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ituary]
[obituary] 현실에 참여하고 세상을 바꾸는 카메라
2016-01-04
글 : 조재휘 (영화평론가)
사실주의를 추구한 거장 촬영감독 하스켈 웩슬러를 추모하며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하스켈 웩슬러(Haskell Wexler: 1922~2015) 촬영감독이 2015년 12월27일 눈을 감았다. 향년 93살. <밤의 열기 속으로>(1967),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1968),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75) 등 1960~70년대 미국영화의 명작들에서 카메라를 도맡았고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1966)와 <바운드 포 글로리>(1976)를 통해 두번이나 아카데미 촬영상을 석권한 자타 공인의 장인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각각 흑백과 컬러영화로 오스카를 수상한 이 전대미문의 기록은 훗날 야누시 카민스키가 경신한다). 국제촬영감독협회는 2014년, 그의 이름을 영화사에 큰 영향을 남긴 촬영감독 10인의 반열에 올리기도 했다.

영화의 표현에 있어 촬영감독의 예술적 개성이 부각된 60~70년대 미국영화계에서, 하스켈 웩슬러는 콘래드 홀, 고든 윌리스, 빌모스 지그몬드와 더불어 전통적인 스타일을 깨고 개인적인 스타일을 확립한 선구자 중 한명이었다. 1947년부터 촬영조수로 업계에 발을 들인 웩슬러는 시카고를 거점으로 <후드럼 프리스트>(1961), <엔젤 베이비>(1961) 등의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 <오지와 해리엇의 모험>과 같은 TV시트콤을 작업하게 되는데, 그중 동료 존 반스와 만든 <더 리빙 시티>(1953)로 아카데미 최우수 단편다큐멘터리 부문에 후보로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이때부터 시작된 다큐멘터리에 대한 열정은 평생에 걸쳐 이어진다). 저예산 다큐드라마 <새비지 아이>(1960)로 촬영감독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의 경력은 엘리아 카잔의 자전적 이야기이자 이민자의 실상을 다룬 영화 <아메리카 아메리카>(1963)에 발탁되면서 본격적인 행보를 딛게 된다.

풍경-역사와 호흡하다

영화를 작업하면서 웩슬러가 중요하게 여긴 건 ‘사실성’(reality)이었다. 인터뷰에서 “나는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조작된 무대라 여기지 않고 ‘이건 다큐멘터리야’라고 말해주길 바랐다. 그것이 진실에 대한 나의 관점이다”라 한 발언은 촬영감독으로서의 웩슬러가 지켜온 신념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전성기의 그는 다른 촬영감독들에 비해 작업의 진행속도가 빠르다는 평판을 얻었는데, 아름다운 영상을 만들기 위해 인위적인 조명과 세팅에 공을 들이기보다는 카메라가 담는 로케이션의 현장성, 영화가 다루는 시대의 분위기를 살리는 데 중점을 둔다는 지론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조명과 구도의 설정에 제약이 있는 다큐멘터리의 경험은 일정과 예산을 초과하지 않는 효율성을 주는 동시에 극영화에 보다 현실적인 생동감을 불어넣는 밑바탕이 되었다.

중요한 건 사실을 ‘더욱 사실적’으로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영화적인 것’이라 여겼던 그의 믿음이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를 찍을 때 파경에 이른 결혼생활의 끔찍함과 긴장감을 표현하기 위해 당시 신문에 실리던 흑백 스냅사진의 감각을 끌어들였고(당시 마이크 니콜스는 유명한 연극연출가였지만 영화 경험은 전무한 신인이었다. 흑백으로 촬영한다는 결정은 전적으로 웩슬러의 의견을 따른 것이었다), 싱어송라이터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 1912~67)의 전기영화 <바운드 포 글로리> 때는 대공황기 미국 사회상의 황폐하고 메마른 분위기를 살려내기 위해 연기와 먼지를 사용하는 등 필요하다면 연출의 기교를 활용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바운드 포 글로리>는 사상 처음으로 스테디캠을 투입해 촬영한 첫 상업영화이다. 스테디캠의 발명자 개릿 브라운을 크레인에 태워 지면에 가까워지면 스테디캠으로 배우의 동선을 따라가게 한 2분15초 분량의 숏은 돌리와 핸드헬드 카메라에 길들여져 있던 당대의 영화계에 기술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LA비평가협회 촬영상, 전미비평가협회 촬영상, 아카데미 촬영상을 휩쓴 이 작품에서 시네마 베리테(cinema verite)적 사실성을 극영화에 접목시키려는 웩슬러의 촬영 성향은 정점에 달한다.

