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호의 트립 투 유럽]
[한창호의 트립 투 이탈리아] ‘추상적인 분노’를 찾아가는 여행
2016-01-05
글 : 한창호 (영화평론가)
이탈리아 감독들의 시칠리아
<누구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교회 앞, 주역을 맡은 잔 마리아 볼론테(왼쪽).

“나는 추상적인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탈리아 모더니즘 문학의 대표 작가인 엘리오 비토리니는 자전적 소설 <시칠리아에서의 대화>를 이렇게 시작했다. 네오리얼리즘의 정치와 초현실주의의 환상을 섞은 이 작품에서 비토리니는 어느 인쇄공 남자의 입을 통해 파시즘 시대를 살아가는 고통을 털어놓았는데, 그는 그것을 ‘추상적인 분노’라고 압축했다.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매일 원인 모를 분노 속에 산다는 뜻이리라. 이제 29살인 인쇄공 남자는 15년 만에 시칠리아의 고향을 찾아간다(비토리니도 한때 인쇄공이었다). 그 며칠의 여행 동안 남자는 추상적인 분노의 이유를 조금씩 알아갈 것이다. 그 분노, 오직 그만의 것일까?

<레오파드>. 돈나푸가타. 팔레르모 근처의 치민나에서 촬영.

정치영화와 시칠리아

1960, 70년대 이탈리아의 정치영화를 말할 때, 경쟁적으로 거론되는 두 감독이 엘리오 페트리와 프란체스코 로지다. 두 감독 모두 좌파를 대표하는 영화인들로, 이탈리아의 정치부패를 다루며 명성을 쌓았다. 민감한 주제와 전투적인 정치적 입장 때문에 서유럽 등 일부 지역에서만 알려진 게 이들 경력의 약점이었다. 두 감독은 1971년 칸국제영화제에서 <노동자 계급 천국에 가다>(엘리오 페트리)와 <마테이 사건>(프란체스코 로지)으로 황금종려상을 공동수상하며 세계 영화인의 주목을 받았다. 정치적 테마에 민감한 두 감독이 시칠리아와 만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일일 테다. 이들은 이탈리아의, 더 나아가 세계의 문제를 압축한 공간으로 시칠리아를 주목했다.

페트리가 시칠리아를 강조한 대표작은 <누구나 자기만의 방식으로>(A Ciascuno Il Suo, 1967)이다. 시칠리아의 오명으로 각인된 마피아의 문제가 사실은 지배층, 더 나아가 사회 전체의 구성과 긴밀하게 관계 맺고 있음을 밝히는 스릴러다. 이 작품이 칸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으며 페트리는 유럽영화계의 유망주로 부각된다. <누구나 자기만의 방식으로>는 도입부의 시칠리아 장면으로 유명하다. 하늘에서 내려오기 시작한 카메라의 시점은 팔레르모 근처의 아름다운 도시 체팔루(Cefalu‵)의 전체 모습을 보여준다. 도시는 커다란 바위산을 배경으로, 앞으로는 눈부시게 매혹적인 쪽빛 바다를 끼고 있다. 카메라는 바위산을 넘어 바다쪽으로 진행 중인데, 산 바로 아래에는 체팔루의 주 교회인 두오모(Duomo, 도시의 중심 교회란 의미)가 보인다. 체팔루는 인구 1500명 정도 되는 작은 도시인데, 이곳이 얼마나 오래된 도시인지는 비잔틴 양식의 중세 두오모가 한눈에 알게 한다. 맑은 하늘, 쪽빛 바다, 원시적인 느낌의 바위산, 그리고 역사와 문명의 상징인 교회의 이미지는 서로 섞여, 이곳의 아름다움을 신비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지금도 체팔루는 관광지로 유명하여, 여름이면 도시 인구가 세배로 늘어나는 곳이다. 도입부의 마지막에서 카메라는 제법 오랫동안 교회의 정면을 조용히 바라본다. 곧 영화는 교회를 강조하며 시작한다.

60, 70년대 이탈리아 정치영화를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배우’를 꼽자면 단연 잔 마리아 볼론테이다. 세계 영화인들에겐 세르지오 레오네의 ‘달러 3부작’의 악당으로 더 유명할 것 같다(1, 2부의 악당). 볼론테는 두 감독, 곧 페트리와 로지의 정치영화에서 주역을 맡으며 ‘참여 배우’로서의 명성을 쌓는다. 파시스트 부친의 이른 죽음으로, 어릴 때부터 너무나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볼론테는 14살 때 생계를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프랑스에 가서 소젖을 짜며 돈을 벌었다. 그런데 배우의 운명을 타고났는지, 그때 볼론테는 사르트르와 카뮈의 애독자가 됐고, 문학에 눈떴다. 2년 뒤 귀국하여 극단의 허드렛일을 하며 비로소 연기에 입문했다. 페트리와 로지가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공동수상할 때, 두 작품 모두에서의 주인공은 볼론테였다.

