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연결’을 생각한다
2015-12-09
글 : 이화정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산문집 <보다> <말하다> <읽다> 연작 출간한 소설가 김영하를 만나다

“주택에 산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에요.” 인터뷰로 마주한 카페에서 김영하 작가의 휴대폰은 바빴다. 이사 간 집 관련해 여기 저기서 문제들이 쏟아졌고, 김영하 작가는 잠깐 작가이기 이전에 생활인으로 그 사항을 인터뷰와 동시에 척척 처리해나갔다. 군인이던 아버지를 따라 관사에서 살았던 유년기를 제외하고 쭉 고층 아파트에서 살았던 그에게 야외를 접하며 글을 쓸 수 있는 주택은 로망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김영하 작가가 지난 7년간의 뉴욕과 부산의 삶을 정리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의 ‘서울살이’의 포문을 여는 작품은 일련의 산문집 <보다> <말하다> <읽다> 연작이다. <보다>에 수록하기 위해 그간 <씨네21>을 비롯한 잡지에 기고한 글을 발췌하고, 그간의 강연을 모두 모아 정리해 <말하다>에 배치하고, 마지막 세 번째 시리즈인 <읽다>에서는 그의 소설의 토대가 된 고전을 심층적으로 파고든다. 문득, 지령을 받고 서울에 와서 산 스파이가 뜻하지 않게 북으로 소환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빛의 제국>에서의 스파이 ‘김기영’의 서울이 떠올랐다. 등단한 지 올해로 20년, 김영하 작가가 택한 ‘힘든’ 서울살이와 더불어, 지금 그가 겪고 있는 변화의 지점은 어떤 것일까.

‘소환’이라고 했다. 김영하 작가는 부산에서 지내던 2013년, 영화 <위대한 개츠비>(2013)가 개봉하면서 번역가로서 이런저런 인터뷰나 이벤트 요청을 받았다고 했다. 다소 갑작스러운 이런 요청을 두고 그는 ‘소환’이라고 정의했다. 타이틀을 가진 작가에게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김영하 작가에게 그동안 이런 요청은 끊이지 않아왔다. 하지만 부산과 그 이전에 살던 뉴욕이라는 물리적 거리로 인해 그는 이 ‘관계’를 늘 최소화할 수 있었다. 부산은 그가 서울에서 벌어질 무수한 관계망에 얽히지 않을, 그래서 오로지 글을 읽고 책을 쓰는 데 전념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자 거름망이었다.

그런 그를, 뜻하지 않게 올 9월쯤 연일 사회면에서 접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유는 이랬다. 그가 3년간의 부산 생활을 접고 서울 연희동의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왔는데, 마침 그가 이사 온 동네인 ‘개나리언덕’에 신축 빌라 건설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숲과 언덕이 사라질 위기에서 김영하 작가는 주민들의 힘을 모아 기꺼이 ‘투쟁’의 선두에 섰다. ‘펜 대신 주먹 쥔 작가’라는 신문의 제목과 굴착기로 파헤쳐진 땅을 배경으로 꼭 쥔 두손을 보는 건 생경한 경험이었다. 조용한 집필실을 꿈꾸며 이 산자락에 터를 잡은 그는, 이사 온 그길로 원고 대신 수십건의 민원서를 써서 구청에 제출하고, 그곳의 상황을 외부에 알릴 수 있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달 후 서대문구청이 궁동산 자락 개나리언덕 난개발을 철회했다. 자본과 이권이 개입한 개발의 중심에서 보여준 작가의 영향력은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그가 말한 소환의 문제가 떠올랐다. 글쓰기와 책읽기를 위해 삶을 최적화했던 그가, 외부의 요청도 아닌데 이렇게 스스로를 ‘소환당하게’ 한 건 어떤 이유였을까. 그 변화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

