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상상력이 매번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건, 이야기를 다루는 감독의 손끝마다 각기 다른 색깔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2015(이하 BIAF2015)의 개막작으로 초청된 <에이프릴과 조작된 세계>는 스팀펑크 장르의 정수를 보여주는 우아한 작품이다. 증기기관이 세상을 지배하는 대체역사를 주 무대로 하는 스팀펑크는 <스팀보이>(2003),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등 주로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할리우드영화를 통해 친숙해졌다. 하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쥘 베른의 <해저 2만리>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만큼 유서 깊은, 이 오래된 상상력의 매력은 아무래도 아날로그적인 정서를 얼마나 제대로 구현할 수 있을지에 달렸다고 하겠다. <에이프릴과 조작된 세계>는 과학자들이 사라진 1940년대 프랑스가 배경이다. 어느 날부터 전세계 과학자들이 하나둘 사라진 후 증기기관을 중심으로 발전한 세계를 그린 자크 타르디의 상상력은 놀랍고 신선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매혹적인 건 이 어둡고 매력적인 세계를 손끝으로 직접 구현해낸 과정이다. 프랑스 국민작가 자크 타르디의 그래픽노블 <조작된 세계>를 원작으로 하는 <에이프릴과 조작된 세계>는 원작의 그림체와 움직임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 6년이 넘는 시간을 투자했다.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왔던 스팀펑크와는 또 다른 질감으로 상상의 역사를 펼쳐 보이는 <에이프릴과 조작된 세계>가 신선하게 다가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페르세폴리스>(2007)를 제작한 JSBC(Je Suis Bien Content) 프로덕션은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사령탑을 크리스티앙 데마르 감독과 (공동감독 프랑크 에킨시)에게 맡겼고 그는 첫 연출작에서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해냈다. BIAF2015 마스터클래스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크리스티앙 데마르 감독과 마크 주셋 프로듀서를 만나 길고 험난했던 작업 과정에 대해 물었다. 더불어 할리우드와는 다른 맥락에서 꾸준히 놀라운 작품을 내놓고 있는 프랑스 애니메이션의 경향에 대해서도 짧은 질문을 던졌다. 좋은 애니메이션을 꾸준히 만들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라는 식상한 우문에 그들이 건넨 현답, 어쩌면 당연해서 더 어렵고 진실된 답을 전한다.
-프랑스 JSBC 프로덕션의 세 번째 장편애니메이션이다. 자크 타르디의 그래픽노블을 장편애니메이션화하기로 결정한 이유가 있나.
=마크 주셋_JSBC는 1996년 문을 열어 올해로 20년째다. 원래 단편 제작을 위해 문을 연 스튜디오인데 <페르세폴리스>부터 장편을 시작했다. 이번 BIAF2015에도 <스마트 몽키> 등 단편을 함께 출품했다. <에이프릴과 조작된 세계>는 자크 타르디의 그래픽노블을 원작으로 했지만 그래픽노블을 그대로 영화화한 건 아니다.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가지고 자크 타르디가 상상한 세계를 표현하는 데 중점을 뒀다. 시나리오에는 <설국열차>의 원작자 뱅자맹 르그랑도 참여했다.
-<페르세폴리스>와는 분위기도, 작화도 사뭇 다르다. 대체역사를 무대로 한 스팀펑크 SF인 만큼 규모도 크고, 다채로운 액션 신 등 화려한 볼거리도 상당하다.
=마크 주셋_그렇게 봤다니 다행이다. <페르세폴리스>와는 출발이 다른 작업이었다. 우리 입장에서도 규모가 큰 프로젝트였고 캐나다, 벨기에 3국이 함께 참여했다. 애초에 칸국제영화제 등 해외 마켓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만든 작품이고 이미 여러 나라에 선판매되었다. 내가 예술총감독을 맡았던 <페르세폴리스> 때는 함께 참여한 업체가 애니메이션과 상관없는 곳이라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결정하고 관리해야 했다. 이번에는 3국의 애니메이션 업체가 협업한 데다 원작자가 상당 부분 참여했기 때문에 상황이 달랐다.
크리스티앙 데마르_<페르세폴리스>는 이미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그래픽노블을 최대한 훼손 없이 애니메이션으로 옮기는 작업이었던 반면, <에이프릴과 조작된 세계>의 목표는 원작자 자크 타르디의 상상력을 펼쳐내는 거였다. 장면과 디자인이 구체적으로 결정된 상황이 아니었기에 훨씬 창의적이고 역동적인 작업이었다.
-크리스티앙 데마르 감독은 그간 JSBC의 애니메니터로서 꾸준히 활동을 해왔지만 이번 작품이 장편애니메이션 데뷔작이다. <에이프릴과 조작된 세계>로 2015년 안시국제애니메이션 장편부문 대상을 수상했는데, 소감이 어떤가.