<살바토레 줄리아노>. 그의 죽음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페트리-로지-볼론테 트로이카

볼론테가 <누구나 자기만의 방식으로>에서 맡은 역할은 팔레르모로 통근(약 70km)하는 문학 교수 파올로이다. 체팔루의 집에서는 방에 틀어박혀 거의 잠만 자는 은둔자다. 그런데 체팔루에서 그의 친구 두명이 살해되면서 영화는 전환점을 맞는다. 의사와 약사인 그들은 사냥 중에 살해됐는데, 살인자로는 약사 하녀의 남자 가족들로 지목됐다. 일종의 ‘명예살인’의 혐의다. 하녀는 약사의 정부였다. 그리고 의사는 옆에 있다 사고로 죽었다는 것이다.

파올로는 자신의 고향 체팔루가 교회의 고위 성직자, 그의 친척인 유명 변호사, 이들과 친한 사업가들, 그리고 마피아들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고 늘 의심해왔다. 일종의 이너 서클(Inner Circle)이다. 사실 이것은 체팔루의 주민이라면 ‘다 아는 비밀’일 테다. 파올로는 의사가 살해되기 전에 지역 유력자의 범법 행위를 알리기 위해 혼자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파올로는 경찰의 발표와는 다르게, 살해된 자는 의사이고, 약사는 살인의 알리바이를 위해 희생됐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리고, 증명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언론도, 경찰 등 관계 기관도, 심지어 피해자를 보호할 변호사들도 전부 이너서클 속에 포함돼 있을 텐데 말이다.

지극히 아름다운 체팔루가 파올로의 눈에는 소수의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체념의 땅으로 보인다. 파올로는 분노한다. 그는 분노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파올로가 ‘어리석고, 아직 어리다’고 나무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실력자 변호사(가브리엘레 페르체티)의 결혼식이다. 어느 마피아 하객은 “진정한 걸작이 완성됐다!”며 결혼식을 축하한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고, 파올로의 분노는 스쳐 지나간 바람처럼 이미 해결된 뒤다. 교회에서 시작한 영화는 교회에서 끝나는데, 그곳에는 파올로가 의심한 이너 서클의 실력자들, 곧 성직자들, 정치가들, 경제인들, 그리고 마피아들이 모두 모여 있다. 모르긴 몰라도 코폴라가 ‘<대부> 시리즈’를 만들 때, 페트리의 영화는 적극적으로 참조했을 것 같다. 파올로는 시칠리아의 비극은 구조화된 부패로 봤다.

프란체스코 로지는 처음부터 마피아영화를 만들며 감독으로 데뷔했다. 장편데뷔작이 나폴리의 마피아를 다룬 <도전>(1958)이었다. 단독 연출로는 첫 작품이다. 그럼으로써 범죄를 잉태하는 이탈리아 사회의 부조리는 그의 평생의 테마가 된다. 로지는 루키노 비스콘티의 <흔들리는 대지>(1948)에서 조감독을 할 때 시칠리아의 상황에 주목했다. <흔들리는 대지>에서 어부 가족의 둘째 아들은 빚 때문에 길거리로 쫓겨나는 신세가 됐을 때, 산으로 올라가며 시칠리아 마피아의 존재 조건을 암시했었다. 로지가 만든 시칠리아 배경의 마피아영화로는 걸작 <살바토레 줄리아노>(1963)가 독보적이다. 시칠리아의 전설적인 산적인 살바토레 줄리아노(1922~50)에 관한 전기영화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에 따르면 줄리아노는 ‘민중의 마지막 산적’이다. 실제로 많은 시칠리아 사람들이 줄리아노에게서 로빈 후드 같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부자들로부터 뺏어,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졌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그것은 파시스트 정권 아래서의 평판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줄리아노는 총을 버리지 않고 산속에 머물렀다. 그는 시칠리아의 독립을 요구하는 ‘분리주의자’로 변신한다. 그러고는 팔레르모 근처의 고향인 몬텔레프레(Montelepre)에 머물며 정부군, 경찰과 전투를 벌였다. ‘의적’이 갑자기 정치의 중심에 나선 셈이다. 관공서 습격, 유명인 납치, 몸값 요구 등의 범법행위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일부 주민은 줄리아노를 친구로 생각했다. 이탈리아 본토로부터 독립을 바라는 주민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겐 중앙정부쪽 사람들은 대개 억압자로 비쳤다.

줄리아노가 주민들로부터 외면받기 시작한 것은 ‘포르텔라 델라 지네스트라(Portella della Ginestra)의 살육 사건’ 때문이다. 팔레르모 근처의 산골 마을 포르텔라 델라 지네스트라에서 공산주의자들이 1947년 5월1일 노동절 축제를 벌이고 있을 때, 줄리아노 일당은 이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부녀자를 포함해 11명이 죽고, 30여명이 부상당하는 사고였다. 공산주의자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부들과 그 가족들이었는데, 이유도 모른 채 살해됐으니 줄리아노의 ‘의적’ 이미지는 순식간에 훼손됐다. ‘민중의 친구’라는 명성을 즐기던 줄리아노가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다. 혹시 민중의 친구라는 역할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뺏겼기 때문일까? 프란체스코 로지는 그 수수께끼를 찾아간다. 영화는 줄리아노가 의문의 시체로 발견된 어느 집 뒤뜰에서 시작한다. 어떻게 해서 줄리아노는 살해됐을까? 곧이어 길고 긴 플래시백이 이어지는 식이다.

