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동기가 아닌 태도의 문제
2015-11-03
글 : 박수민 (영화감독)
<언브레이커블> <스파이더맨2>, 슈퍼히어로의 숭고함에 대한 일반인의 감각
<스파이더맨2>

<간츠>의 만화가 오쿠 히로야의 신작 <이누야시키>(오경화 역, 대원씨아이 펴냄)는 외계인에 의해 육체를 로봇으로 바꿔치기 당한 노인과 소년의 이야기다. 가공할 외계 기술이 집약된 기계 육체는 둘에게서 ‘인간’을 빼앗아간 대신에 ‘신’에 가까운 능력을 준다. 노인 이누야시키는 자신의 가공할 능력을 자각하자 이를 약자를 돕는 일에 사용하려 하지만, 소년 히로는 충동적으로 남용한다. 결국 선과 악으로 대립하게 될 둘의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따라가던 단행본 4권의 한 지점에서, 나는 예기치 못한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친구 히로의 악행을 막기 위해 이누야시키를 찾아낸 안도는 그가 불치병이나 암 환자들을 치유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기적을 행하는 이누야시키를 진정한 ‘히어로’라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안도. 병원을 몰래 빠져나오던 둘을 입구에서 기다리던 의료진 몇명이 가로막는다. 절대 비밀을 지키겠다는 그들은, 이 병원에 다른 난치 환자들도 많다며 둘을 다시 병원으로 데려간다. 어찌 보면 뻔한 이 에피소드가 덜컥 마음을 움직인 것은, 역시 내가 울컥하면서 봤던 두편의 슈퍼히어로영화가 전해준 감정을 다시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나의 영웅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거대한 프랜차이즈 장사에 대항해 ‘DC 확장 세계관’이 분투하는 지금은 슈퍼히어로에 열광하는 우리에게 더없이 행복한 볼거리로 충만한 시대다. 그러나 재미있는 영화들은 많아도, 정말로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며 위대한 영화 예술에 근접하는 작품은 몇편이나 될까? 거대한 음모에 맞서는 거창한 정의의 스케일이 세계구급으로 커질수록 히어로와 빌런들만 바글거릴 뿐, 인류의 존폐를 걸고 겨룬다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정작 인류는 보이지 않는다. 배경에 지나지 않는 일반 시민들은 관객과 같이 구경만 할 뿐이다.

‘히어로는 왜 악의 무리와 그 위협으로부터 일반인들을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도 이제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라는 유명한 문구만큼 뻔한, 이미 답한 내용으로 치부되어 플롯과 서사 바깥으로 미루어진다. 그러나 나는 모든 슈퍼히어로영화들은 반드시 이 질문에 대한 각자 히어로들의 대답을 매번 끈질기게 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동기’(motivation)가 아니라 ‘태도’(attitude)다. 예를 들어 부모가 범죄에 희생당했다는 원한은 개인의 내부적 동기이자 캐릭터의 설정일 뿐 목숨을 걸고 자경단 행위를 지속하는 것에 대한 명확한 신념이나 태도는 아니다. 그는 대체 왜 이 짓을 하는가? 그는 이 짓에서 정확히 무엇을 얻는가?

영웅에게 그의 태도를 묻는 것은 ‘초인’(超人)이 나오는 이야기의 쓸모가 단순히 모험담을 즐기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숭고함’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초인적 행위의 숭고함은 우리 범인(凡人)들은 물론, 초인 자신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해하기 싫더라도 지켜야 하는 최선에 가까운 것)이어야 한다. 한 인간이 자신이 아닌 다른 인간을 위해 희생하는 이야기는 사실 아주 고귀하고 어려운 주제다. 이기적인 인간은 생각만큼 숭고한 존재가 아니기에 그렇다.

<언브레이커블>

물론 그 태도를 명확하게 말하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영웅의 숭고함을 다루려는 영화에서, 일장연설은 지루하고 무엇보다 영화적이지 않다. 좋은 슈퍼히어로영화는 이 문제를 작품 전반의 딜레마로 놓고서 어느 지점에서 유려한 장면으로 ‘보여준다’. 지금 다루려는 두 작품, M. 나이트 샤말란의 <언브레이커블>(2000)과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2>(2004)는 그렇게 했다.

