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는 감각보다 이성을 작동시키는 질문이다. 동기나 결과가 이성보다 감각에 호소하는 것일 때, 왜라는 질문은 설 자리를 잃는다. <맨 온 와이어>(2008)에서 세계무역센터 건물 위를 외줄로 건너는 일에 대해 제기된 ‘왜’라는 질문은 무력하다. 곡예사 필리프 프티는 ‘이유는 없다’는 말로 일단 자신의 행위를 보고, 느낄 것을 호소한다. <맨 온 와이어>는 한계와 아이디어, 기술이 만나 예술이 된 경우다. 한계에 도전하는 것은 인간의 감각적 본성이다. 한계가 곧 도전의 이유다. <에베레스트>(2015)에서도 이와 비슷한 문답이 등장한다. ‘왜 산에 가느냐’는 누군가의 물음에 등반가들은 ‘산이 거기 있으니까’라고 답한다. <맨 온 와이어>는 주인공의 노력과 줄타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면서 왜 그의 행위에 이유가 필요 없는지를 납득시킨다. 그러나 <에베레스트>는 질문이 빠진 자리에 마땅히 보여줘야 할 것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상황과 사운드의 힘으로 한계를 넘다
등반가들에게 <에베레스트>는 어떤 한계치다. 그러나 영화 역시 에베레스트를 한계치로 설정하고 있는가는 의문이다. 영화가 에베레스트를 한계치로 설정했다면 등반의 어려움을 ‘영화적으로’ 강조했어야 한다. 산의 높이감이나 과정의 험난함을 강조하면 등반의 어려움을 쉽게 실감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는 미지의 공간에 가까운 에베레스트가 얼마나 도달하기 어려운 산인가를 보여주는 데 이상할 정도로 무심하다. 가파른 공간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중심이 된다고 보기 어렵다. 이따금 산의 시선을 보여주듯 카메라가 정상 부근에서 산을 오르는 인물들까지 조망하는 장면에서도 화창한 기상 상태와 광각, 카메라 무빙의 부드러운 속도감과 맞물려 위용보다는 온화함이 상대적으로 강조된다.
<에베레스트>에서 두드러진 공간성은 수직적이기보다는 차라리 수평적이다. 에베레스트 정상이라는 상징적인 공간을 제외하면 영화에서 가장 주된 공간은 에베레스트 평지에 마련된 베이스캠프다. 베이스캠프는 등반가들이 산에 오르기 위해 모였다가 흩어지는 공간이며, 날씨를 예측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공간이다. 베이스캠프가 영화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롭(제이슨 클라크)의 등반대 대부분이 조난사고를 당하는 최대 위기의 순간에도 영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베이스캠프의 초조함과 무력함을 조난당한 이의 심경과 나란히 둔다. 정상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최초의 위기가 크레바스에 수평으로 놓인 사다리에서 발생한다는 점도 상징적이다. 아무리 높은 산도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수직의 산 역시 땅과 연결된 공간이라는 점을 영화는 강조하는 듯 보인다.
에베레스트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이례적인 수평성을 택한 것은 영화 속 등반대가 상업 등반대라는 것과 모종의 관련성을 지닌다. 선택된 일부만 갈 수 있는 곳에서, 돈을 지불하면 누구나 정복할 수 있는 공간으로 평준화된 90년대의 시대상이 산의 수평성으로 드러난다. 이와 함께 산이 차지했던 아우라가 반감되며, 정상에 도달했다는 쾌감 역시 줄어든다. 정상에 국기를 꽂은 뒤 눈물을 흘리는 등반가나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이번에는 꼭 정상을 밝고 싶다고 말하는 이의 간절함에 관객이 공감하기란 어렵다. 그들의 도전이 고귀한 인간 정신의 표현이기보다는 개인적인 성과 정도로 축소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관객이 등반대에 감정이입할 극적 장치를 사실상 거의 마련해주지 않는다. 물론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본래 어떤 인물이었는가를 삽입하지 않기로 한 것은 선택으로 보인다.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목적을 지녔는가로 그들의 행위와 그 결과를 판단하는 것에 대한 경계가 여기에서 묻어난다. 등반대는 끈끈한 동료애로 뭉친 집단이 아니라, 상업 등반을 위해 일시적으로 뭉친 이들일 뿐이다. 따라서 산악영화에서 강조되기 마련인 휴먼 드라마가 들어설 곳은 없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재난의 광경도 블록버스터영화에 비한다면 실감나게 시각화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감정이입도, 재난의 스펙터클도 사라진 자리에 화면 가득 채워지는 것은 등반대의 거친 숨소리다. 영화에서 이따금 표시되는 에베레스트의 고도보다 관객에게 높이를 더 실감하게 하는 것은 등반가들의 가쁜 숨소리다. 그리고 이 숨소리는 에베레스트에 실재감을 불어넣는 거의 유일한 표지다.
