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목소리: 알렉산더 소쿠로프 회고전’이 11월6일(금)부터 15일(일)까지 10일간 종로 서울극장 내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소쿠로프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후계자로서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감독이자 세계적인 시네아스트이다. 그는 극영화감독이자 다큐멘터리스트이기도 한데, 그의 극영화는 묘하게 다큐멘터리적이고 반대로 다큐멘터리는 묘하게 극영화적인 것이 특징이다. 그의 첫 번째 장편 극영화인 <인간의 고독한 목소리>부터 2011년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파우스트>까지 소설을 각색해 만든 두편의 작품을 꼭짓점으로, 총 13편의 작품이 상영된다. 소쿠로프 감독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이다. 그는 러시아의 역사, 문화, 정치를 인식한 작품을 만드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이번 회고전에는 영화연구자뿐만 아니라 러시아 학계 인사들을 초청한 강연 프로그램도 마련된다. 또한 소쿠로프 감독이 직접 내한해 시네토크(14일)와 마스터클래스(15일)에 참석할 예정이다. 소쿠로프의 육성을 들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다.
소쿠로프 영화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필수어들이 있다. 그것은 타르코프스키, 죽음, 관계, 고독, 예술, 러시아, 정치, 여정 등이다. 이중 몇 가지가 영화에서 뒤섞인 채 드러난다. 소쿠로프는 <인간의 고독한 목소리> <모스크바 엘레지> 등 몇편의 작품을 그에게 바쳤다. 직접 타르코프스키를 언급한 작품 외에도 소쿠로프의 작품에서 타르코프스키를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안드레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등장한다는 아주 사소한 연결점부터, 구체적으로 따져보긴 힘들어도 어떤 정조가 주는 감정이 타르코프스키의 작품 세계와 영혼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소쿠로프는 초기작부터 죽음에 대해 탐구했다. 죽음은 고독한 개인의 문제이기보다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이때 관계는 인간에게 구원이 되어주기보다는 남아 있는 자의 고독함을 배가시켰다. 죽음에 대한 관심은 필연적으로 죽지 않는 것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탐구로 나아갔다. 예술은 불가해한 것으로서 죽음이나 꿈을 여행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므로 다시 죽음과 만난다. 소쿠로프의 작품을 본다는 것은 예술을 통해 죽음을 항해하는 여정이다.
<인간의 고독한 목소리>(1987)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소설 <포투단 강>과 <주인의 기원>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소쿠로프의 첫 번째 장편 극영화다. 전쟁에서 돌아온 청년 니키타와 어릴 적 친구 류바가 오랜만에 재회한다. 이들의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소쿠로프 영화 중 남녀 관계가 중심이 되는 드문 영화이기도 하다. 이들의 아름다운 만남은 그러나 외부에서 끼어드는 소리로 인해 불안한 기운을 드리운다. 소쿠로프의 영화가 죽음에 대한 여정을 담고 있다고 한다면 이 영화는 전작에 비해 공간보다는 대사를 통해 죽음을 직접 언급하는 편이다. “외로울 때 사람은 죽어”라는 대사가 보여주듯 영혼의 외로움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인 사색이 담겨 있다. “죽음은 강 속과 같을 것이다”라는 대사를 통해 죽음의 이미지를 상상해보게 한다. 1978년 완성되었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금지당했다. 소쿠로프는 타르코프스키 사후인 1987년 리마스터링하면서 이 영화를 타르코프스키에게 헌정했다.
<모스크바 엘레지>(1988)
1986년은 타르코프스키가 54살로 숨을 거둔 해다. <모스크바 엘레지>는 그로부터 2년 뒤 완성된 영화로 소쿠로프의 영적 스승 타르코프스키에 대한 애도와 그리움의 감정이 진하게 묻어나는 다큐멘터리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애초에 타르코프스키 탄생 50주년을 기념해 기획된 작품이었다. 탄생을 위해 기획된 작품이 결국은 죽음을 기리는 영화가 된 것이 아이러니하다. ‘엘레지’ 시리즈 중 하나로 타르코프스키의 생전 인터뷰와 영화들, 뉴스릴, 자료화면 등으로 구성되었다. 유작인 <희생>(1986)을 찍을 당시 촬영현장에서의 열정과 병약한 상태에서도 편집에 관한 명확한 상을 제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타르코프스키가 단역으로 출연해 연기를 펼치는 장면도 볼 수 있다. 소쿠로프가 직접 내레이션을 담당했다. <모스크바 엘레지>와 함께 일본에서 촬영한 <오리엔탈 엘레지>(1996), 박물관으로 초대하는 <긴 여정의 엘레지>(2001), 결혼 50주년을 맞은 예술가 부부의 삶을 다룬 <생의 엘레지: 로스트로포비치와 비쉬넵스카야>(2006) 등 엘레지 시리즈 중 4편의 작품이 상영된다.