=크리스티앙 데마르_내가 이 작업에 참여한 건 2008년부터다. 공동감독인 프랑크 에킨시가 이미 어느 정도 프로젝트를 진척시켜놓은 상황이었다. (많이 바뀌긴 했지만) 초기 단계의 파일럿 영상까지 나와 있었기 때문에 부담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게다가 자크 타르디의 엄청난 팬은 아니었다. (웃음) 물론 자크 타르디처럼 훌륭한 작가의 원작을 애니메이션으로 한다는 건 기쁜 일이다. 하지만 팬 입장에서 원작에 흠뻑 빠져 있던 건 아니라서 작품을 해석하고 접근하는 데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래서 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마리옹 코티야르를 비롯한 유명 배우들의 목소리 연기가 인상적이다. 팝스(에이프릴의 할아버지) 역의 배우 장 로슈포르는 외모로 캐스팅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싱크로율이 높다.
=크리스티앙 데마르_배우를 염두에 두고 디자인한 건 아닌데 우연치 않게 놀랍도록 흡사한 경우도 있었다. 팝스 역시 그중 하나였는데, 캐스팅할 때 장 로슈포르의 사진을 보고 자크 타르디가 ‘이 사람이 팝스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웃음) 신기하게도 대부분의 배우들이 얼굴보다는 제스처나 성격 등이 영화 속 캐릭터와 닮았던 것 같다.
마크 주셋_고양이 다윈을 연기한 필리프 카터린느는 예전에도 고양이 역할을 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매우 자연스러웠는데, 배우의 목소리 연기에 영감을 받아서 애니메이션의 동작과 캐릭터를 추가 수정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다윈의 느긋하고 졸린 말투나 동작은 배우에게 영감을 받아 표현했다.
-대개의 경우 완성된 작품 위에 목소리 연기를 입히는데, 이번 작품은 목소리 연기를 먼저 하고 이후 작화를 추가했다고 들었다. 특이한 방식이다.
=크리스티앙 데마르_완전 초기 단계는 아니었고 애니메이션 완성 전에 더빙을 끝냈다. 다윈처럼 배우들의 목소리 연기에 영향을 받아 이후 그림을 추가로 그리기도 했다. 특별한 의도였다기보다는 제작 스케줄 때문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더 좋아진 것 같다. 따로 연기 디렉팅 없이 시나리오만 주고 배우들이 원하는 연기를 하도록 했는데, 우리에게 좋은 영감을 주었다. 가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했지만(웃음) 그조차도 좋았다.
마크 주셋_더빙 작업을 사전에 했던 이유를 굳이 말하자면 더빙 후 사운드와 다른 요소들이 조화롭게 들어맞을 수 있도록 조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리옹 코티야르의 경우 녹음에 하루 정도 걸렸고 몇달 후 최종완성된 버전으로 수정작업을 함께했다. 프로듀서 입장에서 그녀와 함께할 수 있었던 건 감사한 일이다. 솔직히 연기도 연기지만 홍보에도 큰 도움이 된다. (웃음)
-자크 타르디가 상상한 세계는 익숙한 듯 새롭다. 한눈에도 세계관의 표현과 작화에 특히 공을 들인 게 보인다.
=크리스티앙 데마르_자크 타르디의 구상, 그의 독특한 그림체를 애니메이션의 움직임으로 구현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도전이었다. 기술적으로도 쉽지 않은 작업이지만 일관된 톤과 정서를 어떻게 유지하고, 디테일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가 관건이었다. 기본적으로는 모두 컴퓨터로 작업했다. 효율의 문제도 있었지만 캐나다, 벨기에와 협업을 해야 했기 때문에 컴퓨터 작업은 필수였다. 최우선 과제는 잉크펜 작가의 손끝에서 빚어진 느낌과 색감을 컴퓨터로 옮겨내는 일이었다. 기본적으로는 수채화 느낌이 나도록 하고 역동적인 움직임보다는 한장 한장의 디테일에 중점을 뒀다.
마크 주셋_선의 굵기, 색감 등 디테일한 요소들을 일관된 톤으로 구현하는 게 중요했다. 자크 타르디의 머릿속 세계를 통째로 옮겨오는 일이었다. 빛의 각도에 따른 카메라의 움직임 등 고려해야 할 변수가 많았다.
-인물은 2D 질감인데 스팀펑크 장르의 핵심이 되는 탈것이나 메커닉 디자인은 3D다.
