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7일 일기에 <더 홈즈맨>의 결정적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런던의 로열 아카데미 오브 아트에서 열리고 있는 중국 미술가 아이웨이웨이의 회고전(~12월13일). <스트레이트>(Straight, 2008∼2012)는 2008년 쓰촨대지진으로 무너진 학교의 잔해에서 휘어진 철근들을 뽑아내 하나하나 두들겨 신품처럼 곧게 편 다음 거대한 물결 모양으로 쌓아올린 작품이다. 참사 당시 아이웨이웨이는 5천명이 넘는 어린이의 생명을 앗아간 건물 붕괴에 공무원들의 부패가 관련됐다고 판단하고 희생자 규모를 은폐하는 정부에 항의하는 운동을 벌이는 동시에 이 작품에 착수했다. 그러므로 제목 <스트레이트>에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 공명정대하다, 숨김없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전시실 양쪽 벽에는 시민들이 조사한 죽어간 아이들의 명단이 길이 15m, 높이 2.5m로 설치돼, 그들에게 바쳐진 예술가의 고요한 애도를 굽어보고 있었다.
10/17
“페미니스트 서부극이다.” “천만에. 그런 척하다가 안면을 바꿔 여성 인물을 주체의 자리에서 밀어내는 여성혐오적인 영화다.” <더 홈즈맨>은 상반된 두 해석에 모두 근거를 제공하는 이상한 영화다. 문제의 뇌관은 이른바 ‘배반의 반전’이다. 처음부터 엄연한 주인공으로 여정을 주도하던 메리(힐러리 스왱크)가 2/3 지점에서 급작스럽게 사라지고, 동행자인 떠돌이 사내 조지 브릭스(토미 리 존스)가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게다가 강하고 독립적인 메리가 스스로 이야기에서 퇴장하는 이유는, 여생을 같이할 남자를 구하지 못해서다. 다분히 관객이 찡그릴 만하다. 아무리 능력 있는 여자라도 남자를 얻지 못하면 인생이 불완전하다는 뜻인가? 감독이며 시나리오 공동 작가인 토미 리 존스가 오랜 세월 재현해온 의로운 가부장으로서의 에고가 혹시 영화를 삼켜버린 걸까?
생각해본 끝에 나는 이 영화가 보수적이지만 반여성적이지도 않다고 판단한다. <더 홈즈맨>이 결혼 못한 여자를 패배자로 바라본다고 하기엔 영화 속 결혼한 여자들의 상태가 참혹하다. 메리가 아이오와의 교회로 데려다주기로 약속한 이웃의 세 여자는 결혼으로 망가졌다. 서부의 가혹한 겨울, 아이 잃은 비탄, 남편들의 미숙함과 학대가 여자들을 미치게 했다. 농기구 장만하듯 그녀들과 결혼한 남자들은 광기가 아내들의 용도를 폐기하자 마치 반품하듯 돌려보낸다. 심지어 직접 아내들을 동부까지 인도하는 최소한의 성의도 내비치지 않는다. 실상 메리는 이 황량한 마을에서 유일하게 잘살고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농장은 잘 관리되어 있고 집안은 단정하다. 나아가 그녀는 양심과 그것을 실천할 의지를 가진 기품 있는 인간이다. 본인에게 득 될 것 없는 위험한 장거리 여행을 메리가 자청하는 까닭도 달리 그 일을 감당할 남자가 마을에 없어서다. 이런 그녀는 간절히 결혼을 필요로 한다. 남자들에게 먼저 청혼하면서 메리가 호소하는 필요는 로맨스가 아니다. “우리는 바람직한 팀이 될 거예요”라고 거래하듯 제안한다. 왜냐하면 메리는 혼자 여생을 보내고 싶지 않고, 1830년대 독실한 기독교도 이성애자 여성이자 아이를 원하는 그녀에게 이 목표를 달성할 방도는 결혼뿐이기 때문이다. 메리의 집은 견고한 보금자리지만 그곳을 둘러싼 광대한 무(nothingness)는 지극한 고독을 암시한다. 요컨대 메리는 강하고 불행한 여자다. 다시 말해 인물이 불행을 느끼는 것이지, 영화가 그녀가 독신이라는 상황을 불행으로 규정한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한편 조지 브릭스는 생물학적 성(性)을 불문하고, 스스로를 지키고 타인을 보호할 줄 아는 책임감 강한 인간을 존중하는 남자다. 메리는 그 시험을 통과해 리스펙트를 얻는다. 다만 이 늙은 남자는 그러한 속성을 본질적으로 ‘사내다움’이라는 이름으로, 남성 명사로 고집스럽게 인식한다. 메리와 대화하던 중 조지는 문득 말한다. “신이 인간 대신 희생하라고 보낸 자식은 딸이 아니라 아들이지 않소?” 이를테면 이것이 조지의 강고한 세계관이다.
