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people] 현실을 더욱 현실답게 보여주는 기술
2015-10-15
글 : 송경원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시각효과 감독 겸 프로듀서 토머스 호튼

시각효과(VFX) 하면 떠오르는 영화들이 있다. 사람들의 뇌리에 특수효과는 아직 <쥬라기 공원>(1993)의 충격과 <아바타>(2009)의 경이로움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산업은 찍는 영화에서 그리는 영화로 넘어간 지 오래다. CG는 그간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걸 보여주는 차원을 넘어 현실을 좀더 정교하고 경제적으로 구현하는 유용한 도구로 자리잡았다. 세계적인 시각효과 감독 중 한 사람인 토머스 호튼이 부산국제영화제와 미국영화협회(Motion Picture Association, 이하 MPA)가 공동 주최하는 제4회 BIFF-MPA 필름 워크숍의 강연과 멘토링을 위해 부산을 찾았다. MPA는 해마다 여러 전문가를 초빙해 영화학도에게 교육의 기회를, 실무진에겐 교류의 장을 제공하고 있다. 올해 초청자 중 한 사람인 토머스 호튼은 <킹스 스피치>(2010)의 시각효과를 담당했고 TV드라마 <다빈치 디몬스>로 왕립텔레비전협회상 최고 특수효과상을 수상한 시각효과 전문가다. 전세계를 누빈 그의 경력보다 눈에 띄는 건 그가 작업한 영화들이 지향하는 시각효과의 색깔이다. 상상도 하지 못할 것들을 보여주는 대신 현실을 좀더 현실적으로 다듬어온 토머스 호튼의 작업은 시각효과 분야가 진정으로 나아갈 바를 알려준다. 한국 학생들의 진지한 태도에 도리어 자극을 받고 간다는 그에게 시각효과 분야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에 대해 물었다.

-시각효과 분야에만 25년 가까이 몸담았다. 일을 시작한 계기는.

=아버지가 엔지니어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공학도의 길을 걸었다. 한때는 순수수학에 열광했지만 실제 삶에 적용할 수 없다는 점이 늘 불만스러웠다. 어느 날 토머스 하디의 소설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를 읽고서 크게 감명받고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 창의적인 작업이란 걸 깨달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학교의 방송 스튜디오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다시 태어났다. 시각효과가 내가 가진 공학적인 기술과 스토리텔링에 대한 창의성을 융합할 수 있는 분야라고 확신하고 시각효과 분야에 뛰어들었다.

-<코난: 암흑의 시대>(2011), <락 오브 에이지>(2012), <지.아이.조2>(2013) 등 여러 영화를 작업했지만 아무래도 눈길이 가는 건 <킹스 스피치>다.

=방송사, 광고대행사의 시각효과, 뮤직비디오 감독, 홍보 담당 프로듀서, TV시리즈 총괄 제작을 맡아 편집까지 다양한 경력을 거쳤다. 영화에 인연이 닿은 건 40대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몇년 뒤 <킹스 스피치> 시각효과감독과 프로듀싱을 맡아 아카데미 트로피를 손에 쥐는 영광을 얻었다. <킹스 스피치>에 시각효과가 많이 사용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어떤 영화보다 세밀한 시각효과가 활용된 영화다.

-시각효과라고 하면 판타지나 액션 블록버스터 연상된다. 실화이자 드라마인 <킹스 스피치>에서는 어떤 역할을 맡았나.

=실화를 재현하는 작업이다. 1930년대 영국의 역사적인 풍경을 되살리기 위해서 상당한 CG가 사용됐다. 요즘 건물의 창틀은 대부분 흰색인 데 반해 당시에는 검은색 창틀이 많았다. 고증을 거쳐 당시의 어둡고 무거우며 조금은 지저분한 느낌의 도시를 구현했다. 세트로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CG가 좀더 경제적이고 때로는 훨씬 사실적이다. 예컨대 보도 블록을 일부러 더럽게 하거나 아침의 공원에 안개를 까는 등 일상적인 디테일들은 특별한 기술을 통해 채워진다. 리젠트 파크에서 스피치를 하는 오프닝이나 대관식 등 방대한 로토스코핑 작업을 했던 장면들은 특히 공이 많이 들어가서 그런지 지금 봐도 자랑스럽다. (웃음)

-한국영화 중에서 시각효과가 인상적인 영화가 있었나.

