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송형국의 영화비평] 두개의 시장
2015-12-10
글 : 송형국 (영화평론가)
<내부자들>이 그린 ‘정의’와 ‘울분’을 생각하다
<내부자들>

거대 신문과 종편 채널을 보유한 모 미디어그룹의 한 고위 ‘내부자’는 사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에 시장이 두개잖아요. 진보 보수, 양쪽 다 잡자는 거죠.” JTBC의 정치적 성향이 <중앙일보>와 차이를 보이는 데 대한 언급이었다. 손석희 사장이 진행하는 뉴스나 드라마 <송곳>이 방영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JTBC는 이념보다 시장논리를 우선시하는, 한국에선 이례적인 종편 채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요즘 같은 세상에 시장논리가 아닌 다른 걸 중시하는 상업방송이 많다는 게 희한한 노릇이지만). 먼저 전제할 것은, 이 글은 JTBC 뉴스나 <송곳>, 영화 <베테랑>이나 <내부자들>의 진정성을 의심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들 작품이 공감받고 흥행하는 환경, 정의란 눈 씻고 찾아봐야 없다는 인식이 하나의 시장을 형성했다는 점만큼은 엄연하다. 좀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우선, 사회 불만 고조→고발성 작품 투자•제작→시장 확대로 이어지는 순환이 있다. 여기에 천만 관객이 오가기도 한다. <베테랑>이 1340만명으로 역대 관객 3위에 오른 것은 이 순환의 한 정점에서 나온 신호다. CJ E&M은 올봄에 다 만들어놓은 이 영화를 굳이 묵혔다가 여름 성수기까지 기다렸다. 좀더 큰 시장에 내놓을 만한 시장성이 있다는 판단이 나오기까지 작품 자체의 완성도만 작용한 게 아니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앞서 <변호인>(2013)이 1130만 관객을 부른 것도 이 경향의 커다란 마디다. 2010년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 임상수 감독의 <하녀>가 이 줄기의 생장점이었다면, <도가니>(관객 460만명, 2011)와 저예산영화 <부러진 화살>(관객 340만명, 2012)은 그 성장판이었다. 같은 해 정지영 감독의 <남영동1985>도 호평받았고 제목 자체를 <공정사회>로 뽑은 영화도 나왔다. 방송가에서는 <추적자 THE CHASER>(2012)가 주목받으면서 ‘정의’ 혹은 ‘울분’은 하나의 장르가 돼간다. ‘손현주표’ 드라마가 잇따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임상수 감독 <돈의 맛>(2012)도 이 맥락에서 시의성이 깊었다. 윤종빈 감독의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1) 역시 교집합이 적지 않다. 올해 <치외법권> <위선자들> 등도 뒤를 잇고 있다. <내부자들>을 보면 <부당거래>와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의 그림자가 여러 곳에서 눈에 띈다. 개별 작품의 발상과 창작은 해당 제작진의 세계 인식에서 나오지만, 이들이 흐름으로 이어지는 일은 시대에 의한 것이다. 합리를 외면하는 권력자들의 질서, 힘과 위계에 의한 분노가 공통된 소재다. 분노는 전파력이 커서 그것이 상품이 될 때 시장성도 커진다. 간혹 이를 노리는 약장수도 있다. 옥석을 가려야 할 필요는 충분하다.