데이비드 던(브루스 윌리스)은 탑승자 131명이 사망한 열차 탈선 사고에서 어떤 상처도 입지 않은 채 혼자만 살아남는다. 대학 시절 촉망받던 미식축구선수였던 그는 자동차 사고로 꿈을 접었고,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어떤 슬픔을 느끼며 살아왔다. 그런 그에게 ‘한정판’(limited edition) 화랑을 운영하는 일라이자 프라이스(새뮤얼 L. 잭슨)가 나타나 데이비드의 생존에는 어떤 비범한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부서지지 않는 그의 육체는 영웅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언브레이커블>에서 마침내 자신의 소명을 자각한 데이비드가 아무도 모르게 최초의 영웅적 행동을 하고 돌아온 날 아침, 말없이 아들에게 지난밤의 일이 보도된 신문을 슬쩍 전하는 장면은 극장에서 처음 본 이래 매번 똑같이 울컥하는 장면이다. 하늘을 날고 도시를 박살내는 화려한 액션이나 환호하는 군중의 요란한 장면 없이 진정한 숭고함을 전달하는 장면. 두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채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던 소년의 눈망울이 마음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던 것은, 선한 의지에 대한 순수한 믿음이 영화에 분명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결말이 소년만화에서처럼 ‘우리의 싸움은 이제부터다!’라며 프랜차이즈를 욕망하는 결말이었다면 오히려 뻔한 반전에 대한 당시의 박한 평가는 덜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한편으로서의 완결성에 더 집중한 샤말란의 선택을 나 역시 선한 의지라 믿으며 늘 지지한다.

비밀을 지킬게요

<스파이더맨2>에선 우리의 가난한 10대 영웅 피터 파커(토비 맥과이어)의 삶이 더욱 곤경에 처한다. 자기 인생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스파이더맨 짓거리를 때려치우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피터는 삶의 유일한 위안인 사랑하는 메리 제인(커스틴 던스트)과의 관계마저 위태롭다. 개인의 작은 욕망과 사회의 커다란 정의가 완벽히 부딪히는 상황. 그래서 이 짓을 때려치우려 했던 피터가 악당이 된 은사 닥터 옥토퍼스(앨프리드 몰리나)를 추격하던 시퀀스에서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슈퍼히어로영화 사상 가장 위대한 기적의 순간을 만난다.

통제 불능이 된 전철을 세우기 위해 가면이 벗겨진 것도 모른 채 온 힘을 다하던 피터가 끝내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순간, 열차 안의 시민들이 그를 붙잡는다. 그의 육체를 손에서 손으로 조심스레 옮겨 바닥에 눕히자, 영웅의 민낯을 본 사람들은 놀란다. 자식보다도 어린 소년이 목숨을 걸고 도시를 지키는 영웅의 정체였던 것. 정신을 차린 피터가 맨 얼굴을 더듬으며 놀라는 순간, 스파이더맨 가면을 주워온 아이들이 말한다. 절대로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이 약속은 3편까지 완벽히 지켜졌다). 여태 배경이기만 했던 일반인들이 직접 그들의 행동과 의지로 영웅을 구원하고, 슈퍼히어로의 딜레마와 숭고함이 영화적 진실로 답해진 아름다운 장면이다. 나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매번 운다. 케이블TV에서 수십번을 방영할 때마다 똑같이.

히어로의 태도를 묻는 것은 곧 숭고함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찾는 일이다. 숭고함에 대한 일반인들의 감각이 모호하여 여론에 등 떠밀릴 때, 큰 권력에 대한 요상한 책임감으로 자신의 행위를 숭고하다 믿는 히어로의 탈을 쓴 빌런은 얼마든지 나타난다. 그런 거짓 영웅들은 단 하나의 정의, 단 하나의 진실을 강요하며 우리를 지켜주는 척 지배하려 든다. 문제는 이것이 영화 속 설정이나 배경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란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진짜 영웅과 가짜 영웅을 구별할 수는 있어야 한다. 게임 <메탈기어 솔리드V: 더 팬텀 페인>(2015) 속 대사를 빌리자면, “영웅을 이해하는 쪽에도 그만큼의 그릇이 필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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