<어머니와 아들>(1997)
가족 3부작 중 한편으로 외딴집에서 서로에게 기댄 채 살아가는, 죽어가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를 보살피는 아들을 보여준다. 어느 날 아들과 어머니는 나란히 서로 기댄 채 꿈 이야기를 하다가 둘이 같은 꿈을 꿨다는 것을 발견한다. 병약한 어머니는 몸을 가누기 힘듦에도 불구하고 걷고 싶다고 말한다. 아들은 병든 어머니를 안고 집 근처 오솔길을 오간다. 그 이후는 예상한 대로 흘러간다. 병약한 가족을 돌보는 이야기는 흔하다. 이때 강조되는 것은 환자의 상태가 점점 악화되면서 죽어가는 과정을 보는 안타까움과 가족의 헌신과 슬픔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환자와 보호자간에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상하 주종 관계를 깨뜨린다. 아들과 어머니가 서로 기대고 있는 첫 장면은 둘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어머니는 환자임에도 여전히 내가 기댈 수 있는 어머니라는 점이다. 그 때문에 어머니의 죽음 자체보다는 그 이후에 홀로 남은 자의 외로움이 강조된다. 이들이 점하는 장소는 한폭의 그림 같은데, 마치 두 사람이 함께 꿨던 꿈속을 보여주는 것 같다. 정제된 화면과 느린 흐름이 인물의 외로움을 조용히 다독인다.
<몰로흐>(1999)
20세기 권력자들을 주인공으로 한 권력 4부작 중 첫 번째 작품으로, 히틀러와 그의 연인 에바, 괴벨스 부부 등이 알프스 저택에 머문 히틀러 말년의 이야기다. 거의 실내에서 이뤄짐에도 불구하고 안개에 둘러싸인 스산한 겨울 날씨가 장면 곳곳에 배어 있다. 히틀러가 예술과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영화는 그보다는 무료하고 일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대부분 실내에서 이뤄지고 식사 장면이 많은 점, 인물에게 동화되기보다는 묘하게 풍자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루이스 브뉘엘의 몇몇 작품들을 연상시킨다. 에바는 히틀러에게 ‘당신은 하나의 거대한 제로(0)’라고 말한다. 권력자를 미화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에바의 이 말이 소쿠로프가 권력자들의 말년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해주는 것 같다. <몰로흐> 외에도 레닌의 말년을 다룬 <황소자리>(2001), 악마에게 영혼을 판 사나이라는 문구로 축약되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각색한 <파우스트>(2010) 등이 상영된다.
<러시아 방주>(2002)
<러시아 방주>는 소쿠로프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한편의 영화를 컷하지 않은 단 하나의 숏으로 채운 원숏 원신 영화로 그것의 형식적인 실험성이 일단 눈길을 끈다. 그러나 형식에만 경도되지 않고 그것을 감각하게 하는 데 영화는 성공한다. 이 영화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장소적 배경으로 한다. 250년의 유구한 역사가 잠든 박물관은 어쩌면 거대한 죽음의 공간이다. 소쿠로프는 이 공간을 끊지 않고 실시간으로 촬영하면서 동시대를 사는 박물관의 관객과 예카테리나 대제를 비롯한 과거의 인물들을 연결한다. 이것은 박물관이라는 죽음의 장소에 대한 탐구일 뿐만 아니라 박물관이라는 공간을 살아 있는 장소로 만드는 생성의 여정이기도 한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카메라와 일체화된 시선을 가진, 모습이 보이지 않는 하나의 목소리로 등장한다. 이는 영화에 사후 세계, 혹은 꿈의 세계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알렉산드라>(2007)
전쟁과 할머니라는 보기 드문 조합의 영화인데, 할머니를 활용하는 방식 역시 독특하다. 알렉산드라는 손자 데니스를 만나기 위해 군인들이 이용하는 화물용 기차에 힘겹게 올라 체첸으로 향한다. 데니스는 체첸 주둔 러시아 장교이다. 7년 만에 이뤄지는 할머니와 손자의 상봉이 따뜻하게 그려지지만, 이 영화가 둘의 관계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소쿠로프는 러시아가 자신과 전쟁을 벌이는 체첸에 주둔지를 세운 것에서 빚어진 공간의 아이러니함에 주목한다. 할머니는 무장하지 않은 채 부대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군복 사이에 홀로 다른 옷을 입고 천천히, 하지만 부지런히 부대를 오가는 그녀는 마치 생과 사를 넘나드는 천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부대에 활기를 가져오는 동시에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존재이기도 하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그녀가 근처 시장으로의 위험한 여정을 떠나면서 벌어진다. 시장에서는 말 없는 적대감이 감도는 긴장된 분위기가 흐른다. 그 가운데 한 여성 상인이 처음 본 그녀에게 외상으로 물건을 건네주고, 잠시 현기증이 난 그녀를 자신의 집에서 쉬게 해주는 것도 모자라 마을 청년을 시켜 그녀를 안전하게 부대로 배웅해준다. 구태여 강조하지 않고 담담히 묘사된 이들의 짧은 만남이 깊은 울림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