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언증에 빠진 여자의 일상은 거짓말로 시작해 거짓말로 끝맺는다. 직장에서는 동료들에게 건실한 남자친구와 결혼을 약속했다고 말하고 백화점에 가서는 값비싼 가전제품을 주문한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부동산에 들러 고급 오피스텔을 살 것처럼 둘러본 다음 집에 돌아와 백화점 주문을 취소한다. 그녀는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사는 걸까.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파도 위를 걷는 삶. 이런 뻔뻔하고 또 빤한 인생은 어떻게 탄생하게 됐을까. 촬영 당시 만삭의 몸을 이끌고 현장을 누볐던 김동명 감독에게 영화의 출발점과 제작 과정에 대해 물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애초 출발했던 영화와 완성된 영화는 조금 달라 보였지만 감독 자신의 솔직한 성품이 그대로 드러난 영화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허언증에 빠져 거짓말을 하며 사는 여자 아영(김꽃비)의 이야기를 구상하게 된 계기는.
=첫 출발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가족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을 탈북자로 설정해 자본주의의 반대편에 있던 사람이 남쪽으로 내려와 거짓말을 하며 사는 이야기와 합쳐졌다. 실제로 탈북자를 만나 취재도 했었는데 그 시나리오가 잘 안 풀려서 탈북자 설정은 지우고 거짓말하며 사는 지금의 아영이 만들어졌다. 그러면서 자본주의의 작동장치 혹은 부속품 같은 캐릭터 아영이 탄생한 것이다.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지금보다 가족에 얽힌 이야기가 더 많았지만 쳐냈다. 거짓말이 사회구조 속에서 얽히고설키는 과정과 인물에 집중하게 됐다.
-영화 전체의 분위기나 방향에 대해 계획했던 점이 있나.
=촬영감독과 망원으로 고정해서 찍자고 이야기했었다. 존 카사베츠의 <영향 아래 있는 여자>(1974) 같은 영화를 공유하면서 작업하려고 했는데 실내 장면의 경우, 장소가 너무 협소해서 망원숏을 찍을 수 없어 들고 찍었다. 처음엔 뭔가 흔들리는, 불안한 느낌을 가져가려고 했었다. 영화의 톤은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2001)처럼 불안한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들을 참고하려고 했다. 현장에서는 잘 안 되더라. (웃음)
-배우 김꽃비가 연기하는 아영은 피부과 조무사로 일하면서 혼수로 외제차를 사려 한다는 등 어색한 거짓말을 일삼는다.
=우리 자신을 돌이켜보면 누구나 한번쯤 그런 기억이 있다. 거들먹거리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백화점을 가서 화장품을 하나 볼 때도 마치 되게 비싼 물건을 살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하지 않나? 상대가 나를 하대하지 못하게 막을 치고 있는 나 자신을 볼 때의 그런 느낌을 아영에 담고 싶었다. 특별하게 사기치고 다니거나 악독하지 않아도 거짓말이 일상처럼 보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꽃비씨의 연기 톤도 잘 맞았다고 생각한다. 현장에 가면 꽃비씨가 마치 거짓말 가면을 쓰고 준비 태세를 갖춘 듯한 인상을 받곤 했다. 구체적인 대화는 리허설 때 다 끝마쳤고 현장에서는 대부분 꽃비씨 혼자 만들어나갔다.
-그런데 아영은 또 의외로 치밀한 구석이 없다. 실수도 많아 거짓말이 빤히 드러나기도 한다.