10/18
메리와 동행하는 내내 나이브한 여자에게 생존 기술을 가르치는 교사 입장이었던 조지는, 역설적으로 메리가 사라지자 급작스럽게 그녀의 영향에 휘둘리기 시작한다. 오로지 보수가 동기였던 사내가 돈을 손에 넣은 다음에도 메리가 했을 법한 일들을 대신해서 수행한다. 병든 여자들을 아이오와 교회에 안전히 인계하고 머무르는 여인숙의 가난한 종업원에게 신발을 선물한다. 비명횡사한 이름 모를 시신을 예를 갖춰 매장하는 메리를 비웃었던 그가 비석을 주문한다. 메리의 영향으로 조지의 여생은 달라지는 걸까? 그러나 돌이키기에 남자는 이미 너무 늙고 지쳤다. 도로 서부로 돌아가는 나룻배에 오른 조지는 지난 며칠의 자기답지 않은 선행을 푸닥거리라도 하듯, 막춤을 추고 총질을 한다. 이 난장의 와중에 메리와 조지의 만남을 증거하는 유일한 물건이 무심한 사공의 발에 채여 어이없이 강바닥으로 가라앉아버린다. 이 숏에 충격을 받은 내 귓전에 토미 리 존스 감독의 웅얼거림이 들리는 듯했다. “이 남자는 강 저쪽 기슭에 닿을 즈음이면 메리를 지울 것이다. 어느 밤 모닥불 앞에서 이상한 여자가 하나 있었다는 추억담으로나 입에 올릴 거다.” 퉁명스런 인터뷰로 악명 높은 토미 리 존스는 <더 홈즈맨>으로 웨스턴에 어떻게 접근했느냐는 질문에 “장르로서 서부극에는 전혀 관심없다. 미국사에 대한 영화에 관심 있을 따름이다. 예술가라면 누구나 자기가 사는 곳에 관한 작품을 만든다”고 잘라 말했다. 영화가 끝난 다음 조지 브릭스는 메리를 만나기 전처럼 무뢰한으로서 서부를 떠돌다 무덤 없이 죽을 것이다. 그것이 토미 리 존스가 지닌 미국 역사의 이미지다.
