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김지미의 영화비평] 권력의 화염, 영원회귀의 굴레
2015-12-15
글 : 김지미 (영화평론가)
죽은 언어를 현재에 조우시키는 저스틴 커젤의 <맥베스>
<맥베스>

셰익스피어는 감독에게 ‘계륵’이다. 그 어떤 원작보다 강렬하게 권위의 무게로 짓누르지만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강렬한 드라마의 유혹은 너무나 달콤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특히 <맥베스>는 감독들이 가장 탐내는 원작 중 하나이고, 맥베스의 욕망과 불안은 매번 다른 옷을 입고 스크린 위를 비틀거리며 거닐었다. 저스틴 커젤의 <맥베스>는 동일한 원작을 둔 다른 영화들과 서두부터 그 차이가 확연하다. 로만 폴란스키, 오슨 웰스의 <맥베스>가 모두 원작처럼 세 마녀들로, 구로사와 아키라의 <거미의 성>이 신비로운 ‘성’(城)에서 시작하여 일단 신비감과 공포감을 극대화하는 세팅에서 출발했던 것과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그리고 이 설정은 맥베스가 자신의 부인과 공모하여 덩컨 왕을 암살하고, 그렇게 획득한 왕권의 안위에 대해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게 되는 모든 욕망의 근간이 된다.

채워지지 않는 결핍-죽은 아이

커젤의 <맥베스>는 아이의 장례식이라는 비극적 사건에서 시작된다. 맥베스는 아직 체온도 식지 않은 듯 보이는 뽀얗고 하얀 아가의 눈두덩에 명복을 비는 작은 돌멩이를 올린다. 아이의 시신을 바라보는 레이디 맥베스의 초점 잃은 눈빛은 슬픔으로 곧 무너질 듯하다. 아이의 시신이 화염 속으로 사라진다. 축복인지 저주인지 알 수 없었던 마녀들의 예언을 담은 맥베스의 편지는 맥베스 부인이 아이의 죽음으로 잃었던 삶에 대한 의지를 회복시켜준다. “나에게서 여성을 가져가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복수심을 채워다오. 이 품 안에 들어와서 여자의 젖을 담즙과 바꿔다오. 너희들은 도처에서 자연의 악행을 거들지 않았느냐”던 맥베스 부인의 대사가 원작에서 그녀를 야심만만한 ‘악녀’로 읽게 했다면 이 영화에서 그것은 아이 잃은 어미의 상실감과 방향성 없는 복수심으로 의미전환된다.

맥베스 부부는 아이를 잃은 고통을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대체하고, 왕의 암살을 도모하기로 하는 데 합의한다. 이 욕망의 치환 과정은 아내가 남편에게 살인을 사랑의 증명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협박한 원작의 대사를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지만, 대사의 추상성을 섹스의 구체성으로 확인시켜준 파격적 해석이 드러난 장면을 통해 매우 극적으로 드러난다. 그들에게 암살은 재생산의 실패(아이의 죽음)를 잊게 하고, 그 여파로 그들에게 몰아닥친 죽음 충동으로부터 벗어나 에로스 충동, 즉 삶에 대한 의지를 회복하는 과정인 셈이다.

상속되는 권력-아버지와 아들

문제는, 왕권이 원칙적으로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상속된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 부부의 합의는 일시적인 봉합은 될 수 있으나 근원적인 해결이 되지 못한다. 감독은 맥베스 부부에게 아이가 없다는 사실을 쉼 없이 강조한다. 맥베스와 함께 전장에서 귀환한 뱅코우에게는 따뜻한 볼을 부비는 아들이 있다. 그는 스스로는 왕이 되지 못하지만 대대손손 왕을 낳으리라는 예언의 주인공이다. 이때 아들의 왕위에 대한 약속은 개별적인 개체에 대한 성공을 예견하는 것뿐 아니라 아버지에게는 삶의 연장, 안위가 보장된 미래를 의미하게 된다. 맥베스가 찬탈한 왕위가 공허한 것은 그의 뒤를 이어줄 후사가 없기 때문이다. 맥베스가 왕권을 획득하기 전까지 애써 무의식에 가둬뒀던 그의 결핍은 그가 왕위에 오른 이후 의식의 수면 위로 부상한다. 맥베스를 코더의 영주로 만들어준 전투에서 그는 손수 한 소년의 팔목에 보호대를 감아주고 얼굴에 용사의 표식을 그려준다. 하지만 그런 보람도 없이 소년은 무참히 죽는다. ‘죽음’의 동일성을 매개로 소년이 아들을 대신하여 맥베스의 무의식에 침투한다. 덩컨 왕 시해를 두고 망설일 때 소년병은 단검을 들고 그를 인도한다. 맥베스가 맥더프와 최후의 결투를 벌일 때도 소년은 멀리서 그의 패배를 말없이 지켜본다. 소년병은 그가 실제로는 상실한, 그렇기에 너무나도 절실했던 아들에 대한 욕망이 만들어낸 환영이다. 그의 상실감이 낳은 대체재이며, 실패한 욕망의 대리물이다.