=처음 <거짓말> 시나리오 들고 투자받으려고 할 때 대부분 이야기가 극적이지 않다, 누구든 죽어나가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들었는데 결국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였기 때문에 지금 정도 수준에서 풀고 싶었다. 극적인 영화였다면 거짓말 자체에 대한 거짓말이 작동하는 모습이 조명되지 않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아영이 현실에서 걷고 밥 먹고 생활하는 모습 속에서 거짓말이 스멀스멀 배어나오는 것이 중요했다. 배우들끼리는 허언증의 초기 단계쯤 되지 않을까 싶다며 이야기를 하곤 했다. 일반적인 허언증의 시작, 우리를 반영할 수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거짓말을 일삼던 아영의 후반부 심리 변화를 비롯해서 지금의 결말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기술적으로는 마치 지아장커의 <스틸 라이프>(2006)에서 건물이 날아가는 마지막 장면처럼 판타지 요소를 가미해 찍고 싶었다. 그런데 구현이 어렵더라. 아영의 거짓말이 계속 작동하면서 결국에는 어디로 갈 것인가를 고민했다. 외계로 가서까지 거짓말을 하며 살 수밖에 없는 여자를 그리고 싶었고 스토리상 끝까지 고수하고 싶었던 결말이다. 지금의 결말에 대해서는 보는 관객도 의견이 나뉠 것 같다.
-제목은 언제 정하게 됐나.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받기 직전까지도 가제로 남아 있었다. 동명의 제목이 너무 많기도 하고. 그래서 ‘거짓말쟁이’로 해보자는 의견도 있었다. (웃음) 자본주의라는 배경을 살려 ‘남쪽의 기억’으로 해볼까도 했지만 결국 지금의 제목 외엔 다른 단어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단순 명료하게 거짓말에 포커스를 맞춰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지금의 제목으로 정하게 됐다.
-처음 영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막연하게 영화를 좋아하다가 한국독립영화협회 구직란을 보고 지금의 남편인 김선 감독의 <자본당 선언: 만국의 노동자여, 축적하라!>(2003) 촬영장 스탭으로 참여하고 싶다며 찾아갔다. 아마 휘황찬란한 장비를 동원해 찍고 있었다면 엄두도 못 냈을 거다. 그런데 비디오카메라랑 대걸레 손잡이에 벼룩시장 가판대를 뜯어붙인 다음 오징어잡이 배에서나 쓸 법한 할로겐 램프를 달아서 찍고 있는 거다. (웃음) 저 정도면 나도 찍을 수 있겠구나 싶어 그 장비를 빌려서 <차원의 정의>(2002), <위상동형에 관한 연구>(2003) 등 공간에 관한 영화를 찍었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는데 당시에는 고다르, 안토니오니의 영화 아니면 취급도 안 해줄 때였다. 결국 지금은 영화를 괜히 시작했다며 후회하는 중이다. (웃음)
-평소에 주로 어떤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있나.
=아무래도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 써놓은 시나리오 중에 힙합영화가 있다. 탈북자 아이와 한국 아이가 함께 거리에서 힙합을 하는 이야기인데 여기에도 자꾸 가족 이야기가 들어가게 되더라. 예전엔 자신이 없었는데 이제는 찍을 수 있을 것 같다. 무대 뒤에서 앞으로 확 나갈 때 폭발하는 아우라가 느껴지는 장면 등의 구상을 해보곤 한다.
-출산 전과 후 일상의 변화와 더불어, <거짓말>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변화가 있었나.
=어른들이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지 않나. 이제는 그 말의 의미를 알겠더라. 엄마의 마음이라는 걸 알게 되니 예전에는 무시하고 말았던 것들이 전부 현실이 돼버렸다. 하다못해 시리아 난민 사진도 제대로 못 보겠더라. 또 <거짓말>에서 아영이가 “나 임신했어”라고 거짓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대사를 썼지?’ 싶더라. 내가 임신을 했는데 여배우에게 이런 거짓말을 무슨 생각으로 시켰을까. (웃음) 예전에 만들었던 영화들은 그저 덮어둘 수 있을 것 같은데 <거짓말>만큼은 내 뒤를 따라다니면서 감시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너, 바르게 살아야 한다, 라고 말이다. 그리고 항상 아이와 같이 있다 보니 이제 나는 혼자일 수가 없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없다. 나에게도 <거짓말>에게도 10월은 특별한 달이다. 크랭크인을 했고 영화제에 초청됐고 개봉까지 하니까. 내년 10월에는 음악영화를 시작할 수 있으려나?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