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윤웅원의 영화비평]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로가 필요하니까
2015-11-26
글 : 윤웅원 (건축가)
난민 가족에게 있어 주택의 형식과 집의 의미는…
<디판>

영화에서 서사와 공간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개인은 출신, 계층, 성향 등과 연관되어 도시의 공간을 살아내고, 도시는 이런 개개인의 욕망이 집단적으로 투사된 장소로 나타난다. 자크 오디아르의 새 영화 <디판>(2015)을 보고 영화 속 공간을 설명하는 것이 영화의 서사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는 차례로 텐트로 이루어진 스리랑카 난민캠프, 파리의 방 한칸짜리 난민센터, 파리 변두리의 슬럼화된 집합주거단지의 아파트, 런던의 교외지역 단독주택이 나온다. 영화의 공간은 뒤로 갈수록 사적인 성격이 강화된다.

오디아르는 자신의 새 영화를 사랑에 관한 영화라고 말했다고 한다. 많은 영화들은 사랑에 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므로 오디아르의 설명은 영화를 공간을 통해서 설명하려는 목적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것보다는 좀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한데, 스리랑카 타밀 독립전쟁 중에 자신의 가족을 잃은 남자, 여자, 소녀가 함께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것에 관한 영화라는 것이 좀더 나은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모르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이제부터 가족이다”라고 결정했을 때, 이들이 가족이 될 수 있다면 어떤 조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는 영화라면 영화의 서사 속에서 가족에게 필수적인 공간, 즉 집의 의미를 찾아보는 것이 가능해진다.

마지막 남은 안식처를 찾아서

도시의 역사에 대한 많은 해석이 있지만 영국의 건축가 세드릭 프라이스가 도시의 공간 구조를 계란 요리에 비유한 것만큼 쉽고 명확한 설명은 많지 않다. 도시를 요리에 비유하는 것이 주는 생경함에도 불구하고 이 비유는 형태뿐만 아니라 질적인 문제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그는 단계별로 중세의 성곽도시를 삶은 계란, 대포의 발전으로 성곽도시가 해체되고 도시가 성곽 너머로 확장되는 근대도시를 프라이드 에그, 그리고 위성도시들이 통합되는 현대의 거대도시를 스크램블 에그로 표현했다. 위 비유를 좀더 느슨하고 넓게 적용하면 하니 아부-아사드의 <오마르>(2013)에서 벽으로 구분된 팔레스타인 거주지역과 이스라엘 점령지역이 성곽도시의 현대적 버전이고, 마티외 카소비츠의 <증오>(1996)가 파리 중심과 변두리의 관계, 즉 노른자와 흰자의 관계라면 오디아르의 <디판>은 중심과 변두리의 질서가 무너지고 끊임없는 경계들로만 이루어지는 오늘의 스크램블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스리랑카 타밀 반군의 군복을 벗고 디판이란 이름의 새로운 신분을 산 남자는 스리랑카를 탈출하기 위해서 처음 만난 여자(얄리니)와 소녀(일라얄)와 함께 임시가족을 꾸미고, 난민지위를 통해서 프랑스로 떠난다. 이들이 가족이 되는 장면에서 배경으로 보이는 난민캠프는 집의 경계가 허물어진 장소이고, 얄리니가 쉽게 가족의 경계를 넘어 부모를 잃은 소녀 일라얄을 데리고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배경이 된다.

프랑스로 떠나기 위해 배를 타는 장면 이후 암전이 되면 어둠 속에서 빛나는 나비 모양의 물체들이 가까워진다. 관객은 이것들이 발광하는 머리띠, 디판이 거리에서 팔고 있는 싸구려 장신구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된다. 이 장면은 프랑스에서 디판의 삶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밝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넌지시 암시한다. 영화에서는 두번 코끼리 모습이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장신구를 팔다 경찰을 피해 도망치는 장면 이후 디판이 무력감에 빠져 있을 때이다. 코끼리의 이미지가 인도 신화의 지혜의 신 가네샤로도 해석될 수 있지만 그보다는 남재일이 표현한 “풀만 먹으면서 초식동물의 공포와 육식동물의 자의식에서 해방되는 삶” 코끼리 판타지에 가까워 보인다.

디판 가족을 위한 파리의 첫 번째 주거는 난민센터의 숙소이다. 가운데 탁자가 놓여 있고 벽쪽으로 2층 침대가 있는 방 하나가 이들 가족에게 배정된 공간이다. 집이라기보다는 화장실과 주방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기숙사에 가깝다. 텐트로 이루어진 난민캠프가 집이 경계가 사라진 장소라면, 난민센터의 숙소는 다른 가족과의 경계는 있지만 여전히 가족 구성원 사이의 사적 구분이 없는 곳이다.

난민지위를 인정받은 후 정착한 파리의 르 프레는 <증오>에서와 같은 파리의 방리유(Banlieue, 대도시의 교외, 시외라는 뜻)이고 범죄조직간의 암투가 벌어지는 슬럼화된, 스리랑카 분쟁지역의 연장선으로서의 변두리 지역이다. 디판은 아파트의 관리인으로 일하게 되는데 마당을 사이로 인접한 건물들은 보수공사가 중단된 상태이고, 지역의 불량배들이 마약을 거래하는 장소로 쓰이고 있다.

