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김영진의 영화비평] 이념보다 강한 신념
2015-11-24
글 : 김영진 (영화평론가)
개인을 향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진중한 시선
<스파이 브릿지>

스티븐 스필버그가 <슈가랜드 특급>(1974)을 만들었을 때 평론가 폴린 카엘은 “앞으로 수년 내에 청년 스필버그가 미국영화계를 접수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극장 데뷔작 <대결>(1971)이나 <슈가랜드 특급>, <죠스>(1975), <미지와의 조우>(1977), <1941>(1979) 등으로 이어지는 스필버그의 초기 필모그래피는 젊은 영화광이 만들 수 있는 최상의 경지를 보여준다. 할리우드를 타락시킨 블록버스터 멘털리티의 효시로 폄하받은 <죠스>도 지금 다시 보면 고전의 아우라가 풍긴다.

카엘의 눈은 예지력이 있었지만 스필버그가 존 포드의 뒤를 잇는, 신고전주의 영화를 만드는 거장이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나도 젊었을 적엔 스필버그 영화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영화광의 유희정신으로 가득 찬 <레이더스>(1981)에 대해서도 시큰둥했다. 1994년 서던캘리포니아대학 졸업식에서 스필버그는 이런 말을 했다. “제 영화들은 가끔 좀 어린애 같은 데가 있다고 비난받습니다. 저는 그것을 비난이 아니라 칭찬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저는 우리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능력은 호기심, 즉 우리 주위의 세상에 관한 순수한 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70년대의 스필버그가 영화청년이었고, 80년대의 스필버그가 흥행사였다면, 90년대의 스필버그는 반쯤 공인받은 거장이었고, 2000년대 이후의 스필버그는 입을 다물게 만드는 거장이다. 여전히 그는 ‘주위 세상에 대한 순수한 관심’으로 영화를 만들지만 깊이가 다르게 느껴진다. 사건보다는 사건을 겪는 인간들에 대한 좀더 신중한 시점의 응고라고 할까, 괄호 치고 인물을 그대로 놔둔 채 바라보는 유예의 호흡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초연함이라는 매력

스필버그의 신작 <스파이 브릿지>는 스펙터클한 사건을 보여주기보다 사건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점층 쌓아올려 극적인 곡선을 상승시킨다. 인상적인 볼거리가 약한 영화적 사건의 지리멸렬함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링컨>(2012)과 유사하지만 이 영화가 더 강력한 인상을 주는 것은 보험전문 변호사 도노반(톰 행크스)이 억지로 떠맡아 변호하게 되는 소련 스파이 아벨(마크 라일런스)의 포커페이스 때문이다. 아벨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도 희로애락을 드러내지 않는다. 미국 사법제도의 관대함을 선전하는 데 봉사하려는 회사의 방침으로 아벨의 변호를 맡은 도노반은 첫 대면 때부터 아벨에게 호감을 느끼는 듯 보인다. 전문가로서 느끼는 일의 재미 외에 그는 이 일의 당위를 느낄 수 없었지만 사형을 당할 수도 있다는 자신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는 아벨에게 살짝 놀란다. 두렵지 않느냐고 묻는 도노반에게 아벨은 두렵지만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나요?”라고 반문한다. 그의 이 말은 영화에서 수차례 되풀이된다.

