍고 배우들에게 작품을 보여주지 않는데 이번엔 촬영한 분량을 보여주시더라. 우리를 불러서 1부를 보여주시고 2부를 찍겠다고 말씀하셨다.

김민희_감독님의 생각을 무조건 지지했다. 감독님이 원하시는 대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재영_홍상수 감독님 영화야 배우들이 뭐라고 의견을 내거나 하는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애초에 영화 전체가 감독님 머릿속에만 있으니 이번에도 그 생각을 우린 그냥 따라간 것뿐이다. 그래서 특별히 2부를 어떻게 찍어야 할까 하는 생각을 더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그냥 현장에서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표현하려고 노력한 거다. <우리 선희> 때는 배우들도 많고 각자 역할이 조금씩 나뉘어져 있어서 좀더 수월하게 했다면 이번엔 영화 한편을 찍기는 다 찍었는데 그걸 다르게 다시 한다고 생각하니 내심 불안하기는 하더라. 러닝타임(121분)도 최근 연출하신 작품 중 가장 길어서, “감독님 너무 긴 거 아니에요?”라고 말씀드렸더니 “길지만 어쩔 수 없다”고 하시더라. (웃음)

김민희_정말 홍상수 감독님 작품은 배우들이 의견을 내고 하는 스타일의 작업은 아닌 것 같다. 일단 대사 외우는 것만 해도 벅차고 바쁘니까. 대사가 당일 아침에 나오니 캐릭터를 연구할 시간이 따로 없었다. 바로 현장에서 연기를 하면서 감정이나 행동을 극대화해서 표현하는 거다. 윤희정은 외로운 사람,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최대한 그 감정을 표현하려고 했다.

정재영_아침에 오면 대본이 나오는데, 그때그때 대사가 다르니까 그에 따라 내 태도도 달라진다. 대사에 따라서 그에 맞는 태도가 나오는 거다. 이런 지점들이 자연스럽게 하나둘 모이다 보면 상황에 따라 캐릭터의 다채로운 모습들이 보여지는 것 같다. 촬영하면서 느꼈는데 물론 감독님의 의도였겠지만, 1부에서 이미 상황을 ‘겪은 후’ 다시 2부 촬영을 시작하는데 기분이 영 이상하더라. 다시 행궁에 가서 윤희정과 만나는 처음 장면을 촬영하는데 그게, 타임워프한 기분이랄까, 전생을 다시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이상한 기분이 들더라. 모르지만 아는, 아는데 모르는 척하는 그런 감정이 느껴졌다. 분명 일주일 전에 이 여자와 같이 찍었는데, 다시 “여기서 뭐하세요?”라고 모르는 여자라는 전제하에 말을 거는 게 좀 이상하더라. 그 순간 나는 굉장히 진실되게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어딘가 잠재의식 속에서 다른 생각이 드는 거다. 분명 처음 연기할 때와는 달랐다.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부분들이 쌓이다보니 대사도 달라지게 되더라.

김민희_사실 1부의 윤희정과 2부의 윤희정이 다른 사람이라는 느낌은 없었다. 그때그때의 감정에 충실하게 대응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같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서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때는 감정이 더 짙게 나타날 수도 있는 거고. 2부에서는 1부보다 함춘수의 액션이 나한테 훨씬 더 큰 감정으로 다가왔다. 같은 횟집이지만 1부와 2부에서의 느낌이 달랐다.

정재영_2부는 좀더 솔직해지기 위해 노력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2부는 1부에서 함춘수가 쏟아낸 것들에 대한 일종의 반성인 것 같았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은 상태였다. 대사를 받아보니 미리 자기의 속을 스스로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김민희_사실 1부와 2부의 이야기들이 미세하지만 달라지고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감독님 영화는 다 철저하게 리허설을 하기 때문이다. 그냥 즉흥연기처럼 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러면 장면이 지저분해진다. 들을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하나하나 보통 대사가 아니다. 애드리브로 하는 대사가 아니라 모두 대본에 있는 대사를 하는 거다.