기득권의 본질은 들여다봤지만…

<내부자들>은 장르적 흥미를 집중력 있게 쌓아올린 상업영화다. 특히 검사 우장훈(조승우)과 폭력배 안상구(이병헌)가 구축한 캐릭터는, 연출력과 연기력의 잘 짜인 합을 보여주며 쾌감을 안긴다. 극중 우장훈과 안상구가 대면하는 모텔 장면. 우장훈이 “니는 복수를 원하제. 내는 정의를 원한다”고 할 때 그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자신이 좇는 것이 순수한 정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흙수저 물고 태어나 권력 언저리의 경계에 선 자의 이 표정은 <내부자들>의 핵심 전제이기도 하다. 상업영화로서 <내부자들>은 영리하게 악의 무리를 처벌하지만 종반부에 비치는 ‘조국일보’에는 여전히 ‘미래자동차’의 전면광고가 실려 있다. 이 땅에서 정의를 말하면 밥상머리의 파리도 웃고 가는 장면처럼, 영화는 현실을 말한다. 상징적인 현상이 있다. 언제부턴가 YTN과 도심 전광판은 충무로의 감초 배우가 됐다. 요즘 한국영화를 YTN이 등장하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로 나눠도 될 만큼, YTN은 자주 나온다. 실재하는 뉴스 전문 채널을 기용해 영화 속 허구에 현실성을 부여한다. <내부자들>이 YTN을 활용하는 방식은 한층 흥미롭다. 송경철 앵커를 비롯한 YTN의 간판 앵커를 출연시켰는데, 특정 장면에서만 가상의 채널에 배우가 분한 아나운서가 뉴스를 전한다. YTN 메인 앵커와 비언론인이 연기한 아나운서가 대조되면서 ‘진짜’가 보도하는 내용이 더 진짜처럼 보인다. 극중 기득권의 추태와 부패가 현실이라는 선언이다.

상업영화를 놓고 실제 현실과 얼마나 같은지를 따지는 일은 대개 무의미하지만, 영화가 실제상황을 선언한 만큼 이에 대한 정확한 언급도 필요해 보인다. 일부 권력자들에 한해, 그 부도덕함이 영화 속 상황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영화는 청와대가 보이는 동아일보 건물에서 촬영한, 거대 신문사 논설주간 이강희(백윤식)가 어떤 이너서클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요즘은 일개 신문사 논설주간이 정치인을 대선후보로 키우거나 검찰 조직을 배후조종할 만큼의 힘이 없다. 신문에다 뭐라고 쓰든 대중에 미치는 영향력이 적기 때문이다. 만일 못 말리는 색정광 권력자가 있다면 그는 영화에서처럼 수많은 눈과 귀 앞에서 수시로 난교파티를 벌임으로써 한순간에 정치적 생명을 끝내는 모험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가 너무 손쉽게 비난할 거리를 제조한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이 영화가 추한 현실을 작정하고 콕 집을 때, 즉 “대중은 어짜피 개, 돼지”라고 말하는 이강희의 입술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하거나 부장검사가 “잘하든가 아니면 잘 태어나든가”라고 내뱉을 때 무릎 꿇은 우장훈의 얼굴을 보여주는 등의 장면에선 주제를 알리기 위한 조급함이 툭 하니 돌출한다. 앞서 열거한 ‘정의’와 ‘울분’을 소재 삼은 영화들과 앞으로 나올 작품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상대가 선명하게 악하면 싸우기도 쉽다. 그런데 악한 권력자들은 대부분, 겉으로 부드럽고 속으로 교묘하여 대적하기 어렵다.

그래서 <내부자들>이 기득권의 본질을 들여다봤다고 한다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지만, 권력자들의 ‘실체’를 파헤쳤다고 한다면 동의할 수 없다. 한나 아렌트가 깨우쳐줬듯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악은 보다 정교한 방식으로, 시스템에 의해, 우리 눈에 빤히 보일지도 모르는 책상에서, 그 일을 행하는 하수인이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행정적으로 이뤄지는 그 어떤 것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하나의 시장이 된 진영

<내부자들>을 보며 권력의 추악함에 분개하는 일과,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두개의 시장’을 연관지어 생각해봐야겠다. 두 시장은 이제 서로를 간섭하거나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단계에 이르렀다. <베테랑>이나 <내부자들>에 공감한 다음 현실로 돌아와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면 진짜 이유는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수준 떨어지는 TV 토론처럼, 상대의 논리에 대응하며 생산적인 공박을 주고받는 게 아니라 각자 자기 얘기만 떠든다. 그 토론 프로그램의 패널은 갈등을 원하며 갈등을 먹고사는지도 모른다. 정권을 흔들 만한 특종 보도가 나와도 종북세력의 정치공세라고 뭉개면 그만이다. 거대 신문사 논설주간이 <내부자들>에 심드렁하고, 채널A에 채널을 고정한 시청자들이 <송곳>을 아랑곳하지 않을 때, 작품은 상품의 자리에 머문다. 서로 다른 것들끼리 연결되고 존중 속에 영향받으며 성숙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면 지금은 민주주의의 반대편으로 가고 있다. 진영은 시장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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