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백 투 블랙
2015-12-10
글 : 김혜리
<에이미>

“음반? 그걸 내면 뭐가 좋은데?” 열여섯살의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천진하게 반문한다. 당시 열아홉살의 기획사 신입사원이었던 닉 시멘스키는 소녀를 녹음실로 데려갔고, 다음 일은 모두가 아는 대로다. 두 사람은 동료이자 친구가 된다. 뒷날 닉이 매니저를 그만둔 후 에이미의 약물 중독은 악화된다. 아시프 카파디아 감독의 다큐멘터리 <에이미>에 담긴 인터뷰에서 닉은 한번도 본인의 마음을 언급하지 않지만, 그가 찍은 비디오와 회고담을 보고 듣는 동안 우리는 이 매니저가 에이미를 어떤 식으로든 사랑했으리라 짐작하게 된다. 에이미는 닉이 촬영한 영상 속에서 가장 건강하고 아름답다. “에이미, 네 작은 중심엔 뭐가 있어?” 화면 밖에서 닉이 묻는다. 멋쩍게 답을 피하며 담요 아래 숨는 소녀의 이마 위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영원의 햇빛이 부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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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브릿지>에서 톰 행크스의 연기는 <다빈치 코드>와 <레이디킬러>를 한꺼번에 면책하고도 남는다. 그가 분한 제임스 도노반 변호사는 설득력과 추진력을 겸비한 천생 네고시에이터이며 사교적이지만 단호한 인물이다. CIA가 비 내리는 퇴근길에 뒤를 밟는 시퀀스가 좋은 삽화다. 미행 사실을 몰랐던 도노반은 빈 택시가 그냥 지나가자 길 건너에서 감시 중이던 요원을 행인으로 알고 “뭐 저런 자식이 다 있답니까?” 하며 격의 없이 말을 붙인다. 인물의 성격을 슬쩍 드러내고 다음 숏의 긴장을 준비하는 효과 만점 대사다. 잠시 후 정체를 밝힌 미행자와 마주 앉은 도노반은, “간첩 재판에는 룰 북(rule book)이 없다”는 요원에게 정중히 입을 연다.“호프만 요원? 이름 보니 독일계 맞소? 나는 아일랜드계요. 혈통 다른 우리를 미국인으로 묶는 것이 룰 북이고, 그게 바로 헌법이오. 뭘 끄덕이세요, 개자식아.” 대사의 앞부분은 스필버그다운 주제를 요약하고, 따귀를 올려붙이는 듯한 마무리에서는 각색 담당 코언 형제의 호흡이 읽힌다. 두 요소는 톰 행크스가 창조한 캐릭터와 화술 안에서 완벽히 하나가 된다. 매섭게 할 말을 마친 톰 행크스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다가 뒤돌아서더니 테이블 위 땅콩을 한줌 집어 우적거리며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간다. 인물의 성품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거의 모든 것이 한 시퀀스에 들어 있다.

