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우혜경의 영화비평] ‘동시대성’이라는 만만찮은 적
2015-11-26
글 : 우혜경 (영화평론가)
007이라는 ‘장르적’ 제약과 ‘비평과 흥행의 온도차’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07 스펙터>

개인적으로 신기하게 생각하는 말 중 하나가 바로 ‘비평과 흥행의 온도차’이다. 미지근하게 섞이는 대신 각자의 ‘온도’를 유지하겠다는 양쪽의 패기도 호기롭지만, 이렇게 타협 없이 차이를 낳고 마는 영화들의 목록이 꽤 흥미롭기 때문이다. 샘 멘데스의 두 번째, 대니얼 크레이그의 네 번째 007, <007 스펙터>(이하 <스펙터>)는 최근 이 목록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고, 그래서인지 나는 이 영화가 조금 더 궁금해졌다.

비평의 ‘차가움’

흥행의 ‘뜨거움’은 분명 007 시리즈에 대한 관객의 낮은 진입 장벽과 높은 기대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지난 23편을 거쳐오면서 007 시리즈는 관객을 꾸준히 훈련시켜왔다. 우리는 제임스 본드가 멋지게 슈트를 입고, 신기에 가까운 최첨단 무기를 장착한 다음, 세계 곳곳을 누비며 ‘악당’을 제거하는 MI6의 미션을 수행할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총소리와 함께 시작될 타이틀 시퀀스도, 매혹적인 ‘본드걸’의 등장도 우리는 매번 지치지 않고 기다린다. 이쯤되면 사실 007 시리즈는 일정한 규칙을 가진 하나의 ‘장르’라고 보아도 무방할 지경이다. 특히 본 시리즈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에 비해 007 시리즈는 (역사가 긴 만큼) ‘장르의 틀’이 훨씬 더 견고한 편이어서 ‘변주’의 여력은 별로 크지 않다. 그러다 보니 관객을 쉽게 극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그들을 만족시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샘 멘데스는 2012년, <007 스카이폴>(이하 <스카이폴>)로 007 시리즈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만 3년 만에 나온 그의 두 번째 007이니 <스펙터> 대한 관객의 기대는 높아질 대로 높아져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를 방증이라도 하듯 <스펙터>는 전작보다 빠른 속도로 흥행 기록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 때 잘 말해지지 않는 것은 영화를 본 다음 관객이 느끼는 상당한 실망감이다. 얼마 전 한 인터뷰에서 대니얼 크레이그 이전 ‘제임스 본드’였던 피어스 브로스넌은 심지어 “굉장한 것을 기대했는데 너무 길고 스토리가 약했다”며 <스펙터>에 대한 큰 실망을 표하기도 했다. 비평의 ‘차가움’도 사실 이와 같은 실망감에 크게 기대어 있다. 물론 전작 <스카이폴>에 비해 이야기의 짜임새도, 액션의 쾌감도 덜하다는 불평에 토를 달 생각은 별로 없다. 하지만 이 온도차에 가려 샘 멘데스가 (<스카이폴>을 거쳐) <스펙터>에서 성취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이었는지 잘 이야기되어지지 않는 것은 다소 아쉬운 일이다.

<스펙터>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제임스 본드에게 주어진 미션이 없다는 점이다. <스카이폴>에서 죽은 M(주디 덴치)이 남긴 영상 지령이 있지 않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M이 남긴 메시지는 “내가 죽게 되면 ‘마르코 스키아라’를 찾아 죽여라. 그리고 장례식까지 가서 그의 죽음을 확인해라”였다. M의 지령이 <스펙터>의 제임스 본드의 미션이라면, 멕시코에서 스키아라를 헬기에서 밀어 떨어뜨리고, 로마로 날아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해 죽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영화가 끝났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샘 멘데스는 150여분의 상영시간에서 단 30여분 만을 M의 지령을 완수하는 데 할애한 뒤, 이후 영화의 대부분을 제임스 본드의 ‘독자 행보’를 좇는 데 사용한다. 기능이 거의 정지되어버린 MI6 본부에서 죽은 M을 대신해 새로 부임한 M(레이프 파인즈)은 자꾸만 ‘말썽’을 일으키는 제임스 본드를 사실상 모든 임무에서 제외해버린다. 그리고 그를 실시간으로 감시하기 위해 몸속에 추적 칩까지 심어놓기로 결정한다. 이에 본드는 Q(벤 위쇼)에게 자신을 “사라지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Q는 48시간 동안 추적을 몰래 유예해준다. 이때 Q는 본드에게 이렇게 말한다. “휴가 잘 즐기시길!”(Enjoy your downtime, 007!” 결국, 이후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제임스 본드의 (미션이 아닌) ‘휴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미션이 작동하지 않는 시간’(downtime)에 대한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제임스 본드의 휴가에 하필 하나둘, 죽은 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등장한 자막, ‘죽은 자들이 살아오다’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스펙터>의 당혹스러운 리듬감