커젤은 레이디 맥베스에 대해 구로사와가 썼던 욕망의 지도를 반대방향으로 배치했다. 와시즈(<거미의 성>에서 맥베스 역할에 해당하는 인물)의 부인이 권력 획득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은 뱃속의 아들로 정당화된다. 그녀는 아이를 유산한 직후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이성과 생명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맥베스 부인은 아이의 죽음으로 상실했던 생에 대한 의지를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대리 충족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은 더 많은 살인을 불러올 뿐이라는 사실을 목도한 뒤 모든 욕망을 놓아버린다. 맥베스의 야망에 기름을 붓던 아내는 맥더프 가족을 처형하는 남편의 눈빛에서 광기를 확인하고, 그가 왕이 아니라 괴물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 이후 그녀는 범죄의 혈흔을 지우려고 애쓰며 회한의 읊조림을 반복한다. 그때 그녀 앞에 죽은 아들의 환영이 나타난다. 이 장면을 통해 셰익스피어가 레이디 맥베스로부터 거세하려 했던 ‘모성’을 커젤은 오히려 그녀의 존재론적 근간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폭력의 트라우마

마이클 파스빈더가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커젤의 맥베스를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이다. 그는 아이를 잃었고, 아이의 대체재로 생각했던 소년병조차 지키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끊임없이 휘둘러야만 하는 물리적 ‘폭력’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야 한다는 사실 역시 그를 신경쇠약으로 모는 이유처럼 보인다. 영화 초반의 전투 신은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병사들은 용맹한 함성과 달리 공포에 질려 있고 시각적, 정서적으로 적군과 아군의 경계도 분명하지 않다. 그들은 그저 살기 위해 싸울 뿐이고, 실패는 말 그대로 죽음을 의미한다.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그들이 몸을 누이고 잠을 청하는 곳이 무덤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그만큼 가깝다는 것을 암시한다.

맥베스가 겪고 있는 폭력의 트라우마는 신체적 상처를 통해 가시화된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상처는 파스빈더의 육체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그의 목에 난 상처는 클로즈업 숏에서조차 그 존재감을 과시한다. 아마 그것은 첫 번째 전투에서 얻은 것일 텐데 그 상처가 선명할 때 그는 덩컨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 멜컴 왕자가 부대를 이끌고 돌아왔을 때 그는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 위에 다시 갑옷을 입고 던시네인 성을 지키기 위해 출정한다. 상처가 아물 틈도 없이 계속해서 폭력은 현장으로 내몰려야 하는 것이 그의 삶이고 운명이다.

커젤 감독은 <스노우타운>(2011)에서 물리적 ‘폭력’이 초래하는 정신적 트라우마의 문제를 ‘고찰’한 적이 있다.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킬 만큼 건조했던 <스노우타운>의 화법과 <맥베스>의 시적인 영상 그리고 두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공간적 차이로 인해 두 텍스트는 얼핏 완전히 다른 영역을 지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사되는 자의적인 물리력과 그 폭력성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미성년의 얼굴을 포착하는 감독의 시선은 놀랍도록 일관된다. <스노우타운>에서 무기력한 엄마와 아버지 역을 자처하는 엄마의 남자친구에 의해 자행되는 폭행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소년 제이미의 얼굴이<맥베스>의 수많은 소년병들과 플리언스, 맥더프의 아이들과 겹친다. 그리고 그것은 때때로 마녀들의 예언에 맹목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맥베스의 얼굴 위에서조차 일렁거린다. 감정적/상황적 동일성뿐 아니라 클로즈업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파고들려는 시각적 유사성이 동질감을 더 가중시킨다. 폭력이 인간의 삶에 야기하는 물리적/정신적 잔혹함에 집중하면서도 폭력을 선정적으로 전시하지 않는다는 점(커젤의 <맥베스>에서 우리는 수많은 살인을 목도하지만 신체가 훼손되는 과정을 목격할 수는 없다)에서 커젤의 작품은 폴란스키의 <맥베스>와 거리를 확보하고 있다.