디판의 집은 프랑스의 다른 건물관리인들처럼 현관 옆 지상층에 위치해 있다. 디판의 가족은 마침내 이 아파트에서 각자의 방을 갖게 되는데, 이상하게도 아파트 장면에서는 항상 문들이 열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더운 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의 주거문화로 읽힐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세 사람을 소통하게 만들어주는 공간적 장치로 보인다. 이렇게 열린 문을 통해서 소녀 일라얄이 얄리니와 디판의 공간으로 다가가고, 술에 취한 디판이 얄리니와 일라얄의 침대 사이에서 깨어나며 서로를 받아들인다. 세 사람이 같은 방에서 깨어나는 이 장면 이후 디판은 지갑 속에 간직하고 있던 죽은 가족의 사진을 정성스럽게 액자로 만들고, 작은 창을 달아 잠그는 행동을 한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설정은 오디아르의 영화에서 자주 사용된다. <디판>에서 소수 언어인 타밀어는 디판의 가족이 피의 혈연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서만 소통되는 언어의 혈연을 통해서 유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디판의 아파트는 언어적으로는 외부로부터 분리된 공간이고, 내부의 열린 공간 구조와 함께 임시가족이 진짜가족이 되기 위한 기본조건이 된다.

마지막 남은 안식처를 찾아서

디판과 얄리니와 일라얄은 조금씩 르 프레의 생활에 적응하고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짧은 평화는 아파트 단지에서 벌어진 갱들 사이의 총격 사건 때문에 끝이 난다. 그리고 얄리니는 르 프레의 불안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사촌이 있는 런던으로 도망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자신을 떠나려는 얄리니 때문에 고민하던 디판은 마당에 흰색 선을 표시하고, 사격 금지 구역을 선포한다. 하지만 타밀 독립선언처럼 경계를 표시함으로써 쟁취하려던 평화는 오히려 디판이 동네 갱단의 살해 위협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 사건 이후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아파트에서 벌어진 총격 사건에 휘말린 얄리니를 구출하기 위해서 디판은 스스로 그어놓은 마당의 선을 넘고 이렇게 파리 근교의 아파트 단지는 디판이 가족을 지키기 위한 전쟁터로 변해 버린다. 디판은 타밀 반군으로 밀림의 숲에서 습득한 생존 본능을 아파트 단지와 건물 계단을 오르며 보여준다.

장면이 바뀌면 교외 단독주택 단지에 영국식 택시가 나타나고, 택시운전사로 변한 디판이 보인다. 디판이 단독주택의 1층 거실을 가로질러 집 뒤 정원에 도착하면 파티을 하고 있는 여러 사람들이 보인다.

파리가 아파트 같은 대규모 집합주택으로 도시 근교가 발전했다면 런던 근교의 대표적인 주거유형은 개인주택이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배경으로 단독주택(Detached House)의 선택이 단순히 런던의 주거형식에 대한 고려 때문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르 프레의 아파트 마당에 선을 그어서 사격 금지 구역을 선포한 행위의 연장선으로, 디판에게는 자신에게 귀속된 외부공간이 필요했다고 생각된다. 런던에는 서민형 개인주택으로 열지어 서 있는 테라스드 하우스(Terraced House)가 있지만 벽을 옆집과 공유하기 때문에 공동주택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리고 르 프레에서 디판의 싸움은 온전히 얄리니를 구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타밀 반군의 전쟁이 대의를 위한 것이라면 르 프레에서 디판의 전쟁은 가족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그리고 디판은 공동의 이상(공동주택) 대신 가족(단독주택)을 선택했다. 그것이 “초식동물의 공포와 육식동물의 자의식에서 해방되는 삶” 디판의 코끼리, 단독자의 삶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스크램블 세계에서 마지막 남은 안식처는 가족이고, 그렇게 영화는 주변 건물과 분리된 단독주택의 뒷마당 파티에서 끝이 난다.

얄리니의 손의 의미

나는 위 문장을 적고 이 글을 끝내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단독주택의 행복한 가족으로 끝나는 이 마지막 장면을 해피엔딩으로 느끼질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다가 마지막 단독주택의 선택을 영화의 서사 구조 안에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단독주택과 파리 방리유의 집합주택 단지를 선악구도로 배치한 것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21세기 중요한 도시 현상 중에 “부르주아 어버니즘”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 있다. 도시가 자본의 영향 아래 있을 때 부자동네는 점점 잘사는 동네로, 가난한 동네는 점점 가난하게 변한다. 런던에도 타워 블록이라 불리는 파리의 방리유 집합주택에 해당하는 슬럼화된 공동주택 타입이 있다. 자본의 측면에서 본다면 오늘의 도시는 스크램블 에그처럼, 잘사는 동네와 가난한 동네가 점점이 박혀 있는 넓게 퍼진 지역이다. 영화에서 파리의 가난한 타밀 이민자들은 공원의 한구석에서, 집에서 준비해온 음식을 갖고 피크닉을 한다. 그해 비해서 런던의 단독주택 파티는 지나치게 중산층의 향기가 난다. 너무 단순화된 해석이 되겠지만 디판이 지나온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나의 가족과 집이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불편하다. 그러다 영화를 다시 보고나서, 내가 디판의 머리를 쓸고 있는 얄리니의 손의 의미를 간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앞의 글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고처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영화는 뒷마당의 평화로운 파티에서 디판의 머리를 쓸고 있는 얄리니의 손을 클로즈업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디판은, 아니 우리 모두는 여전히 위로가 필요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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