지난해 9월부터 그가 연속 집필한 일련의 산문집은 <보다> <말하다> <읽다>로, 세권의 책은 그 변화에 대한 주석 같은 글이다. 2013년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이후 그는 후속작으로 소설 대신 이 세권의 산문집을 발표했다. 그는 소설 작품에서는 드러내지 않았던 ‘주관’으로, 영화와 드라마를 사회적인 시선으로 ‘보고’ , 자신의 글쓰기의 방법론을 통해 청년들에게 작가 김영하가 어떤 과정을 거쳐 구축되어왔는지 ‘말하며’, 지금의 김영하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게 하는 데 뼈대가 되었을 고전을 다시 ‘읽어’ 그 가치를 공유하게 해준다. 소설보다 한층 더 작가인 ‘김영하’의 색을 드러내고 있는 매우 친화적인 글이라 팬들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책이지만, 온전히 독자만을 위해서라는 수식을 달기에 이 작업에는 한겹의 의미가 더해진다. 1995년, 제대 후 바로 쓴 단편 <거울에 대한 명상>을 계간 <리뷰>에 발표하며 등단했으니 김영하 작가는 올해 20년차 중견 작가다. 산문집에서는 그 처음부터의 기억을 복기한다. 군인의 아들, 중산층, 그저 책읽기를 좋아했던 소년. 유년기의 기억은 별스럽지 않은 데다 그마저도 열살 때 단칸방에서 살다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잃어버렸다는 그는 ‘백일장에 한번도 최종으로 뽑히지 않고도’ , ‘다른 작가들에 비해 특이하지 않은 경험’을 가지고도 소설가가 되었고 거기에는 ‘작가가 될 수 없는 백 가지 이유’보다 더 중요한 ‘될 수밖에 없는 한 가지 이유가 있었음’을 상기해낸다. 문화계의 지각변동이 일어났던 1995년 은희경, 전경린, 하성란 등을 포함한 젊은 작가들을 기점으로 기존의 감상주의 대신 새로운 경향의 소설이 대두됐고, 김영하 작가 역시 그 중심에서 읽히는 작가다. 80년대 엄혹한 시절 청년기를 보낸 그는 이제 <설국열차>의 머리칸과 꼬리칸으로 나뉜 세상, 비정규직이 사회문제로 대두된 지금의 현실을 비판하는 중년의 작가가 되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부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같은 고전을 다시 읽으며 <읽다>를 집필한 그는 머리말에서 “최소 수천권의 책을 읽고 고작 스무권의 책을 냈다”고 작가로서 자기 점검을 한다. ‘소설가로서 소설이 아닌 글들을 줄줄이 묶어낸다는 게 머쓱하기도 하다’는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세이 형식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 없지 않음을 집필을 하면서 알게 됐다고 말한다. 20년간 소설가로서 살아온 시간들, 4년 남짓의 해외 생활, 그리고 3년간의 부산 생활 이후 다시 시작점. 그 변화는 이제 슬슬 시작하려고 한다는 다음 작품의 단초가 될 것이다.

-<보다> <말하다>에 이어 이번에 <읽다>까지 출간하셨어요. 애초 세권의 시리즈를 상정하고 쓴 건가요.

=처음에는 팟캐스트 청취자가 있으니 그걸 바탕으로 독서에 관한 책을 써볼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출판사에서는 그러지 말고 <씨네21>에 연재했던 칼럼 ‘영하의 날씨’를 비롯해서 그간 매체에 기고한 칼럼들을 모아서 한권을 내고(<보다>), 강연을 묶어서 한권을 내고(<말하다>) 세권으로 하자는 의견을 냈어요. 일이 아주 커진 거죠. 원래는 <읽다>를 주력으로 하려고 했는데, <보다>와 <말하다>를 출간하고 나서 생각보다 반응이 커서 놀랐어요. 적당히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그때 한 거죠. 그래서 <읽다>는 앞선 작품과 달리 온전히 새로 써서 출간한 거예요.

-1995년에 등단했으니 올해가 작가 생활 20주년이에요. 소설이 아닌 산문집 형태라 작가 김영하를 돌아보는 작업으로서도 의미를 더한다고 봐요.