정재영_나는 감독님이 대사를 다 미리 써놓으시고는, 그냥 외부에 말할 때만 아침에 쓴다고 하시는 게 아닐까 싶다. (웃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걸 그날 아침에 다 쓸 수가 없다. 언제 한번 꼭 조사해봐야겠다. 감독님은 정말 천재인 것 같다. 영화 말미에 윤희정이 극장에 앉아 있고 함춘수가 극장에 들어와 둘이 대화를 하는 장면이 있다. 그때 극장 스크린에서는 <자유의 언덕> 음악이 나온다. 50초가 조금 넘는 시간인데, 음악이 끝나기 전에 내가 주어진 대사를 다 말하고 나가야 한다. 동시녹음 기사가 음악 사운드와 대사가 겹치니 나중에 대사는 녹음해야 한다고 하는데 감독님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시더라.

김민희_정말 그런 게 너무 좋은 거다. 음악이 들리는 데서 대사를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완전히 다르다. 배우로서 연기하는 게 완전히 달라지는 지점이다.

정재영_목소리 톤부터 시작해서 볼륨이 달라진다.

김민희_우리 목소리는 크면 안 되고….

정재영_그렇다고 배우들의 목소리가 들리게 음악을 확 낮춰버리면 또 사실감이 살지 않는다.

김민희

김민희_횟집 장면에서 술 마시는 장면도 그렇다. 실제로 술을 마시면서 촬영을 하니 확실히 느낌이 다르더라. 술에 취한 표정이나 꼬인 발음 같은 걸 연기로 만들려고 하면 그게 그렇게 어색하고 잘 살지 않는다. 그런데 진짜 술을 마시면서 찍으니 억지로 하지 않아도 그 분위기가 나오더라. 다음에는 다른 작품 촬영할 때도 술 마시는 장면이 있으면 마시면서 해야겠다. (웃음)

정재영_술을 안 먹고 술에 취한 연기를 하는 건 정말 어렵다. 술을 마실 때 안 취한 척하는 연기는 엄청난 디테일이 필요한 연기다. 그걸 억지로 연기로 하려고 하면 보는 사람도 괴롭다. 감독님의 영화에서는 정말 직접 술을 다 마시니 그런 부분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횟집 장면에서도 엄청 마셨는데, 보니까 조금만 더 마셨으면 정말 못 일어났을 것 같다. (웃음)

“<우리 선희> 때 입은 10년 전 청바지를 다시 또 입었다”

김민희_사람들이 내 이미지를 보고 항상 내가 외적인 부분에 굉장히 까다로울 거라고 생각하는데 막상 나는 정말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배우가 연기할 때는 그런 거에 대해서는 정말 생각을 안 하게 된다. 감독님과 작업하면서 외적인 것, 화려한 것에서 벗어나 연기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는 것도 좋은 부분이었다.

정재영_감독님은 원래 배우들이 평소 입는 옷을 준비해오라고 하시는데 민희가 처음 가져온 옷이 다 ‘빠꾸’를 당했다. (웃음) 그중에 정해서 화실에 내려갔는데, 마침 원래 화실 주인의 옷이 있더라. 감독님이 준비해온 옷 대신 그걸 입으라고 하는데. 아무리 리얼한 걸 추구한다고 해도 여배우한테 화실에 걸린 남의 옷을 입으라고 하니 심하다 싶었다. 나라도, 이걸 입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 거 같은데 민희가 그걸 아무렇지 않게 입었다.

김민희_패딩이 있냐고 하시더라. 그런 느낌이 드는 야상을 골라갔는데 너무 패셔너블해서 탈락했다. 감독님은 실용적인 옷을 원하시더라. 디테일이 조금이라도 있는 옷들은 싫어하시고 기본적인 옷들을 고르시더라. 화실에 있는 그 보라색 패딩을 입히고 감독님이 엄청 좋아하셨다. 윤희정과 잘 맞는다고. ‘이걸 입으라고요?’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입었을 때 맘에 든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지만, 중요한 건 다른 데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메이크업도 지우는 걸 요구하시는데 같은 맥락이다. 결국 배우가 연기 이외의 다른 것에는 신경 쓰지 않도록 만드시는 과정인 것 같다. 감독님과 작업하면서 감독님이 배우에게 다른 걸 더 보게 하고 배우가 더 빛이 나게 해주시는구나, 그런 걸 찾아주시는구나 싶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재영_믿기지 않겠지만 오히려 내가 민희보다 옷을 많이 가져갔다. 그런데도 너무 다 안 어울리더라. 다 후줄근했다. 내가 워낙 옷이 없다. 결국엔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다 탈락해서 <우리 선희> 때 입은 10년 전 청바지를 다시 또 입었다. 안에 입은 옷은 감독님 옷이었고. 머리도 스타일링 같은 걸 전혀 안 한다. 워낙 자연스럽게 하는 걸 원하시고 나도 그렇게 했는데, 나중에 화면을 보니 이건 해도해도 너무하더라. 자다가 일어나서 나가는 장면에서도 그냥 부스스 나가고 그 상태로 계속 촬영을 하니 머리가 다 제멋대로 널려 있는 거다. 내가 봐도 이번엔 정말 심했다. (웃음)