자기 목숨을 구걸하지 않은 채 자기 운명을 수수방관하는 듯 구는 아벨의 속내는 끝까지 알 수 없다. 그가 애국자인지, 굳은 이념의 소유자인지 여부도 알 수 없다. 도노반과 아벨은 그에 관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들은 주로 재판에 관한 실무적인 얘기만 나눌 뿐이다. 도노반은 묻고 아벨은 답한다. 도노반은 아벨의 반응을 지켜본다. 이것만으로 스필버그는 도노반이 겪는 캐릭터의 진화를 관객이 납득하도록 만든다. 단순하지만 능란한 솜씨다. 도노반은 스필버그가 말했던,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능력인 호기심, 세상에 대한 순수한 관심’을 지닌 사람이다. 그는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표정의 아벨을 거듭 지켜보며 바로 그 때문에 아벨에게 마음으로 다가간다. 이건 도노반에게도 쉽지 않은 변화다. 영화에서 우리가 처음 보게 될 때 그는 능숙한 화술로 피해자쪽 변호사를 제압하는 보험전문 변호사였다. 피해자 다섯명의 개별 보상을 원하는 상대 변호사에게 그는 일괄 보상을 주장한다. 재해가 발생해 집이 파손됐을 때 집 안의 가구 등을 개별 보상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도노반은 어르고 달래며 상대방의 논리를 제압한다. 인간인 피해자들을 물건인 집으로 등치시키는 화법을 구사했던 그가 자신과 다른 이념을 지닌 적성국의 반역자를 위해 변호하게 됐을 때 그의 변화는 논리적이지 않지만 영화는 이를 설득해낸다. 이익을 계산하는 그는 계산하지 않는 상대에게 호감을 느낀다.

실리를 계산하는 게 몸에 붙은 그의 캐릭터에 변화가 있는 건 아니다. 변호사이자 동시에 협상가로서의 그는 협상에 따르는 유불리를 영민하게 계산한다. 심리 기일을 연기해줄 것을 판사에게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도노반은 판결이 임박하자 판사 집을 찾아가 일종의 거래를 요청한다. 언젠가 소련에 미국쪽 스파이가 붙잡힐 경우를 대비해 아벨을 사형시키는 판결은 말아달라는 도노반의 제안을 판사는 흥미롭게 생각한다. 이건 도노반이 예지력을 지닌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협상가로서의 꾀에서 나온 거래였다. 영화의 후반, 소련 영공에서 첩보 촬영을 하다 체포된 조종사 프랜시스 파워스와 아벨을 맞교환하는 임무를 떠맡은 도노반은 두 사람의 맞교환뿐만 아니라 동독에서 구금당한 미국인 대학생까지 구해내려고 한다. 협상가로서의 도노반은 변호사로서 그가 내세우는 명분과는 전혀 다른 노선을 택해 승리한다. 협상가로서의 그는 선공을 하는 상대의 제안보다 더 황당한 역제안을 함으로써 자기 주장을 고수하는 전략을 지켜 애초 의도를 관철시킨다. 아벨의 변호사로서 그는 다르게 행동했었다. 아벨에게서 정보를 빼낼 것을 요구하는 FBI 요원에게 도노반은 규정을 지킴으로써, 곧 헌법적 가치를 지킴으로써 같은 미국인으로 살고 있는 그 자신과 FBI 요원의 위치를 상기시켰다.

<스파이 브릿지>

위장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대결

어떤 면에서 <스파이 브릿지>는 극단의 전문가주의를 찬미하는 하워드 혹스 영화의 본질을 잘 계승하는 영화다. 표면적으로 도노반은 미국의 헌법적 가치를 명분으로 내거는 영웅처럼 보인다. 그의 예외적 개인의 핵심은 다른 데 있다. 그는 패배하지 않는 그 분야의 전문가다. 도노반은 자신의 일을 회의하지 않는다. 그는 직업적으로 사명을 맡은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아벨의 변호를 맡았을 때 그는 주변에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비난하는 적지 않은 고초를 겪는다. 익명의 괴한들이 쏜 총탄들이 집 안으로 날아들어오고, 전철을 타면 신문을 읽던 수많은 군중이 자신을 비난하는 시선으로 쳐다봐도 그는 개의치 않는다. 그에게 아벨의 변호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을 잘 수행하기 위해 그는 명분을 찾는다. 일에 충실하기 위해 그는 FBI 요원의 부당한 제안을 거절한다. 아마도 그에게는 고객과의 신뢰가 더 중요했을 것이다. 아벨 역시 도노반과 같은 입장을 견지하는 전문가다. 그는 기계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스파이다. 법정에서 사형을 면했을 때도 그는 오히려 어리둥절해하며 사형시키지 않는 것이냐고 도노반에게 반문한다. 동독의 다리에서 미국 장교와 맞교환하는 순간을 맞아서도 그는 귀국 후의 자신의 운명에 대해 동요하지 않는다. 아벨은 다리를 넘어갔을 때 관계자들이 자신을 포옹하지 않고 차 뒷자리에 태우면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그는 건조한 분위기로 그를 맞는 관계자들에 이끌려 차 뒷자리에 앉는다. 그는 고초를 겪겠지만 미국에서 잡혔을 때 그랬듯이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아벨이 유일하게 살짝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은 도노반이 가져온 라디오로 감옥 면회실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들을 때다. 그는 그때만 유독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아내가 음악가였다는 사적인 얘기를 도노반에게 털어놓는다. 아벨의 유일한 휴식처는 예술이다. 동독의 다리에서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 아벨은 도노반의 초상화를 그린 선물을 전해준다. 아벨이 그린 도노반의 초상화는 아벨이 그린 자화상과 마찬가지로 어떤 구체적인 표정도 지시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 두 사람이 같은 부류의 성정을 지닌 사람이며 자신들의 전문가주의에 대한 헌신, 그것만이 이 세상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는 걸 확인하는 표식이다. 아벨은 자신의 예술로 도노반에게 우정을 선사한다.

