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송경원의 영화비평] 스필버그의 거울, 실화라는 이름의 환상
2015-11-10
글 : 송경원
‘실화에서 영감을 얻는’ <스파이 브릿지>에 반영된 미국의 현재, 스필버그의 지금
<스파이 브릿지>

두말할 것도 없이 잘 만든 영화다. 만약 <스파이 브릿지>를 스티븐 스필버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도 상단에 올려놓고 싶어 하는 그룹이 있다면 아마도 나는 상당히 앞자리에 서 있을 것 같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아무리 깐깐하게 바라보더라도 스필버그가 잘할 수 있는 요소들을 모아,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풀어낸 수작이라는 평가를 크게 벗어나진 않으리라 본다. 보는 내내 우아한 호흡에 경탄했고 한폭의 회화처럼 알뜰하게 구성된 화면을 곱씹으며 박수를 보냈다.

느리고 우아한 거울의 영화

하지만 영화의 말미에 거슬리는 게 하나 있었다. 도노반(톰 행크스)이 베를린에서의 첫 교섭을 마친 후 열차에 몸을 싣고 베를린장벽을 건너는 장면이 있다. 당시 베를린장벽이라고 해봐야 벽돌 몇장 쌓아올린 수준이라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건널 수 있었다. 그럼에도 쉽사리 건너지 못한 건 동독쪽에서 장벽을 건너는 자들을 문답무용 사살했기 때문이다. 도노반은 장난처럼, 그러나 절박하게 장벽을 넘으려는 세명의 젊은이가 무참하게 사살되는 장면을 지나가는 전차 안에서 목격한다. 이 신 자체는 당시의 참상과 공포를 전달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도노반으로 하여금 납치된 대학생까지 구해와야겠다는 사명감을 고양시키기 위해 배치한 사건일 수도 있다.

이 장면은 도상적으로 엔딩 시퀀스와 연결된다. 포로 교환 교섭이 무사히 완료된 후 고향에 돌아온 도노반은 전철에 몸을 싣고 시내로 나간다. 이때 전철 창밖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보이는데 이 장면은 앞서 베를린장벽 신과 정확히 거울처럼 마주보고 있다. 도노반의 표정은 자신이 베를린에서 본 풍경이 떠오른 듯 조금 놀란 것처럼 보이지만 이내 차분해진다. 사건의 시작과 끝, 변화한 것들, 신념을 지킨 도노반이 이룬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보여주는 이 두 장면의 대구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표상이기도 하다. 열차 안에서 총알에 쓰러지는 사람들을 볼 수밖에 없었던 도노반의 무력감과 두려움에 대한 보상처럼 주어진 이 장면의 배치를 보며 나는 일말의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을 느꼈다.

어찌보면 매우 도식적이고 장르적인 장면 배치일 것이다. <스파이 브릿지>는 (순전히 도노반의 관점으로 압축한다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열차를 타고 베를린을 빠져나가던 도노반이 사명을 완수하고 왼쪽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그러니까 세상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라고 압축할 수도 있다. <스파이 브릿지>는 냉전시대를 상징하는 모든 것을 기하학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는 거울상의 영화다. 미국과 소련, 동독과 서독, 파워스와 아벨, 자유진영과 사회주의진영으로 갈라진 세계는 거울처럼 서로를 비춘다. 거울이 무서운 건 정확히 반대 방향을 지시하지만 사실 본질이 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 미국과 소련 양 진영이 벌이는 일은 근본적으로 유사하다. 공포에 휘둘려 상대를 처음부터 끝까지 불신한 채 스파이 활동을 하고, 적국의 스파이를 잡아 회유와 협박을 시도한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의 야비함만을 주목한다. 거울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에 혐오와 공포를 느낀다고 봐야 할까.