김민희_이번 현장이 처음엔 엄청 낯설었는데, 이렇게 겪고 나니 원래 다른 현장에서 해온 방식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진다. 컷이 나뉘지 않고 롱테이크로 가니 감정을 다 쏟아서 푹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컷이 나뉘면 아무래도 감정을 다시 만들어서 시작해야 하는데, 그냥 감정대로 쌓아가며 그 감정을 가져가는 게 배우들한테는 좋다. 연극을 한번도 안 해봤는데 아마 이런 비슷한 기분이 들지 않을까. ‘척’할 수 없는, 그래서 자신이 노출될 수밖에 없는 작업이었다. 나에게는 정말 도움이 많이 됐다. 감독님 작품을 하면서 배우로서 용기를 얻었다.

정재영_감독님의 연출이 다른 지점은 ‘리얼하게 보여야 하니 머리를 하지 마라’ 이런 주문을 하지 않으신다는 거다. 가장 중요한 걸 따라가다 보면 오히려 그외의 것들은 자연스럽게 다 필요 없게 된다. 보통 영화 하면 프리 프로덕션 때 헤어, 분장, 특수분장 분석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홍상수 감독님과 작업을 하면 내용도 모르고 캐릭터도 모르고 메이크업도 안 하고 무방비 상태로 임하게 된다. 대신 중요한 건 배우가 상대방에 대해서 집중하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것이다. 감독님이 이번 영화 하면서 주문하신 게 있다. “민희를 봐라. 되게 많이 봐라.” 감독님 작품에 워낙 롱테이크가 많아서 집중을 하려고 항상 노력한다. 민희의 눈을 긴 시간 동안 굉장히 집중해서 봐야 한다. 올곧이 윤희정이라는 여자가 하는 말을 들어야 한다. 어느 작품에서도 상대배우에게 그렇게까지 한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화를 할 때도 그렇게까지 상대를 면밀하게 관찰하지는 않지 않나. 이런 방식은 딴 데로 새거나 집중도가 흐트러지지 않는 경험을 하게 해준다. 그런데 배우에게 이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김민희_감독님과 작업하면서 그 부분이 나도 크게 다가왔다. 대본으로만 볼 때와 슛 들어가서 직접 연기를 할 때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재영 선배뿐만 아니라 나도 선배를 바라보게 된다. 상대방이 집중하고 어떤 행동을 하면 당연히 리액션도 달라지게 되는 거다. 그걸 놓치지 않고 따라가다 보면, 그 행동 안에서 예기치 않았는데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들이 생긴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캐릭터가 풍성해지게 되는 것 같다.

정재영_홍상수 감독님과 작업하면서 정말 많이 배우고 있다. <우리 선희>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는 그런 가르침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배우로서 그간 의심했던 부분들, 연기자로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자꾸 조금씩 잊어버리게 되고 나태해지게 되는데, 감독님과 한번 작업을 하게 되면 진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뭔지 곱씹어보게 된다. 다른 작품 할 때도 이런 고민들이 반영되고 연기가 편해진다. 무서워하지 않게 된다. 쫄지 않게 된다. 연기자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진짜 중요한 걸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감독님이 용기가 있고 깡이 있고 어디에도 쫄지 않는 분이라 그걸 지켜보며 함께하는 배우들도 용기를 얻게 된다. 최선을 다해서 절실하게 노력한다. 가장 중요한 기본을 알게 해주는 작업이다. 그러니 감독님이 다음 작품 할 수 있겠냐고 물으면, 무조건 두말 않고 하는 거지.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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