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슬로우 비디오> 2013 <결혼전야> <끝과 시작> 2012 <어떤 시선> <내 아내의 모든 것> <무서운 이야기> 2011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2009 <오감도> 2008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2007 <열세살, 수아>
<서부전선>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을 하나 꼽으라면 탱크의 내부다. 단순 소품과 배경 이상의 역할을 담당하는 이 탱크는 촬영을 위해 특수 제작됐다. 사실 탱크의 외형이 특별할 건 없다. 반면 탱크 내부는 영화적 공간으로 창조됐다. 전경란 미술감독은 “<퓨리>에 질 순 없다”는 마음으로, 세트팀, 특수소품팀과 머리를 맞대 탱크 내부 세트를 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차 부대 이야기를 그린 <퓨리>(2014)의 사실적 미술이 전쟁의 공포를 극대화했다면 <서부전선>의 미술은 좀더 감성적 접근을 시도한다. 비좁은 탱크 안 공간이 인물의 전사며 한국전쟁 당시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들려주는 것은 물론이고 이야기에 어떤 정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탱크라는 무기가 주는 거대하고 압도적인 느낌이 있지만, 안으로 들어오면 부대원들의 손때가 오래 묻은 온기가 도는 생활공간으로 느껴지길 바랐다.” 사실성 또한 포기할 수 없었기에 실제 탱크 내부와 비슷한 사이즈로, 철골 구조물을 세워가며 세트를 지었다. 포탑 역시 FRP(Fiber Reinforced Plastics)로 모형을 뜨지 않고, 세트팀의 요구대로 쇳덩이를 용접해 만들었다. “처음엔 다들 바보 같은 작업 아니냐고 했지만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포탑이 돌 때의 무게감이나 쇳덩이가 스르릉 거리는 소리와 느낌이 잘 살았던 것 같다.”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내 아내의 모든 것> <슬로우 비디오> 등 드라마 장르의 영화를 주로 해 온 전경란 미술감독에게 <서부전선>은 첫 전쟁영화다.
전경란 미술감독은 영화가 아니라 무대디자인으로 경력을 시작했다. 문화예술진흥원의 공연예술아카데미에서 1년간 무대미술의 세계를 접했고, “큰 무대 하면 오페라, 오페라 하면 이탈리아”라는 단순한 연상작용으로 이탈리아 유학길에 올랐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무대미술을 공부하고 돌아와서도 대학로를 일터로 삼았다. 그러던 차에 공연예술아카데미에서 만난 김희정 감독의 제안을 받아 <열세살, 수아>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영화가 이렇게 어려울 줄 모르고 시작”했지만 “긴 시간 한 작품에 땀과 애정을 쏟았을 때 돌아오는 희열이 너무도 커서 지금까지 영화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좋은 영화미술에 대한 생각도 분명히 정립되어 있었다. “영화에서 미술이 말을 하기 시작하면 불편해진다. 좋은 영화미술은 영화에 편안하게 밀착돼야 한다. 절제하고 자제해도 미술감독의 색깔은 은연중에 드러나게 되어 있다.” 전쟁영화의 공식을 슬쩍 비껴가면서도 스토리에 충실한 미술을 선보인 <서부전선>에서 드러나듯, 전경란 미술감독은 절제의 미덕을 아는 이였다.
좋은 수첩과 펜
“디지털 세대가 아니라 아날로그 세대여서인지 항상 새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좋은 수첩과 펜을 준비한다.” 값비싼 수첩과 펜이 아니라 그 시기 마음에 꼭 드는 수첩과 펜을 고른다. 그렇게 정한 수첩의 첫장엔 ‘<서부전선> 0000년 0월0일’처럼 작품의 제목과 날짜를 적는다. 수첩엔 그림을 그리기보다 메모하는 일이 더 많다고. 종이에 닿는 펜의 질감을 좋아하고, 손 쓰는 일 자체를 즐기기에 수첩과 펜은 전경란 미술감독의 작업 필수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