=크리스티앙 데마르_중요한 지적이다. 기본적으로 메커닉은 3D 디자인을 따로 했다. 거기에 이질감을 느끼지 않도록 표현을 수채화 질감으로 일일이 채워넣었다. 가끔 색이 꽉 차게 들어가지 않거나 움직임이 끊어지는 느낌도 있는데 일부러 그렇게 한 거다. 아날로그 디자인의 느낌을 주고 싶었다.
마크 주셋_에펠탑에 설치된 고공 증기기관차의 경우 특히 공을 들였다. 기계적인 설계는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디자인’을 목표로 내부 디자인까지 꼼꼼하고 사실적으로 구상했다. 대신 이를 애니메이션상에 표현할 때는 2D 작화에 가깝게 뭉개서 구현했다. 가까이 있는 건 세밀하게, 멀리 있는 기관차의 디자인은 디테일한 선이 뭉개진 형태로 흐릿하게 따로 제작한 거다. 사실적이되 그림처럼. 어디까지나 그림으로 구현된 세계라는 게 핵심이다.
-할리우드영화에 단골 손님으로 등장하는 게 ‘자유의 여신상’이라면 <에이프릴과 조작된 세계>에서는 증기기관차 역으로 사용되는 쌍둥이 에펠탑이 인상적이다.
=크리스티앙 데마르_1940년 프랑스의 대체역사를 무대로 한 이야기라서 무엇을 상징물로 세울까 생각해보니 에펠탑이 최적인 것 같았다. 가상의 세계인 만큼 거꾸로 등장인물과 배경은 진짜보다 현실감이 있어야 한다. 에펠탑과 증기기관차 디자인에 특별히 공을 들인 이유다.
마크 주셋_이번 작품은 서사적으로는 어드벤처물이지만 그 밑에 환경 문제나 무능력한 권력층에 대한 이야기, 과학과 진보에 대한 질문 등이 녹아 있다.
크리스티앙 데마르_딱히 스팀펑크 장르의 클리셰를 염두에 둔 건 아니지만 여러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길 바랐다. 작품을 준비하면서 많은 영화를 봤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의 성 라퓨타>(1986) 같은 작품이 연상될 수도 있다. 무척 좋아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자크 타르디의 세계관 위에 서 있고 그걸 제대로 구현하는 게 목표였다. 에펠탑이 등장하고 파리를 배경으로 한 것도 단순하게 말하면 자크 타르디가 파리에 살기 때문이다. (웃음)
-북미 애니메이션이 3D로 완전 전환된 데 반해 프랑스는 여전히 손 그림의 느낌을 고수한다는 인상이다.
=크리스티앙 데마르_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 우리도 3D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프랑스 내에서도 퀄리티 높은 3D애니메이션이 다수다. <에이프릴과 조작된 세계>의 경우 3D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라 자크 타르디의 세계를 구현하기에는 2D가 어울린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2D냐 3D냐는 도구의 문제라고 본다. 프로젝트의 성격에 따라 적절한 방식을 고르면 된다.
마크 주셋_경제적인 이유도 있다. 3D는 초기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예산에 따라 2D가 나은 경우도 있다. 물론 아티스트적인 이유로 2D를 선호하기도 한다. 폴리마주 스튜디오가 대표적인 사례다. 개인적으로는 그림이란 손으로 그리는 게 더 와닿기 때문에 가능한 손 그림의 느낌을 살리고 싶지만, 결국 언제나 핵심은 어떤 방식이냐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있게 구현하는가에 달렸다.
-2D를 고수하는 폴리마주와 비교한다면 JSBC의 차별화 지점, 지향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마크 주셋_우리 애니메이터들이 더 잘생겼다. (웃음) 제작 방식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 폴리마주가 상대적으로 어린 관객에게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면 우리는 좀더 넓은, 어른들도 공감할 수 있는, 아이들이 자는 시간에도 TV에서 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려고 한다.
-좋은 애니메이터가 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원론적인 질문이지만 구체적으로 답변해주면 좋겠다. (웃음)
=크리스티앙 데마르_애니메이션은 복잡한 공정을 거치는 작업이다. 그래서 탄탄한 기초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 가지 더, 애니메이션이라고 해서 그림에만 사고를 국한시키면 곤란한다. 많은 실사영화와 예술작품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나 역시 이번 작품을 만들면서 스티븐 스필버그를 비롯한 숱한 영화감독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마크 주셋_테크닉적인 부분 이외에 팀워크도 중요하다. 애니메이션은 짧아도 몇년 이상 걸리는 작업이기 때문에 좋은 사람들로 팀을 꾸리는 게 성공적인 작업의 첫걸음인 것 같다. 좋은 사람들이 즐기며 작업한 작품들이 훌륭한 경우가 많다. 좋은 팀워크에도 아쉬운 작품이 나올 수 있어도 나쁜 분위기에서 좋은 작품이 만들어지는 경우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