도노반은 유일하게 거울 양쪽을 오가는 남자다. 그는 아벨의 꼿꼿하고 초연한 모습에서 비록 신념의 내용은 반대일지언정 신념을 지키는 태도와 방식은 자신(들)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발견한다. 영화는 베를린장벽 신과 엔딩 신의 대비를 통해 냉전의 공포에 시달리는 세계 자체가 변화한 것은 아니더라도 신념과 원칙을 지킨 남자가 지켜낸 풍경이 무엇인지 관객에게 정확히 지시한다. 냉전으로 얼어붙은 엄혹한 세계라도 사는 풍경, 고수한 행동에 따라 경치는 바뀌고 세계도 바뀔 수 있다는 단순명료한 희망. 스필버그가 늘 강조했고 지키고자 했던 인간적인 것에 대한 가치. 혹은 법과 직업윤리라는 상식. 정교한 거울 구도가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거울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의 곧은 시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장면의 기능보다 눈을 사로잡은 건 거울처럼 좌우를 뒤집어놓은 두 장면의 구도 그 자체였다. 어둡고 차가운 베를린 하늘과 따뜻하고 화사한 고향의 주황색 하늘, 열차의 방향부터 시선의 방향까지 모든 것이 쌍으로 정확히 대구를 이루는 순간, 나는 이 정돈되고 계산된 배치의 완성도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스파이 브릿지> 전체를 관통하는 거울 구도를 관찰 중인 자신을 발견하고 적잖이 놀랐다. 그것은 비유하자면 그 순간의 나는 영화 바깥에서 그림이 아닌 액자의 아름다움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거울 구도를 통해 드러내는 메시지보다 거울 자체의 예쁨이 더욱 깊이 각인되었다. 사실 여느 영화였다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원래 영화란 형식의 미학이며 작가가 발하는 메시지는 스토리가 아니라 연출 기법을 통해 발현되는 법이다. 그럼에도 매 장면의 아름다운 구성을 관찰하는 내 모습에서 어떤 분열을 느낀 것은 이 영화의 제일 첫 장면이 던져준 명제, “이 영화는 실화에서 영감을 얻었음”이라는 한줄 자막 때문이다.

실화(實話)가 교란하는 관객의 자리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들은 관객의 관람 체험을 교란시킨다. 굳이 ‘이것은 실화입니다’라고 명시하는 까닭은 단순하게는 영화 바깥에서 리얼리티를 끌어오기 위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목적과 상관없이 실화임을 언급하는 순간 관객의 위치는 이야기의 소비자 혹은 구경꾼에서 목격자로 자연스레 이동한다. 실화영화에서의 관람체험에 대해선 <씨네21> 946호에 실린 허문영 평론가의 신전영객잔 <노예 12년> 분석(“가장 조작적인 영화가 실제 사건과의 동일성을 표방할 때, 그것을 보는 우리는 목격자인가, 감상자인가”)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니 참고하면 좋겠다.

일단 실화에 근거한 영화들의 문제는 영화가 허구의 산물이라는 대전제를 뒤흔든다는 데 있다. 우리는 영화가 주는 숱한 정보 속에서 실재와 재구성된 허구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렇게 실재와 허구가 식별 불가능한데도 불구하고 관객은 막연한 허구 이상의 사실감을 체득한다. 단지 그것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한줄의 설명만으로 말이다. 이때 감각되는 사실성은 사실 영화 안쪽, 이야기에서 자아낸 것이 아니라 바깥 관객의 의식에 그 고리를 걸고 있는, 어쩌면 일종의 반칙이다. 게다가 영화가 영상과 사운드를 활용해 허구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실감시킬 때, 현실에서 빌려온 사실성은 이야기라는 가상의 영역에서 정교하게 조작되어 뒤섞인다. 우리는 실화에서 실(實, Ture)을 느끼지만 실상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화(話, Story)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스파이 브릿지>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실제로 벌어진 일이 아니다.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일과 당신이 그것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에서 이야기의 본질이 화자의 기억과 재구성에 있음을 언급했다. 요컨대 이야기란 화자의 기억 방식에 따라 취사선택된 결과물이며 영화는 최종 화자인 감독의 손에 의해 재창조된 세계라는 말이다. 그것이 온전히 이야기상의 세계일 때는 별 문제가 없다. 관객은 이야기를 유희하는 청자의 입장에 머물 수 있다. 하지만 실화라는 한줄의 명제가 끼어드는 순간 관객은 영화가 던져주는 정보에 대해, 사실의 ‘재연’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스스로의 입장을 표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스파이 브릿지>가 재연한 상황, 베를린장벽을 넘는 사람들의 학살 장면은 응당 불편해야 마땅하다. 그것이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일어났던 사건의 일부분임을 우리는 이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노반을 포함하여 관객 누구도 이 장면에서 고통을 공감했다고 자신할 수 없다. 그 장면이 주는 끔찍함은 실화에 기반하고 있지만 그 장면을 구성한 방식에는 타인의 고통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냉혹함이 묻어 있다. 안전한 차창 안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도노반의 시선에는 개인적인 무기력과 함께 이 사안을 바라보는 관객 전체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적어도 영화 속 도노반은 장벽을 넘지 못한 이들의 죽음에 슬퍼하고 임무수행의 동력으로 삼지만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관객인 나는 어떤가. 그 잔혹한 장면을 바라보며 시대의 엄혹함이나 도노반의 번민을 상상하기보다는 화면의 구도와 대구를 이루는 장면과의 관계를 먼저 생각하는 내가 있다.