활달한 도노반의 맞은편에 소련 스파이 루돌프 아벨(마크 라일런스)이 정년퇴직한 동사무소 계장 같은 모습으로 버티고 있다. 영화 초반 불도저마냥 변호하고 협상하는 도노반의 진면목을 숙지했기에 관객의 눈에 꿈적도 않는 아벨의 위력은 두드러진다. 둘이 만났을 때 타이밍을 쥐락펴락하는 쪽은 아벨이다. 지금까지 모든 대화 신을 주도하던 도노반은 아벨과 마주 앉자 상체를 조금씩 앞으로 기울이며 듣기에 집중한다. 이쯤 되면 톰 행크스에게 말리지 않는 마크 라일런스가 놀라운 것이 아니라, 마크 라일런스의 페이스에 휘둘리지 않고 캐릭터를 견지하는 톰 행크스가 다행스럽다. 배우의 내력을 알고 나면 무리도 아니다. 영화 경력이 많지 않은 라일런스는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단 예술감독 출신의 배우 겸 극작가 겸 연출가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1980년대 말 <태양의 제국>을 찍을 무렵 이미 라일런스에게 두 차례 프러포즈했지만 연극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라일런스를 잘 몰랐던 톰 행크스는 <스파이 브릿지> 세트에서 그와 투숏을 처음 찍은 날 구석으로 스필버그를 불러내 소리죽여 외쳤다고 한다. “오, 마이, 갓, 마크, 라일런스!” 스필버그와 함께 응한 <BBC> 라디오 인터뷰에서 행크스는 애교 만점의 ‘뒤끝’을 들려주기도 했다. “다 알아요. 이제부터는 마크가 감독님의 최고 애정 배우죠? 뭐, 괜찮아요. 난 받아들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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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요절한 가수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노래 몇곡을 남들만큼 좋아했지만 그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늘 똑같이 그린 두터운 아이라인 아래 형형한 눈동자가 마리아 칼라스랑 닮았다고 무심코 생각했던 기억만 난다. 그래미상을 받았다는 뉴스도, 약물 스캔들도 기사 제목만 흘깃하며 그러려니 했다. 아시프 카파디아 감독의 다큐멘터리 <에이미>를 꼭 보려던 이유는 비운의 뮤지션보다 감독의 전작 <세나: F1의 신화>가 남긴 좋은 기억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카파디아 감독은 대상(subject) 뒤에 연출의 손길을 숨긴 채, 인물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을 냉정한 균형 감각과 예민한 공감 능력을 동원해 침착하게 종합한다. <에이미>는 이 단순한 미덕이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카파디아의 최대 장점임을 확신하게 만든다. 유니버설 뮤직이 자료를 통째로 제공하고 감독의 전적인 통제권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의뢰한 영화 <에이미>는 전작 <세나: F1의 신화>와 공통점이 꽤 많다. 첫째, 영화에 착수할 무렵 카파디아는 레이싱에 관해, 에이미 와인하우스에 관해 보통 사람 이상 알지 못했다. 영화 찍는 동안 스스로를 교육하는 식으로 작업했다. 둘째, 두 영화 공히 영상은 100% 이미 존재하는 자료로 구성됐다. 본인과 가족, 친구가 찍은 사진과 비디오, 언론 인터뷰와 공연, 아카이브 영상이 편집의 재료다. 한편 오디오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관련 인물 인터뷰에는 카메라가 동행하지 않았다. 촬영기 없이 취재원과 방에서 만나 조명을 은은하게 낮추고 사적인 분위기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한없이 녹음했다고 감독은 밝혔다. <에이미>가 <세나: F1의 신화>와 다른 한 가지는, 비교적 최근 사건이 소재라 이미 출간된 기존의 전기나 해석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터뷰에 응한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가족, 친구, 전남편, 매니저는 서로 교류가 없는 경우도 많았다. 영화를 보고서야 서로의 관점을 확인한 셈이다. 이 과정은 기획 인터뷰를 준비하는 기자의 작업과 비슷해 보인다. 인터뷰어 역시 대상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개입하지는 않되 내가 파악한 인물의 핵심과 직결된 내용을 신중하게 편집해야 한다. 한편 <에이미>는 다큐멘터리를 게릴라식 독립영화와 동일시하는 선입견과 달리, 다큐멘터리도 숙련된 전문 스탭들의 협업으로 얼마나 세련될 수 있는지 입증한다. 기초 자료를 수집하고 더 흥미로운 부분을 심화 조사해 감독에게 제시한 아카이브팀, 스토리의 흐름을 잡아나간 편집기사, 휴대폰과 홈비디오로 촬영된 영상을 스크린에서 볼만하게 다듬은 기술 스탭이 없었다면 <에이미>는 불가능했을 영화다.