=책에 대해서, 영화에 대해서 강연한 세편 모두가 제 생각을 쓴 거예요. <읽다>는 문학의 계보 그 끝에 저라는 작가가 있는 거고, 내가 쓰는 글이 어떤 글인지 알아보는 작업이어서 작가들이라면 언제든 한번 해봐야 하는 작업이 아닐까 싶어요. 특히 이번 작업을 하면서 소설 쓸 때와 달리 제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소설은 제 생각이 아니고 생각을 써서도 안 되는 거죠. 소설은 일종의 잘 설계된 테마파크 같은 것이니까요. 그동안 문학만 생각할 때는 고립된 섹터에서 살아와도 크게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산문을 쓴다는 것, 생각을 적는다는 건 도저히 사회와의 연결 없이는 안 되는 영역이에요. 요즘 제가 가장 관심을 가지는 건 ‘연결’이에요. 세상과 시민, 독자와 작가. 이런 관계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어떤 영향을 주고 받는가에 관심이 부쩍 커진 거죠. 그건 산문을 써서라고 생각해요.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구나, 내가 그동안 정말 좁은 세상에서 살고 있었구나, 내가 알고 있는 관계는 문학계와 영화계의 아주 조금 정도였구나,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거죠.

-3년간의 부산 생활을 접고 서울 연희동으로 이사를 온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나요.

=부산 생활 이전에는 밴쿠버와 미국에서 살았어요. 아내와 단둘이 거의 고립된 상태로 살았어요. 특히 부산이나 해외에서나 고층 아파트에 기거했으니 외부와 접촉할 일이 거의 없었죠. 책만 읽는 삶이 지속됐는데, 그래서인지 사회적인 접촉을 넓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서울행을 택했죠.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넓어질 줄은 몰랐어요. (웃음)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저한테는 좋은 경험이 된 것 같아요. 지금도 옆집 할아버지가 수시로 드나드세요.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폭력적인 방식의 개입인데, (웃음) 그렇지 않았다면 이사 와서도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았을 것 같아요. 애초 이사 올 때 사람들이 인사하고 안부도 챙길 수 있는 ‘마을’ 같은 분위기의 집을 찾아 단독주택으로 온 거고요. 초등학생 때 군인인 아버지 때문에 관사에 산 몇년을 빼고는 쭉 아파트에 살았지만 애초 제가 아파트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요. 주택은 택배도 직접 받아야 하고 관리해야 할 것도 많지만 여러모로 불편한 점들이 많은데도 매력적인 형태예요.

-지금 이 시기에 서울에서 사는 건 작가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서울은 정말 달라요. 격동의 도시예요. 특히 서울의 중요한 사건은 강북에서 일어나요. 80년대 이후 격동의 세월이 대부분 강북에서 이루어졌으니, 그런 기운이 서울에는 있어요. 이곳은 뭔가 사람의 등을 떠미는 곳이구나. 무심하게 살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거예요. 지금 이사 온 집 뒤에 104 고지 전적비가 있는데, 황석영 선생님이 ‘이런 데는 집을 짓는 게 아니다. 터가 세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말씀하시길 ‘이런 데는 꼭 작가가 와서 산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살인자의 기억법> 속 짧고 무뚝뚝한 인물들의 말투가 주거지인 부산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을 하셨어요. 서울의 삶 역시 그런 변화를 가져다줄 텐데요.

=지금은 뭔가 제 안에 변화가 오는 시기, 타인에게 마음을 여는 단계인 거 같아요. 요즘은 그게 재밌어요. 제 서랍에는 쓰다가 만 소설들이 정말 많아요. 소설이 인간 사회를 단순화해서 실험실적 환경을 만드는 작업이라면 요즘 생각은 그 환경에 좀 여러 사람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관계를 그리거나, 관계에 의해서 변화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죠. <빛의 제국> <살인자의 기억법> 등을 보면 고립된 인물이 나와요. 문장도 짧고 무뚝뚝한 인물이죠. 지금 새로 소설을 쓴다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수다스러운 사람들이 나올 수 있는 거죠.