나는 여기서 변명하고 싶다. 관객이 이 장면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건 영화의 구성 탓이다. 이 영화는 첫 장면부터 관객을 매혹한다. 아벨이 자화상을 그리는 오프닝은 영화 전체의 스타일과 정서를 관통하고 있다. 거울을 바라보며 자화상을 그리는 아벨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는 카메라는 ‘나는 누구인가’ 혹은 ‘나를 바라보는 당신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스파이. 그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바라보는 거울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려진 그림 속 아벨. 영화는 이미지의 구도를 활용해 대상의 분열된 모습을 대비시킨다. 굳이 상징적인 의미를 해석하지 않더라도 이 순간부터 관객은 영화가 구성적으로 흩어놓고 대비시키는 이미지들을 찾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 장면은 장면 자체로 매우 흥미롭고 아름답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회화의 의미를 발견하기 이전에 액자의 틀 자체에 매혹될 수밖에 없다. 아마도 보통의 이야기였다면 그저 칭찬하면 그만이었을 일이다.

하지만 단 한줄, 실화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전제가 나를 괴롭힌다. 이 정교한 이미지들 속에서 관객으로서의 나의 위치는 어디에 놓이는가. 나는 이 이야기를 목격자로 바라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정교한 회화를 뜯어보는 관람자로 만족해도 좋은 것인가. 애초에 <스파이 브릿지>는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 되길 바라고 있는 것인가. 이런 부스러기 같은 까끌거림은 비단 <스파이 브릿지>뿐 아니라 스필버그의 또 다른 실화영화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하지만 적어도 <워 호스>(2011)나 <링컨>(2013)은 혼란스럽지 않았다. 이 또한 정교한 분석이 필요한 부분이지만 축약하자면 두 영화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워 호스>는 말(馬)의 귀가라는 단순명료한 행위 속으로 완벽히 몰두하며 기타 거추장스러운 수사와 사실적인 것들을 그저 장식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링컨>의 경우 혼란과 고뇌를 철저히 인물에게 부여함으로써 이를 해결한다. 고결한 목적의식을 지극히 세속적인 방식으로 풀어내는 링컨의 행보는 그 자체로 분열적이다. 인물이 분열하는 동안 관객은 반대로 편안해진다. <스파이 브릿지>는 어떤가. 아직 잘 모르겠다. 이 영화는 스필버그의 느려진 속도와 우아한 화면구성을 유지하고 한층 조율해냈지만 앞선 두 영화와는 결이 조금 다르다. 어쩌면 2000년 이후 어렴풋이 감지되던 스필버그의 분열이 이제야 그의 영화 안에도 스며든 건 아닌지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스필버그의 왼쪽과 오른쪽

지금에 와서 스티븐 스필버그를 두고 블록버스터의 총아나 예술가인 척하는 감상주의자라고 폄하하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한때 편협한 무리들로부터 탁월한 장사꾼, 시네마의 파괴자라고까지 조롱받았던 그는 이제 부인할 수 없는 시네아스트이자 할리우드의 마지막 고전영화 감독으로 칭송받는다. 2000년 이후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행보는(정확히 집자면 <A.I.>부터) 묵직한 예기로 넘친다. 마틴 스코시즈 같은 오랜 동료들이 영화적 활력을 잃어간다고 걱정 어린 시선을 받을 때도 그는 멈추지 않고 도리어 도약했다. 적지 않은 할리우드영화들이 현란한 속도와 생경한 기술로 관객을 몰아붙일 때, <레이더스>와 <E.T.> <죠스>를 만들었던 1980년대 블록버스터의 정복자는 언젠가부터 할리우드 최후의 고전영화 감독이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

스필버그가 어느 날 갑자기 작가로 거듭난 것일까. 작가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의 문제가 있지만 통념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자신이 바라는 형식을 통해 발하는 것이 최소한의 조건이라면 스필버그는 항상 작가였다. 장 르누아르가 “시인의 영화”라는 찬사를 보냈던 <미지와의 조우>(1977)는 우연한 결과물이 아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작가의 손과 영민한 장사꾼의 눈을 가졌다. 80년대에는 필요에 따라 눈을 먼저 따라갔지만, 2000년 이후의 스필버그는 둘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제작자로서 첨단 기술이나 상업적인 접근(관객을 상대로 한 실험이라 부를 만한)을 마음껏 시도하는 한편, 감독으로서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토대로 한 굵직한 드라마들을 꾸준히 만들고 있는 중이다. 어째든 적어도 감독으로서 스티븐 스필버그는 첨단 기술에 도취되거나 스스로를 양식화하는 일 없이 자신의 속도로 걷고 있다. 다만 그 행보에서 블록버스터로서의 욕망과 드라마에 대한 애정이라는 분열증적인 요소가 어느 정도 감지되는 게 사실이다. 어느 한쪽을 고르기 힘든(고를 필요 없는), 둘 다 스필버그의 모습임에도 두 가지 전혀 다른 성향이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은 놀랍고도 혼란스럽다.