스파이 맞교환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귀국 비행기에서 도노반은 요원들의 냉대에 어쩔 줄 몰라하는 조종사 프랜시스 파워스에게 남들이 뭐라 하든 자신만 떳떳하면 된다고 충고한다. 도노반과 아벨은 그럴 수 있는 자존감의 소유자들이지만 프랜시스 파워스를 비롯해 영화 속 다른 인물들은 그렇지 않다. 요컨대 이 영화는 자신과 같은 부류를 알아볼 수 있는, 그럼으로써 민감하지만 강한 우정을 맺을 수 있는 주인공들과 그와 다른 부류의 사람들로 나뉜다. 아벨과 도노반은 전문가주의라는 이념에만 의존함으로써 주변 세상과 자신의 운명을 공평무사하게 볼 수 있다. 그에 반해 국가가 선전하는 이념에 포획되어 선악의 이분법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는 사람들은 평범한 대중이다. 영화 초반, 도노반을 적대적으로 쳐다보던 전철 안의 대중은, 영화 후반 스파이 맞교환을 성공리에 조율하고 일상의 업무로 복귀한 도노반을 따뜻한 눈으로 쳐다보는 전철 안 중년 여인의 시선으로 귀결된다. 도노반은 승리자로서 그 환대의 시선을 즐기지만 세상 밖의 질서는 변하지 않았다. 그가 전철 밖으로 바라보는 풍경에 잡히는, 젊은이들이 담장을 뛰어넘어 장난치며 놀고 있는 모습은 그가 동독에서 본, 베를린장벽을 넘다 사살당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으로 메아리친다.

이것은 자유세계 미국과 폐쇄적인 공산국가 동독의 역사적 현실을 환기시키는 장치이며 도노반이 개입할 수 없었던, 그리고 현재형으로 진행되는 세상의 비극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그 세상의 비극을 이끌고 있거나 거기에 봉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투형에 갇힌 대중의 이분법적 시선으로 대변하는 한편, 그 시선을 조종하는 또 다른 세력의 모습을 드라마에 배치해놓고 있다. 도노반을 동독에 민간인 협상가 자격으로 파견하는 FBI 관계자들은 국가의 대리자임을 자임하면서 대중의 상투적인 생각을 조종하는, 그러기 위해 연기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애국심을 강요하지만 애국심을 실행하는 개인들에게는 무자비하다. 이는 도노반이 상대하는 적성국 관계자들, 소련과 동독의 고위직 인사들도 마찬가지다. 도노반이 최초의 접선장소인 동독의 소련 대사관에 갔을 때 그를 맞이하는 것은 아벨의 가족을 연기하는 무리들이었다. 소련 외교관으로 소개했던 이는 KGB 요원이었고 아벨 가족의 변호사를 자청했던 동독인 보겔은 동독 법무부 장관 끄나풀이었다.