=올해 멘토링을 함께한 김한민 감독의 <명량>(2014)을 보고 놀랐다. 물, 불, 바람, 안개 등은 가장 구현하기 어려운 작업 중 하나다. 시각효과 입장에서 피하고 싶은 장면들을 거리낌 없이 다 살려낸 용기와 수준 높은 표현력에 박수를 보낸다. CG인 것을 모를 만큼 자연스럽게 자연물을 구현하는 것이야말로 시각효과의 정수다. 오랜 습관 중 하나가 자연현상을 관찰하는 일이다. 어디를 가든 실제 자연에서 일어나는 패턴들을 사진으로 찍어둔다. 이런 습관과 스토리에 대한 열망, 그리고 전자공학적인 기초가 결합해 효과적인 결과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시각효과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게 이 분야에 도전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알려준다면.

=우선 세상을 감각하는 눈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감각을 숫자로 풀어내는 것에 흥미를 느껴야 한다. 두 가지를 융합하는 복합적인 작업 수행 기술은 그다음이다. 물론 기술적인 부분도 중요하다. 다만 내 경우엔 창의성과 스토리에 대한 열망이 먼저였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기술이 그다음이었다.

-전세계적으로 시각효과 분야의 전망이 밝다고 보는가.

=물론이다. 시각효과는 이미 많은 영상 제작의 기반이 되었다. 그런데도 인력은 늘 부족하다. 사실 영국에서도 시각효과는 영화지망생들이 그리 선호하는 분야는 아니다. 다들 감독이나 작가가 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좋은 인력을 키워내는 데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그건 일반 영화학도들에게 이 분야가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최고의 전문성이 필요한 일이고 수입도 나쁘지 않으며 분야도 세분화되어 있다. 공학적인 사고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창의성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다.

-국내에서도 점차 시각효과 전문 업체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아직 부족하다.

=한국은 이번에 처음 방문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한국영화와 영화인들에게서 받은 인상은 현상을 파악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IT 기술 등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 앞선다고 알고 있다. 창의력과 기술력, 이만큼 양쪽 조건을 잘 갖추고 있는 나라도 드물다. 단적으로 호주 영화산업과 비교해도 장르적 다양성과 표현력에서 한국이 훨씬 앞서 있다는 느낌이다. 단순히 CG 기술력만 봐도 그런 것 같다. 가르치는 입장이 아니라 함께 교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국 학생들의 반응은 어땠나. 직접 만나서 가르쳐본 소감은.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집중력 있고 영화를 대하는 태도가 진지하다. 가령 대개의 학생 작품들은 상업영화를 흉내내거나 틀을 빌려오는 데 그친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는 경우는 흔치 않다. 반면 한국 참가자들은 대중에게 어필하기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솔직한 자기감정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업들이 많아 단편임에도 깊이가 있었다. 이렇게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고민하는 젊은 영화인들을 만나 감명을 받았다. 마치 내가 영상업계에 갓 입문했을 때를 보는 듯해 뿌듯하고 부러웠다. (웃음)

-연출 경험도 있으며 현재 드라마 <다빈치 디몬스>의 제작자도 겸하고 있다. 감독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

=나는 비주얼텔러이고 스스로 좋은 VFX 감독이라고 생각하지만 연출자는 아니다. 두 역할이 요구하는 재능은 다른 영역이다. 예전에 연출 경험을 떠올려보면 현장의 모든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중압감이 썩 즐겁진 않았다. 감독이 전체를 조율하는 일을 한다면 VFX는 디테일에 목숨을 건다. 다만 좋은 VFX 감독은 자신의 작업이 꼭 필요한 장면인지 반문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을 위해 작업을 하는 게 아니라 영화를 위해 기술을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그것만 기억한다면 기술을 꿰뚫고 있는 만큼 영화를 위한 가장 좋은 조언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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