‘True Story.’ 실화를 바탕으로 했음을 전면에 내세우는 영화는 흔하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최근 할리우드영화는 코믹스에 기반한 슈퍼히어로물이나 SF와 판타지, 리메이크영화, 그리고 실화에 근거한 영화들, 이렇게 세 갈래로 나뉘는 것 같다. 이들 세 그룹의 영화들은 전혀 다른 맥락의 장르지만 모두 자신의 근거를 영화 바깥에서 빌려오고 있다는 점에서 겹쳐 보인다. 관객이 필요로 하는 사실성, 현실에 발 디딜 공간은 실화라는 설정에 맡겨둔 채 이야기의 재미, 극적 구성에 치중하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말하자면 이 영화들에게 강조하는 ‘실화’의 강도는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자유로운 이야기 공간의 확보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말이다. 가령 로버트 저메키스의 <하늘을 걷는 남자>에서 화자가 자서전을 읽어주듯 배치한 내레이션 구조는 전형적인 ‘옛날 옛적에’의 방식 그대로다. 일단 실화라는 앵커를 영화 바깥에 걸어둔 채 영화기술이 주는 ‘사실감’에 매진하는 것이다. SF영화에서 유사한 장치나 기술을 쓴다면 단순히 현란하다고 할 장면들도, 실화라는 이유만으로 현실적, 사실적이라고 연결되곤 한다. 여기서 실화는 사실감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반면 스필버그가 끌어온 실화들은 양식은 고전적이되 시점이 현재적이다. “더이상 이런 영화가 많이 만들어지지 않는 게 사실이다”(1028호 <스파이 브릿지> 기획 기사 중 인터뷰)라는 스필버그의 고백처럼 이 영화는 최근 할리우드 스타일과 동떨어져 있다. 인물에 초점을 맞춘 감상주의라는 핀잔을 받던 스필버그의 드라마가 어느새 고전적인 양식과 호흡인 양 받아들여지고 있는 건 단지 시간이 흘러서만은 아닐 것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그의 고전적 드라마가 폐쇄된 세계에 머무르지 않는 건 항상 시대의 공기를 읽고 미국 사회를 투영해왔기 때문이다. ‘이건 네 이야기가 아니야’라고 선언하는 순간부터 뇌리에는 ‘내 이야기인가’ 하는 의심이 뿌리내리기 마련이다. 누군가 흰곰이 없다고 말하면 흰곰만 생각난다. 마찬가지로 ‘이건 1950년대 실화’라고 선언하는 순간 관객의 뇌리를 잠식하는 건, 어쩌면 1950년대가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다. 나는 당신이 영화가 재현한 1950년대 풍경 속에서 오늘날 미국 사회와의 유사성을 무의식적으로 뒤진다 해도 그리 놀라지 않을 것이다. 스필버그가 관객을 위해 마련한 자리는 아마도 1950년대의 목격자가 아닌 지금 현재 미국 사회를 응시하는 관찰자의 위치다.

남북전쟁을 묘사하든, 냉전을 말하든 결국 스필버그는 오늘날 미국 사회의 징후들을 드러내왔다. 심지어 <우주전쟁>(2005) 같은 SF에서조차 그는 ‘오늘’의 미국을 말한다. <스파이 브릿지>가 거울의 영화라는 건 단지 형식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링컨>이 오바마 시대에 대한 기대와 실망을 반영했듯이, <스파이 브릿지>는 ‘실화’에 습관처럼 회화적인 화면을 결합함으로써 1950년대를 보여주면서 2015년의 미국을 투영하는 힘을 얻는다. 이것이야말로 스필버그의 실화영화가 현재 할리우드에 넘쳐나는 여타 실화영화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이것은 실화다’가 아니라 ‘실화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에둘러 표현한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스파이 브릿지>는 서사적으로 완벽히 조율된 영화지만 어딘지 불안하다. 그것은 항상 관찰자로서 한 발짝 물러나 있던 스필버그의 자화상이 녹아든 결과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스필버그는 항상 이야기로 자신을 표현해온 이야기꾼이지만 이야기는 종종 이야기꾼조차 속일 때가 있다. 자신이 잘해왔던 것을,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조합하는 과정에서 그가 이번엔 자신의 불안마저 투영해버린 건 아닐까. 그래서 이 실화를 마주하는 나(관객)마저 불편해지는 건 아닌지 의심해본다. 물론 감독의 불안이 투영된 대상은 도노반이 아니라 아벨이다. 아벨이 거울에 비친 자신을 그림으로 그리는 장면은 자기반영적인 구도를 우아하게 완성하고 있는 스필버그의 자화상처럼 보인다. 블록버스터의 왼쪽과 고전 드라마의 오른쪽이 완전 다른 방향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한 사람의 흔적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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