처음으로 본드를 찾아온 사자(死者)는 M이다. <스카이폴>에서 죽음을 맞이한 M은 마지막 지령을 내리는 영상으로 등장한다. 이 지령을 따라 본드가 향한 첫 번째 장소는 ‘죽은 자들의 날’ 축제이다. <스펙터>에 만족한 관객이든 혹은 실망한 관객이든 멕시코시티에서 벌어지는 이 오프닝 시퀀스의 매혹에 대해서는 동의할 것이다. ‘죽은 자들’로 가득한 이 축제에서 해골 마스크를 쓴 본드는 스키아라를 죽이기 위해 추격을 벌이고 그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스키아라를 ‘죽은 자’의 대열에 합류시키자 뒤이어 등장한 것은 M의 유품에서 우연히 발견한 한장의 사진 속 또 다른 죽음이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후견인의 손에 맡겨졌던 본드 앞에 산사태로 죽은 줄만 알았던 ‘형제’, 오버하우저(크리스토프 왈츠)가 등장한 것이다. 같이 자랐지만 모든 면에서 본드보다 열등했던 그는 친아버지로부터 인정받는 데 실패한다. 먼 길을 돌아 자신을 찾아온 본드에게 오버하우저는 지난 세편 동안 본드의 살인면허로 인해 사자가 된 이들을 폐허가 되어버린 MI6 건물에 전시한다. 그리고 이 모든 죽음이 사실은 자신의 조직, ‘스펙터’와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본드에게 알린다. 그런데 007 시리즈 최고의 악당으로 손꼽히는 오버하우저(스펙터)가 <스펙터>로 돌아와 비난을 면치 못하는 까닭도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네편의 시리즈를 관통해 오버하우저가 가져온 ‘죽음’들이 결국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친아들이 이복형제(본드)에게 벌이는 인정투쟁에 불과한 것이었다니 허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정확하게 <스카이폴>에서 M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실바’(하비에르 바르뎀)의 인정투쟁과 짝패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생각한다면, <스펙터>에서 샘 멘데스는 제임스 본드에게 ‘악당’과 싸우는 임무를 주는 대신 ‘사색’을 위한 휴가를 선물한 것 같기도 하다. 오버하우저의 기지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매들린(레아 세이두)은 본드에게 그림자처럼 숨어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직업을 왜 택했냐고 질문한다. ‘생각’해본 적이 없어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본드에게 그녀는 선택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오버하우저가 다른 어떠한 악랄한 방법 대신 본드의 머리에 구멍을 내 생각을 정지시키려 했던 것도, 영화의 마지막, ‘살인면허’를 가진 본드가 ‘악당’ 오버하우저를 눈앞에 두고 (매들린의 행동을 반복하며) 장전된 총을 풀고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 상황이 설명 가능해지는 것도 사실은 이 때문이다. ‘미션-완수’의 꽉 짜인 공식에 맞추어 움직였던 007, 피어스 브로스넌에게 <스펙터>의 ‘사색적 본드’ 스토리가 ‘약해’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샘 멘데스는 <스카이폴> <스펙터>를 통해 자신만의 007을 성공적으로 빚어냈지만, 앞선 22편이 남겨놓은 ‘유산’(legacy)을 완전히 극복하는 데는 실패한 듯 보인다. 007이라는 ‘장르적’ 제약을 인정하고, 여기에 더해 냉전시대의 산물인 007의 존재에 동시대성을 부여하는 일이란 녹록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대체로 성공으로 평가되는 <스카이폴>에서 언뜻언뜻 느껴지는 피로감도, 관객의 불평을 키우고 만 <스펙터>의 당혹스러운 리듬감도 그렇게 실망스럽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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