-최근에 작품 외에 작가님이 이슈가 된 사건이 있었죠. 연희동 개나리언덕 개발 반대 투쟁의 중심에 섰고, 그 의지가 개발 중단으로 관철됐어요.

=저도 좀 놀랐죠. 나에게 힘이 있었구나. 그 공사가 어쨌든 중단된 거고 제가 일조한 거죠. 미드 <뉴스룸>을 보면 한 철없던 남자(제프 대니얼스)가 성장하는데, 저는 요새 그런 의미의 성장을 겪고 있는 거 같아요. 앙팡 테리블처럼 깨는 이야기를 쓰는 작가로 인식됐고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이름이 나면서 힘이 생긴다는 걸 제가 알게 된 거죠. 이거 좀 웃긴데, 그때 제 휴대폰 초기화면이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라는 문구가 쓰인 스파이더맨 그림이었어요. <스파이더맨>도 평범한 소년이 어느 날 자신의 힘을 알게 되고 그걸 좋은 쪽으로 쓰는 성장기잖아요. (웃음) 물론 제가 그 정도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아니고요.

-‘펜이 아닌 주먹을 쥔 작가’라는 수식도 따랐죠. 현실참여형 작가라는 타이틀이 부담스럽지는 않나요.

=처음에는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도 있었어요. 일종의 ‘공(公)생활’이 된 것. 그런데 이제 작가에 대한 정의를 바꾸고 있어요. 옛날에는 작가란 ‘소설을 생산하는 사람’이었죠. 자동차 만드는 사람, 요리 만드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처럼요. 그런데 이런 직업의 정의는 20세기 것이에요. 무얼 만드는 사람이냐의 기준으로 직업을 분류한 거죠. 요즘은 좀 달라요. 소설가는 소설을 생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학적 경험을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렇게 정의를 하면 할 수 있는 역할이 늘어나요. 소설 쓰는 일도 하지만 강연도 할 수 있고 낭독도 가능한 거죠. 팟캐스트를 진행해 귀로 듣는 소설을 경험하게 한다든가, 독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이런 일의 일환이고요. 이런 활동을 주저하는 작가들도 여전히 있는데 전 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가들이 골방에서 원고 쓰고 출판사에 책 보내면 출간되는 시절은 모든 게 잘 돌아가던 시절이었죠. 이번에 <읽다>를 쓰면서 문학사를 정리하는 글을 쓰다보니 예전 작가들의 형태가 새삼 와닿더라고요. 셰익스피어도 극장주라 장부 들고 손익을 따졌어요. 그러면서 글도 쓴 거고요.

-문학과 소설가의 정의가 이제 더 포괄적인 시대가 된 거군요.

=문학이라고 생각한 것만 문학이 아니고 문학적인 것도 문학이라고 생각해요. 문학적인 것을 발견하는 건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 같아요. 동시에 읽기나 독서도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독서 캠페인이 있지만 지식을 가져오기 위한 수단이 앞서죠. 저는 그런 정의가 바뀔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책 속에 길이 있다거나 책은 마음의 양식이다 같은 지식의 저장 수단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위한 독서, 정신적 모험을 위한 독서 등 다양한 방식이 필요하다고 봐요. 사실 지식을 주는 수단이 지금은 인터넷으로 넘어갔으니, 오히려 독서는 더 다양한 지점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거죠.

-참여해서 목소리를 낼 문제들이 많아진 시대예요.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문인들의 서명에 대해, “알았다면 나도 참여했을 것이다”라고 지지의 뜻을 밝히기도 했어요.

