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김지미의 영화비평] ‘서부’는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2015-10-22
글 : 김지미 (영화평론가)
<더 홈즈맨>, 서부의 전설 이면에 묻혀 있던 여성들의 고통과 죽음
<더 홈즈맨>

토머스 샤츠는 <할리우드 장르의 구조>에서 서부극은 자신들이 옹호하는 농민들의 생활방식에 말로만 경의를 표한다며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할리우드 버전의 옛 서부는 역사와 관련이 없듯 농사와도 거의 관련이 없다. 비록 전원적 가치관과는 많은 관련이 있을지라도 말이다.” 토미 리 존스의 영화는 서부극들이 지워버린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더 홈즈맨> 속의 서부는 척박한 농토이며, 주인공들은 농부이다. 그들이 사는 곳엔 이상적인 공동체로서의 마을도 없고, 타파해야 할 제도나 부패한 관료 혹은, 타락한 자본가조차 없다. 그들에게 가장 혹독한 적은 자신들을 둘러싼 자연이다. 이 작품의 갈등은 ‘선/악’ 같은 인위적인 이념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자연과 문명이라는 원초적인 대립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그 투쟁의 결말에는 전통적인 내러티브가 선사해왔던 영웅적인 승리 대신에 생존과 소멸 같은,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 존재한다.

세 여자가 서부에서 언어를 상실한 이유

이 영화는 그 대결 과정에서 버텨내지 못하고 이성을 상실하게 된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재생산’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서부로 시집을 온 아라벨라는 혹독한 겨울을 보내며 세명의 아이들을 디프테리아로 잃었다. 그녀는 그 충격으로 정신을 놓았고, 자신이 잃은 아이들을 대신해 헝겊 인형을 부여잡았다. 테올라인은 자기가 낳은 아이를 변기통에 빠뜨려 죽였고, 남은 두딸을 보살피지 못했다. 스벤슨은 아이를 낳아달라며 강간하는, 자신을 씨 뿌리는 농토쯤으로 여기는 남편의 요구를 이행하지 못했다. 이것은 그들을 내쫓은 ‘서부’라는 공간이 여성의 가치를 노동력의 재생산이라는 효용성에만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카자 실버맨은 고전적 할리우드영화에서 육체에 밀착되어 있고 육체적인 볼거리에 매여 있는(사운드와 이미지의 동시성이라는 규칙을 준수하는) 여성적 목소리는 ‘울부짖고, 헐떡거리고, 비명을 지르는 소리’로 제시된다고 지적했다. 그녀들의 목소리는 대체로 ‘서사적 권위’를 획득하지 못하고 ‘신뢰할 수 없고, 좌절되거나 순종적인’ 특징을 갖는다. 고전적 할리우드영화에서 그것이 여성적 목소리의 특징으로 강제되었다면, <더 홈즈맨>은 그같은 목소리들이 실제로 어떤 과정을 통해 양산되었는지를 밝혀준다. 커디가 이송하는 세 명의 여성은 끊임없이 울부짖고, 때로는 아이처럼 해맑게 인사를 하고,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린다. 영화는 플래시백을 통해 그녀들이 목소리를 잃게 되는 과정을 간명하게 보여준다. 그녀들이 자연환경과 가족 구성원에 의해 겪은 고통은 철저하게 무시되거나 폭력적으로 억압되었다.

남편들은 그녀들이 더이상 보살핌이나 성적 만족을 줄 수 없다는, 그녀들의 기능 상실에 주목할 뿐 왜 그녀들이 그런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지에는 무관심하다. 아라벨라의 어린 남편은 떠나가는 아내를 향해 ‘나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아’라며 원망어린 절규를 퍼붓는다. 테올라인의 남편은 자신이 농사일과 아이들 때문에 너무 바쁘고 ‘정신 나간 아내를 변기통에 처박고 싶을 뿐’이라며 이송 작업에도 발을 빼버린다. 스벤슨의 남편은 어머니를 여읜 아내의 고통이나 어머니와 함께 있는 침상에서마저 강간당해야 하는 아내의 수치심엔 관심조차 없다.