권력의 불꽃, 타오르다

이 영화에서 원전에 대한 가장 창의적인 해석은 특히 결말부에 응축되어 있다. 뱅코우의 아들 플리언스가 도주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맥베스는 극심한 불안 장애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모든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포에 질려 발작을 일으키다 스스로의 범죄를 폭로하는 데까지 이른다. 영주들과 군사들은 충심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그의 명령을 따를 뿐이다. 궁지에 몰린 맥베스는 마녀들의 또 다른 예언을 갈구한다. 잠옷을 입고 침실을 배회하던 맥베스는 그 모습 그대로 광야를 헤매다가 그들과 조우한다. “버넘 숲이 던시네인 성으로 오지 않는 한” 그는 패하지 않으며, “여자의 몸에서 난 자는 맥베스를 해하지 못한다”는 예언을 듣고 그는 마음을 놓는다. 하지만 말 안장 위에도 여전한 잠옷 차림과 침대의 휘장과 동일한 빛깔의 짙은 안개로 인해 세 마녀가 외부적 대상인지, 침실에서 만들어낸 망상에 불과한지 여부는 모호하다.

원작을 비롯해 다른 모든 <맥베스>에서 버넘 숲이 병사들의 위장술에 의해 움직인 데 반해 이 작품에서 버넘 숲은 화염이 되어 스스로 던시네인 성을 오른다. 다른 모든 감독들이 병정들의 몸에 나뭇가지를 묶어 은폐하도록 했던 것과 달리 커젤은 숲에 불을 질러 불씨와 뒤섞인 나무의 재가 성 안으로 날아들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간파한 ‘권력’의 상징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권력은 화염과 같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만큼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다. 위협적이고 파괴적이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의 뒤에 남는 것은 재뿐이다. 영화의 초반에 맥베스의 아이의 시신을 태우던 바로 그 화염은, 아이를 추모하는 예배당에서 촛불이 되어 타오르다가, 다시 분노가 되어 맥더프의 처와 아이들을 태우고, 결국 던시네인 성으로 올라와 맥베스를 파멸로 이끈다.

맥베스는 두 번째 예언만 믿고 스스로 전장으로 뛰어든다. 그는 맥더프와 처절한 결투를 벌인 끝에 맥더프의 목에 칼끝을 밀어넣는 데 성공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 나왔다”는 맥더프의 말 한마디에 “사나이의 용기가 꺾였다”며 칼을 거둬버린다. 마음에서 이미 패배한 결투는 결국 무릎을 꿇은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맥베스를 처단한 뒤, 덩컨의 아들이자 정당한 후계자 멜컴이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국왕 만세”를 외치는 맥더프와 병사들의 목소리에서는 사필귀정 당당함이나 승리의 환희보다 전투의 피곤함이 더 진하게 묻어난다. 그들은 멜컴의 왕위 역시 맥베스의 그것처럼 덧없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피로 물든 광야를 무심하게 걸어오는 플리언스의 등장은, 잊혔던 최초의 예언을 다시 환기한다. 여기서 우리는 마녀들의 예언과 함께, 코더의 영주에게 빼앗은 직위를 맥베스에게 하사하며 “그가 잃은 것을 맥베스가 얻으리라”던 왕의 선언도 떠올려야 한다. 권력의 화염이 욕망의 대상이자 불안의 원인이 되는 이유는 누구도 그것의 영원한 주인일 수 없기 때문이다. 플리언스의 풀숏 뒤로 펼쳐진 핏빛 안개와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한 심장 고동 같은 사운드가 결합된 이 영화의 엔딩은 끊임없이 부활할 또 다른 ‘맥베스’들의 등장을 예고하며 전율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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