=지금은 좀 비상상태예요. 민주주의가 없으면 문학도 가능하지 않아요. 원리주의 국가에 문학이 없는 것처럼요. 문학은 표현의 자유, 다양성에 대한 인정을 뜻하는 거죠. 기본권이 보장되어 있는 가운데 자연스러운 상상을 펼치는 건데 지금은 그게 안되는 거죠.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해야죠. 집회나 시위를 통해 지금의 민주주의가 획득되었는데, 그럼 그걸 보장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을 위협하면 제한을 해야 하지만 지금은 아예 내 눈에 안 보이게 해줘라는 논리죠. ‘교과서는 하나면 돼’라는 생각도 마찬가지고요. 정말 위험한 발상이죠.

-최근작인 <살인자의 기억법>(감독 원신연•출연 설경구, 김남길, 설현)이 영화화 작업 중이에요. 영화화되는 작품이 많은데 원작자로서 어느 정도 개입하시나요.

=<살인자의 기억법>이 출간되고 나서 독자와의 만남을 가졌어요. 그때 객석에서 나온 질문이 ‘분명 영화 판권이 팔릴 것 같은데 어떤 배우가 했으면 좋겠냐’였는데, 그땐 영화화될 계획도 없고 해서 그냥 제 느낌을 말했어요. 그런데 이후 캐스팅 원고가 나온 상태에서 제 발언이 뭔가 영향이 있는 것처럼 해석된 거예요. 전혀 아닌데. (웃음) 제가 관여하는 부분은 거의 없다고 보시면 돼요. 팔고 나면 전혀 상관을 안 해요. <살인자의 기억법> 시나리오를 제작사에서 보내줬는데 전혀 의견을 주지 않았어요. 무엇보다 제가 그 장르의 문법을 모르기도 하고. <눈먼자들의 도시>를 영화로 만들 때 감독과 시나리오작가가 주제 사라마구 작가를 찾아왔다고 해요. 원작자로서 할 이야기가 있냐고 물었더니 ‘개를 넣어달라’, 그게 끝이었다고 하더래요. 원작에 나오지는 않지만 개를 넣어줬으면 좋겠다고. 상당히 멋있어 보여서 저도 다음에는 그런 걸 한번 써먹어봐야겠다 생각했어요. (웃음) 단, 몇 가지 지키려고 하는 건 있어요. 예전에 단편 <거울에 대한 명상>을 원작으로 <주홍글씨>(2004)가 만들어졌는데, 시사회에 안 부르더라고요. 그래서 개봉하고 극장 가서 영화를 보는데 원작자 이름이 아무리 봐도 안 나와요. 그래도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아서 계속 기다리다 보니 거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더라고요. 그때부터 원작자 이름은 감독의 바로 앞, 혹은 바로 뒤에 넣어달라고 요청을 해요. 제목에 관한 원칙도 있어요. 지금 촬영 중인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부터는 원작 제목을 바꾸지 않는 조항을 계약서에 넣었어요. 원작 제목이 작품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 같고요, 그리고 ‘살인자의 기억법’은 제목이 좋기도 하고요. (웃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2003), <오빠가 돌아왔다>(2014) 등 작가님의 작품이 영화화된경우, 원작의 성공에 비해서 반향이 적다는 건 어떤 의미로 보시나요.

=소설로 잘 읽히는 것과 드라마투르기는 다른 건데, 저는 독자가 잘 읽도록 만드는 것이고 영상으로 만들 때 신 바이 신으로 잘 맞는 글은 안 되는 거죠. 그러다보니 시나리오 작업부터 난항을 겪게 돼요. <빛의 제국>이나 <검은 꽃> 다 시나리오까지는 진행됐죠. 그러다 투자가 잘 안 되면서 완성되지 못한 거고요. 상업영화가 가져가야 할 요소들이 있다면 제 작품에는 그런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아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졌지만, 잘 안 됐죠. 영화에는 적대자가 있어야 하는데 제 소설에는 적대자가 없어요. 혼자 자살하려는 사람이 있고 그걸 도와주는 이른바 자살 안내인 역할이 있을 뿐이죠. 명확한 안타고니스트가 없을 때 두 시간 동안 과연 관객을 앉혀놓고 보게 할 수 있느냐 이런 문제가 따라와요. 최근에 이 작품을 미드로 제작 진행 중인데, 시리즈로 만들 때 적대자가 누구냐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로 제시되고 있고, 그 해결 방법을 찾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거죠. 물론 그리스 비극 이래로 2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인간들이 그런 구조의 이야기를 좋아한 건 사실이에요. 주인공과 안타고니스트의 싸움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딜레마 같은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그런 식의 대립구조가 잘 안 맞는 것 일뿐이고요.