숨소리로 공간에 존재를 불어넣는다는 점에서 <에베레스트>는 다른 산악영화보다 우주를 탐사하는 종류의 SF영화들과 깊이 관련돼 보인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이따금 카메라가 보여주는 우주의 조망도보다 더 우주를 실감하게 하는 것은 헬멧 속 인물들의 거친 숨소리다. <그래비티>가 관객에게 실제에 가까운 실감을 안겼던 것은 컷 없이 유영하는 카메라의 속도감과 3D로 강조된 우주의 공허한 공간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숨소리를 통해 전해지는 인간의 선명한 존재감에 있다. 숨소리는 신기루 같은 존재를 스크린을 통해 감각하게 하는 표식이다. 미지의 공간을 인간의 존재감으로 채운다는 점에서는 폐소공포증을 유발하는 <베리드>와도 유사하다. 이유도 모른 채 납치돼 관 속에 든 채 산 채로 묻힌 남자가 휴대전화로 구조를 요청하는 것만으로 능히 90여분을 버텨낸다. 이 영화는 특정한 상황과 사운드의 힘으로 시각적, 공간적 한계를 채워나간 경우다.
인간의 도전이 산의 의미를 어떻게 만들어내는가
그러나 숨소리가 환기하는 존재감이 이 영화만의 개성은 아니며, 이 영화가 유일하게 승부를 걸고 있는 지점도 아니다. 존재의 뚜렷한 감각과 함께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영원한 기다림의 장소로서의 에베레스트다. 등반대 중 가족의 존재가 직접 등장하는 인물은 오직 롭과 벡(조시 브롤린)뿐이다. 가장 드라마틱한 반전을 이루는 인물은 생존자 벡이지만, 등정대의 리더 롭의 사연은 원정대의 이야기와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되는 유일한 드라마라는 점에서 중요해 보인다. 임신한 아내가 롭을 기다린다는 설정은 처음부터 강조되며, 기다림의 정조는 끝까지 이어진다. 조난 사고를 당한 롭이 무전기를 통해 아내와 가까스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인상적인 것은 통화를 끝낸 아내가 조난당한 채 웅크린 롭과 똑같은 자세로 웅크려 모로 누울 때다. 구조에 대한 기다림과 조난자의 귀환에 대한 기다림이라는 두개의 기다림이 부부의 육신을 빌려 같은 자세로 포개진다. 그러나 이 기다림이 꼭 무력함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영화는 에베레스트 어딘가에 반쯤은 눈에 싸여 웅크린 사람들의 모습을 조망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이들은 과욕을 부리다가 저주받은 자들이기보다 차라리 산속에 포근하게 잠든 것처럼 보인다.
<에베레스트>는 산을 인간의 도전에 의미를 만들어주는 도구로 이용하기보다는 다양한 인간의 도전이 산의 의미를 어떻게 만들어내는가에 주목한다. 영화는 산의 위대함을 등에 업고 평범한 소시민이 영웅으로 탄생하는 과정을 그린 것도, 자연의 무서움을 통해 인간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아니다. 그저 산에서 실종돼 여전히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들, 실종된 가족을 기다리는 사람들, 실종된 동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에베레스트를 구성하는 구성체임을 영화는 보여줄 뿐이다. 앞서 말한 ‘산이 거기 있으니까’의 의미는 ‘산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까’라는 뜻도 된다. 그것은 정복욕을 드러낸 말이라기보다는 조난당한 이들의 오랜 기다림이 또 다른 도전자를 기다린다는 의미도 된다. 도전과 실패의 역사를 통해 에베레스트는 기다림의 응축물이 되었다. 영화 <에베레스트>가 흐릿해진 고도 위에 세운 것은 영원한 기다림이라는 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