여성의 언어는 이성적인 메시지뿐 아니라 감성적인 충족을 지향한다. 크리스테바나 이리가라이 같은 페미니스트 언어학자들이 지적한 ‘시적 언어’, ‘코라’(chora) 등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여성들의 언어가 의사전달 기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 감정의 교류와 순화, 특히 ‘보살핌’이라는 정서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아마도 남성들이 여성의 언어를 수수께끼보다 더 당황스러워하는 이유도 이런 특징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서부는 이런 종류의 언어 소통이 불가능한 공간이다. 생존을 위한 기능적 언어가 지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세 여자가 그곳에서 언어를 상실한 것은 아마도 그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소통 체계를 구성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그녀들의 언어는 적합한 수신자를 찾지 못하고 허공을 헤매다가 이성의 영역을 벗어나 비명과 울음, 혼잣말로 치환되었다.

서부에서 생존 가능한 ‘여성성’이란?

커디는 남성을 능가하는 행동력을 갖췄지만 여성의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자이기도 했다. 그녀가 골무에 물을 채워 아라벨라의 인형에게 먹여주는 장면에서 아라벨라는 처음으로 타인과 눈을 맞춘다. 커디가 테올라인의 두딸들에게 어머니를 씻기며 노래를 불러주라고 하는 장면은 그녀가 더이상 언어적 소통이 불가능해진 어머니와 딸들이 어떻게 하면 감정을 교류하고 서로를 치유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 커디는 세 여자들의 고통을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장 두려워한 인물이기도 했다. 왜건 뒤에서 징징대는 스벤슨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커디가 극도의 고통을 호소하며 소리를 멈춰달라고 간청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커디와 나란히 앉은 브릭스가 스벤슨의 울음소리를 태연하게 넘기는 것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그 울음은 아마도 척박한 현실을 포기함으로써 얻게 될 안온함을 상기시키기에 자신까지도 소멸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직감했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에게 너무나 매혹적인 동시에 파괴적인 세이렌의 노래와도 같을 것이다.

처음에 커디는 두 언어(남성/여성, 서부/문명) 사이에 균형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그녀는 목사에 의해 ‘훌륭한 시민’이라고 칭송받을 만큼 모범적으로 적응했다. 하지만 그 적응 과정에서 남성들이 환상적으로 욕망하는 ‘여성성’은 소거되어갔다. 커디의 예의바른 청혼에 대한 밥의 거절, ‘너무 잘난 척하고(bossy), 매력이 없다’는 다른 말로 하면 그녀가 지나치게 ‘남성적’이라는 뜻일 것이다. 혼자서 농장을 꾸려가고 마을의 어떤 남자들보다 말도 잘 타고, 총까지 잘 쏘는 커디는 당대의 문명화된 ‘여성성’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여기에 이 마을 남자들의 딜레마가 있다. 그들은 ‘동부’의 여성성을 유지하면서도 척박한 ‘서부’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그러나 결코 남성을 압도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과 육체를 갖춘 여성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밥의 거절은 커디에게 자신이 믿어왔던 방식이 서부에서 생존 가능한 ‘여성’의 것은 아닐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야기했다. 그녀가 버려진 묘지에 집착했던 것은 스스로의 ‘죽음’, 단순히 자신의 소멸이 아니라 번식을 통한 개체적 연속성을 이어나갈 수 없으리라는 것에 대한 공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브릭스의 거절은 낭떠러지에 선 그녀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역할을 하고 말았다. 커디를 대신해 세 여성을 이끌고 아이오와에 당도한 브릭스는 목사 부인의 여성성에서 어떤 결핍을 발견한다. 목사 부인은 세 여자들의 고통의 실체에 대해 듣는 것을 상냥하고 고상하게 거절했기 때문이다. 브릭스는 그제야 강인함과 진실됨 그리고 보살핌의 언어를 동시에 구사했던 커디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어린 소녀에게 청혼하면서 농담처럼 던진 브릭스의 충고는 커디가 너무 일찍, 자신과 맞지 않는 세상에서 살다갔음을 암시한다. 커디의 묘비는 부주의한 발길에 의해 강물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지만 그녀를 통해 ‘서부’의 전설 이면에 오랫동안 묻혀 있던 여성들의 고통과 죽음은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되었다. 카우보이들의 총소리에 잊혀져왔던 서부 여성들의 역사는 메리 비 커디가 구원한 세 여성과 그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새롭게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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