<천국의 나날들>(1978)에서 웩슬러의 촬영은 테렌스 맬릭의 자연주의적 연출관과 만나 일대의 미학적 경이를 빚어내기에 이른다. 네스토르 알멘드로스의 촬영으로 알려진 <천국의 나날들>의 상당 부분은 실은 웩슬러의 솜씨였다. 제작 일정이 심하게 늘어짐에 따라 알멘드로스가 하차하자 대타로 웩슬러가 투입되었고, 거의 모든 장면을 인위적인 조작 없이 자연광으로만 찍어야 한다는 맬릭의 까다로운 주문을 훌륭히 소화해냈다(도입부의 공장 배경에서 나머지 장면과의 통일성을 위해 필터를 사용한 것 외에는 어떠한 조작도 없었다). 나중에 <천국의 나날들>의 완성된 편집본을 보면서 스톱워치를 가지고 숏 바이 숏으로 관찰한 결과 자신의 촬영분이 절반 넘게 포함되어 있으므로 공동촬영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에게 보낸 건 유명한 일화이다.

스페인 내전에 뛰어들었던, 카메라를 든 활동가

하스켈 웩슬러는 타고난 반골이었다. 그는 13살 때 이미 FBI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감시당했는데, 그 이유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를 보고 나서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재현하는 영화의 태도를 비판했기 때문이다. 파시즘에 맞서 싸우기 위해 15살에 스페인 내전에 뛰어드는 등 정치적으로 조숙했던 웩슬러의 좌파적 성향은 그가 작업한 작품들의 성격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게 된다(<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의 절제된 카메라 움직임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다). 극영화를 하는 틈틈이 웩슬러는 다큐멘터리에 열중했는데 한결같이 사회적 쟁점을 건드리는, 급진적인 정치적 함의를 담고 있는 작품들이었다.

에밀 드 안토니오와의 공동연출작 <언더그라운드>(1976)는 70년대 학생운동의 급진성에 관한 생생한 영상기록이며, 그보다 먼저 1968년 8월 민주당 전당 대회를 둘러싼 풍경을 한 취재기자의 멜로드라마와 결합한 <미디엄쿨>(1969)에서는 실제 폭동 현장에서의 촬영분과 뉴스릴, 연출을 절묘하게 몽타주해 ‘픽션과 시네마 베리테의 결혼’이라는 평을 얻었다(이 작품은 미국 정부에 의해 한동안 상영금지 조치를 당한다). 미국 노조탄압의 역사를 직설적으로 그린 존 세일즈의 <메이트원>(1987)에서 웩슬러의 카메라는 1920년대 버지니아주 탄광마을의 역사로 돌어간다. 존 포드의 서부영화에서 보았음직한 광활한 풍광과 학살의 역사를 극단적으로 대비시키는 영상은 이루 형언치 못할 비극적 정조를 자아낸다. 노동현실에 대한 웩슬러의 관심은 나중에 손수 연출한 다큐멘터리 <누가 잠이 필요한가?>(2006)를 통해 수면 부족과 장시간 노동이 영화노동자의 생명을 얼마나 치명적으로 망가뜨리는가를 고발하기에 이른다.

하스켈 웩슬러는 굳은 신념에 찬 촬영감독이었다. 극영화에서 추구한 사실주의 미학은 단순한 테크닉이 아니라 영화가 현실에 참여(engagement)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휴머니즘의 영화적 발로였다. 시대의 장인이자 그 이상으로 위대한 운동가 한 사람이 사라졌다. 촬영술을 따라할 수는 있겠지만 영화와 정치적 신념을 결코 둘로 나누지 않고, 평생 치열하게 영화로서 현실의 부조리에 맞서 저항한 그 삶을 본받는 이는 쉽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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