10/20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은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결합한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1988) 이래 아카이브 영상 합성, 퍼포먼스 캡처 기술 개척에 투신했다. 그러나 디즈니는 2010년 그의 퍼포먼스 캡처 기술 개발 전초 기지 이미지무버스(Imagemovers)를 폐쇄해 좌절을 안겼다.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신념의 소유자인 <하늘을 걷는 남자>의 줄타기 아티스트 필리프 프티에게 저메키스 감독이 강력하게 동일시했으리라는 점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저메키스는 테크놀로지를 무한 신뢰하며 그를 통해 영화가 리얼리티를 지배할 수도 있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하늘을 걷는 남자>의 장점과 단점도 그 신념에서 비롯된다. 저메키스의 3D 구사법은 과연 남다르다. <하늘을 걷는 남자>는 분주한 카메라 움직임과 짧고 빠른 컷이 3D 스펙터클로서 썩 좋은 효과를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450m 상공에서 인간의 눈으로 내려다본 맨해튼의 아찔한 ‘깊이’를 서늘하게, 나아가 감격적으로 전달하는 데에 3D의 마법을 활용한다. 반면 특수효과가 영화 전면에 나선 저메키스 영화에서 시간은 너무 쉽게 압축되고 공간은 너무 수월하게 교체된다는 인상을 받는다. 저메키스에게 영화는 시간과의 싸움은 아니다. 포레스트 검프, 마티 맥플라이, 필리프 프티는 도중에 장애를 만나지만 결국은 유유히 시간을 가로지르고 우리는 그들의 경공술을 믿는다. 영화 속 조셉 고든 레빗의 필리프 프티는 플래시백의 터널을 통해 이야기 밖으로 훨훨 들락날락한다. 그는 하늘을 걷지만 시간을 한발 한발 달리지는 않는다. <하늘을 걷는 남자>는 전체적으로 넘친다. 곡예 고수인 필리프 프티의 일거수일투족부터 화려한데, 여기다가 고속촬영과 원근감의 신통한 왜곡(자유의 여신상 위의 첫 장면), 부분 컬러, 화면 마스킹 기법이 총동원된다. 구조로 보면 액자 속에 액자가 있고, 그렇지 않아도 관객이 목격 중인 사건을 일일이 내레이션으로 해설한다. 프티가 뉴욕 거사를 위해 영어를 연습해야 한다는 핑계로, 프랑스인들이 구태여 영어를 쓰는 이유를 정당화하는 대사가 네댓번 반복되는데 이것도 너무 많다(물론 이 영화의 결정적 셀링 포인트인 3D의 공간감이 얼마나 자막으로 방해받는지 고려하면 영어권에서 자막 상영을 감수하기 어려웠으리라는 사정은 이해가 가는 바다). 그 밖에 영화가 보탠 허구의 인물 파파 루디(벤 킹슬리)와 관련된 서브플롯 역시 내겐 통째로 들어내도 별 지장이 없어 보인다. 결국 20여분의 줄타기 클라이맥스가 이 영화에서 가장 심플한 대목이다. 그러나 남쪽 타워에서 북쪽 타워까지 처음 무사히 도달한 조셉 고든 레빗이 “그때, 남쪽 탑이 나를 다시 불렀다”라고 관객에게 내레이션으로 고하며 다시 와이어에 오르는 순간 나는 낙담하고 말았다. 그 말은 안 해도 돼요. 그냥 줄을 타도 당신이 부름받았다는 걸 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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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댄스
스티븐 소더버그가 프로듀서로 물러앉았으나 촬영감독으로 참여한 <매직 마이크 XXL>은 ‘마지막 최고의 공연’이라는 전통의 모티브를 따라간다. 남성스트립댄스팀 ‘킹스 오브 탐파’를 떠나 맞춤 가구 제작자로 새 생활의 기반을 잡은 마이크(채닝 테이텀)가 동료들과 재회하면서 이야기는 스텝을 밟기 시작한다. 화려한 퍼포먼스가 무대와 클럽에서 여러 차례 펼쳐지는 이 영화에서 가장 매혹적인 춤의 배경은 공구가 흩어져 있는 목공 작업장이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힙합곡 <PONY>가 혼자 자재를 용접하던 마이크의 봉인된 댄서 본능을 건드린다. “어휴, 뭐 이런….” 어이없다는 투로 고개를 슬쩍 저은 마이크는 항복한다. 안전 마스크를 툭 떨구는 동작을 신호로 의자와 탁자, 벽을 미끄러지며 리듬을 타는 그에게 드릴과 쇠막대기는 에로틱한 안무의 소품이 된다. 그러고 보니 <플래시댄스>의 알렉스(제니퍼 빌스)의 직업도 용접공이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