분업 가운데 연출자로서 아시프 카파디아 감독의 미덕은 두드러지지 않는 구석에서 은은히 빛난다. 방대한 자료 가운데 영화에 포함될 클립을 선택하고, 영상의 일부를 천천히 연장하거나 확대하는 리듬의 판단, 특정 장면과 특정 인터뷰를 조합하는 결단에 감독의 태도가 반영된다. 센세이셔널리즘에 대한 카파디아의 경계는 명백하다. 와인하우스의 정신이 바닥을 친 시기를 그리기 위해 감독은 앙상하고 피폐해진 에이미의 사진을 보여주지만 결코 그 이미지를 확대하거나 오래 들여다보지 않는다. 아마도 딱 감독 자신이 응시할 수 있는 시간만큼 스크린에 지속시킨다. 그러면서도 카파디아는 감정의 선을 꼼꼼히 쌓아간다. 첫 신의 선택부터 감독은 뛰어난 감수성을 드러낸다. <에이미>는 에이미와 단짝이었던 두 친구 중 한명의 열네살 생일파티 비디오로 시작한다. 다 같이 부르기 시작한 <해피 버스데이 송>의 세 번째 소절을 에이미가 집중해서 부르는 순간 친구들의 음성은 잦아들고 형언할 수 없는 찰나의 침묵이 소녀들 사이에 감돈다. 천사가 방금 지나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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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미>를 보러 간 관객은 누구나 묻게 될 것이다. 누가 언제 무엇을 잘못해서 이 탁월한 뮤지션을 파괴했는가? 카파디아는 천재 음악인에게 닥친 비극의 원흉으로 특정인을 손가락질하지 않은 채 최소의 팩트만 제시한다. 에이미를 마약에 빠뜨리고 혼자 발을 뺀 남편 블레이크, 딸이 성공하기까지 사라졌다가 성공한 이후엔 곁을 파고들었던 아버지를 관객이 악역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적어도 연출의 계략은 아니다. 동시에 카파디아는 에이미 와인하우스 본인의 책임을 외면하지 않는다. 이 예술가는 그런 범인(凡人)들의 오류만으로 파괴되기엔 너무 특별한 영혼이었다. 그녀는 얼마간 스스로 삶을 놓은 것이다. <에이미>가 없었다면 내가 몰랐을 중대한 사실은, 싱어송라이터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가사가 그녀의 실제 삶과 얼마나 철저히 밀착해 있었는지다. 연상의 연인과 이별했을 때 쓴 <Stronger Than Me>에서 그녀는 “당신은 이곳에 나보다 7년 더 살았잖아”라고 따지고, 애인 있는 남자에게 실연당한 후 쓴 <Back to Black>에서는 “너는 그녀에게로, 나는 암흑 속으로 돌아갔지”라고 직설법으로 노래한다. “내가 울어도 넌 돕지 않지. 날 도와서 얻는 게 없으니까”라고 그녀가 읊조릴 때 타블로이드 기사를 무심히 소비했던 우리는 ‘너’의 일원으로서 가책을 느낀다. 적절하게도 아시프 카파디아 감독은 와인하우스의 가사를, 방대한 자료와 취재 내용을 하나의 서사로 꿰는 실로 이용하고 있다(영화는 내내 노랫말을 필기체의 그래픽으로 화면 한쪽에 보여준다). 그리하여 <에이미>는 와인하우스의 노래가 곧 시나리오가 된 극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괴물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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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가름끈

호소다 마모루 애니메이션의 꾸준한 모티브 하나는 독학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썸머워즈>의 인물들은 학교 밖에서, 가족에게서 긴요한 지혜와 스킬을 배운다. 시민권이 없는 <늑대아이>의 늑대 청년은 대학에 숨어들어 청강하고, 그의 아내 하나는 나중에 농사를 혼자 익힌다. 독학에는 친구와 이웃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동물계에서 자란 <괴물의 아이>의 큐타(소메타니 쇼타)도 열일곱이 되자 인간 세상으로 나와 도서관에서 멈췄던 공부를 재개한다. 소녀 카에데는 큐타의 자발적 학구열이 좋아 그를 돕는다. “난 사실 부모의 기대를 위해 살고 있어. 하지만 괜찮아. 계속 공부해 대학에 가면 집을 나와 혼자 힘으로 졸업하고 내 삶을 살 거야.” 그리고 손목의 붉은 실을 풀어 큐타에게 매어준다. 소녀가 어린 시절 강압 없이 즐겁게 읽었던 책의 가름끈으로 만든 이 팔찌는 말하자면 독학자의 수호 부적이다. 주체적으로 끊임없이 세상을 배우며 살아가려는 의지의 표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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