소련과 동독의 관계자들이 도노반과의 협상에서 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국가의 대리자들로서 그렇지 않은 척 연기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겉으로 강경하게 도노반을 밀어붙이지만 국가의 대리자가 아닌 직업적 전문가로서 그들을 대하는 도노반을 이길 수는 없다. 도노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1 대 2 스파이 교환을 추진하는데 미국 조종사와의 맞교환으로도 만족하는 FBI 요원은 계속해서 도노반을 압박하지만 도노반은 굴하지 않는다. 이는 법정드라마 형식의 전반부에서 겁에 질린 자들(대중)과 겁에 질리지 않은 자(도노반과 아벨)의 대립구도로부터 스파이 맞교환을 둘러싼 스릴러로 전환하는 후반부로 매끄럽게 이어지게 하는 절묘한 장치다. 후반부에서는 연기하는 자(소련과 동독의 관계자)와 연기하지 않는 자(도노반)의 대립구도가 펼쳐진다. 도노반은 소련과 동독의 협상당사자들에게 자신은 미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얘기하면서 협상에 임한다. 어떤 계산도 없이 우직하게 애초 목적을 밀고 나가는데도 드라마의 개연성이 훼손되지 않는 것은(실화에 기초한 이야기라는 걸 감안해도) 이것이 위장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대결이라는 골격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인물의 표정으로 만드는 드라마

<스파이 브릿지>의 첫 장면에서 우리는 자신의 거처에서 자화상을 그리는 아벨을 본다. 아벨의 그림과 아벨 자신을 오가는 우아한 카메라 움직임은 그려진 아벨과 그리는 아벨의 차이를 세심히 관찰하는 듯 보인다. 큰 차이가 있을 리 없다. 대칭으로 합치된 이 장면의 이미지는 견고하다. 대칭은 보통 좋은 편과 나쁜 편으로 나뉜다. 한 사람에게서도 좋은 면과 나쁜 면이 있을 수 있다. 이 장면에서 차이가 나는 게 있다면 빛의 질감뿐이다. 사람은 명에도 암에도 노출될 수 있다. 세상도 마찬가지다. 어느 편에 서느냐는 운명이 가를 뿐이다. 대다수는 그들의 운명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 이 영화의 두 주인공은 그걸 명확히 아는 것 같다. 자신의 행위가 고국 소련에는 애국이고 적국 미국에는 반역이라는 걸 아는 아벨이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대하는 것은 “그런다고 달라질 게 있겠소?”라고 묻는 그의 태도에 묻어 있다. 그는 스파이라는 자기 직분에 충실했다. 마찬가지로 도노반도 변호사이자 협상가로서의 자기 직분에 충실했다. 그는 변호사로서 반역자를 변호했고 협상가로서 자국 국민을 구출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들이 보고 겪은 것은 세상의 비극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만날 수 없는 친구가 되었다. <스파이 브릿지>는 여기까지만 보여줌으로써, 세심하게 절제함으로써 격을 성취했다.

<죠스>는 물론이고 <쉰들러 리스트>(1993),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로부터도 스필버그는 훨씬 더 멀리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역동적이고 대담한 기교나 감상적인 장식 없이도 그는 인간의 존엄을 찍는 방식을 세련되게 발전시켰다. 존 포드가 말했던 대로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표정을 찍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그는 무표정한 한명의 주인공 아벨을 놓고 거기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변화한 또 다른 주인공 도노반을 한축으로 묶은 다음, 주체성이 제거된 숱한 등장인물들의 영혼 없는 모습을 주변에 차곡차곡 쌓으며 드라마를 전개시킨다. 미국영화의 위대한 전통은 예외적인 개인을 어떤 명분에 가두지 않고 묘사하는 데 있었다. 명분을 내세우는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프로파간다에 포획당하기 쉽다. 전세계에서 가장 선동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미국영화가 그 호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선동의 명분을 가리는 장치에 능한 덕분이다. 이것은 전문가주의를 대변하는 개인에의 몰두로 요약될 수 있는 전통이고 하워드 혹스나 앤서니 만 등의 위대한 감독들이 쌓아 놓은 업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 스필버그는 지금 바로 그 전통을 보이지 않게 계승하며 신고전주의의 대표적인 감독으로 자신을 재위치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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