-연출가나 시나리오작가들은 영화 시나리오를 쓸 때, 특정 배우를 상정하는 경우가 많아요. 소설을 쓸 때도 그런 영향을 받지 않나요.

=시나리오에 직접 참여한 적도 있는데, 소설은 좀 다른 것 같아요. 소설의 캐릭터는 작가 내면의 어떤 면이 인격화되어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영상은 시나리오로 쓴 캐릭터가 영상으로 갈 경우 어떤 걸 할 수 있을지 고려하게 되죠. 소설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요. 내면에 있는 어떤 걸 끌고 와서 인격화해서 보여주는 거지 실제 어떤 인물을 정하고 쓰면 잘 안 써져요. 제 경우 먼저 인물의 캐릭터에 관한 여러가지 노트를 만들어요. 그렇게 인물을 만들고 나서 그 인물이 읽었을 법한 책을 쌓아놓고 그 책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더 알게 되고 반영하는 거죠. 그 책이 옛날에 이미 읽은 책이라고 하더라도 인물의 시각을 통해서 해석한 것과는 완전히 달라지게 돼요.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살인자는 반야심경 같은 텍스트를 자기 변명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니체의 초인적 의지 역시 살인을 변명하는 내용으로 가져다 쓰죠. 이렇게 살인자가 텍스트를 자의적으로 가지고 온다면 굉장히 위험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는 거죠.

-하나의 작품을 발표하고 나면, 원작자로, 번역자, 해외 출간 등으로 ‘소환’될 일이 많은데요. 그때마다 다른 방식의 체감일 것 같아요.

=판권은 팔지만 원작자로 볼 때 영화는 안 만들어지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웃음) 만들어진다고 좋다는 보장도 없고요. 만들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감도 있어요. 영화가 잘되면 작가는 ‘그 영화의 원작자’ 정도로 인식이 되고, 안 되면 또 안 되는 대로 피해를 보게 되죠. 소설이 해외에 팔리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그것에 대해서 굉장히 흥분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우리가 문학적으로 숭배하던 나라인 프랑스, 독일, 영미권에 판매될 때는 더했죠. 일방적으로 그들의 작품을 읽으며 자랐으니까, 그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뿌듯했던 거죠. 그런데 해외에 나가서 행사를 하다보면 나는 알리바이로 앉아 있는 거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얼마 전 바르샤바에 출간 행사가 있어서 갔을 때도 이런 경험을 했어요. 출판 관계자나 패널들이 자국어로 떠드는데, 글을 쓴 작가인 저만 못알아듣는 거죠. 이게 어떤 느낌이냐면 옛날에 알던 여자가 와서 ‘이 애가 네 애다’ 할 때 반가운 반면 확실치는 않아서 좀 복잡하다고나 할까. 제 얼굴이 있긴 하지만 폴란드어, 이탈리아어 같은 언어를 제대로 썼는지 영원히 검증할 수 없는 것도 문제예요. 그런 문제 때문에 신경증을 앓는 작가들도 많이 봤는데 저는 어느 순간 포기했어요. 원작이 영화화될 때 작가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감독이 더 잘 각색해주기만을 바라는 것일 뿐인 것처럼, 번역도 그래서 일종의 각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쓴 것보다도 번역본이 더 낫길 바랄 뿐이죠. 새 소설 쓰는 것도 힘든데 이미 나온 작품의 번역, 영화화까지 관여하는 건 소모전이라고 생각해요. 그냥 조바심내는 것일 뿐이죠. 작품이 내 소유라는 생각을 지금은 점점 비워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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