시간을 되돌려보니, 한때 ‘의적’ 소리를 듣던 줄리아노는 정치가와 경찰들과 협상하고, 지역 마피아와 거래도 한다. 파시스트 정권 아래서 산적 생활을 하던 청년이 이제 많이 변질된 것이다. 감독 로지는 그의 죽음의 원인을 분명하게 밝히기보다는 ‘의적’이라 불리던 청년이 어떻게 마피아로 변해가는지를 추적한다. 그러면서 너무나 가난한 시칠리아의 환경, 부패한 정치가들과 경찰들, 이들과 거래하며 재산을 불리는 마피아들, 글도 읽지 못하는 무지한 주민들의 이미지를 겹쳐놓았다. 마피아의 탄생과 존재라는 것이 어느 하나의 분명한 이유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 시칠리아의 운명이 답답해 보이는 것은 줄리아노가 죽은 뒤에도 한때의 동지들 사이의 복수, 또는 권력의 하수인들에 의한 피의 복수는 계속 이어진다는 점이다. 로지는 시칠리아를 분노의 복수가 끝나지 않는 비극의 도시로 그리고 있다.

<아이들 도둑>. 노토에서 일행은 한때 즐거운 시간을 가진다. 뒤로 두오모가 보인다.

<아이들 도둑> 속 시칠리아의 황량한 풍경

현재 활동하고 있는 감독 중에 남부의 문제로 이탈리아 전체 사회의 부조리를 천착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잔니 아멜리오다. 60, 70년대 리얼리즘의 대표주자가 페트리와 로지였다면, 90년대의 대표주자는 아멜리오다. 그가 늘 다루는 테마가 남북 문제(산업지역인 북쪽과 농업지역인 남쪽 사이의 여러 차이)이고,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한 대표작은 <아이들 도둑>(1992)이다. 제목에서 벌써 네오리얼리즘의 강한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밀라노에 사는 시칠리아 출신의 가난한 가족의 이야기다. 혼자 사는 여성에게 11살 딸 로제타와 9살 아들이 있다. 생존에 내몰린 엄마는 어이없게도 어린 딸에게 매춘을 시키고, 결국 이 일이 발각돼 감옥에 간다. 자식들은 로마의 보호소에 보내질 것이다. 젊은 경찰 안토니오(엔리코 로 베르소)는 아이들과 동행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탈리아 경찰이 대개 그렇듯 안토니오도 남부의 가난한 집안 출신이다. 경찰과 아이 둘, 이들 세 사람은 밀라노에서 남부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세 사람은 겨우 로마에 도착했는데, 이곳에선 로제타의 과거를 눈치채고, 관련 서류를 핑계대며 수용을 거부한다. 안토니오는 어쩔 수 없이 시칠리아의 젤라(Gela)에 있는 두 번째 시설로 향한다. 안토니오는 불쌍한 아이들에게 깊은 동정심을 느끼기 시작한다. 가족의 따뜻함을 기억시키고 싶어 여행 도중에 고향 집에 잠시 들른다. 그런데 여기서도 이웃이 로제타를 알아보는 바람에 안토니오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도망치듯 시칠리아로 향한다. 감독 아멜리오는 시칠리아에서 아름다움과는 거의 관계없는 곳을 주로 찍는다. 선배 네오리얼리스트들이 관광지 이탈리아를 배제하듯 말이다. 황량한 바닷가, 쓰레기가 뒹구는 모래사장, 가난한 집들, 텅 비어 활기라곤 없는 길거리를 비춘다. 아이들 마음이 그렇다는 뜻일 테다.

하지만 안토니오의 선행은 시칠리아에서 오해받는다. 경찰 간부는 임무를 빨리 마치지 않고 아이들과 돌아다니는 안토니오를 의심한다. 여관에선 소년, 소녀와 한방에서 같이 잤냐고도 묻는다. 안토니오는 ‘아이들 도둑’에, 성적 범죄까지 의심받는 처지가 됐다. 아이들을 보살핀 선한 마음이 평가받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모욕을 당한 셈이다. 안토니오의 ‘가무잡잡한 얼굴’엔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다. 원인 모를 분노는 이런 것일 수도 있다. 선행을 베풀었는데 무시당했을 때의 모욕감 같은 것 말이다.

아멜리오의 시칠리아는 방치되고 고립된 가난한 공간이다. 이런 정서가 돋보였던 고전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정사>(1960)다. 전반부의 로마와 무인도 화산섬(리스카 비앙카)도 인상적이었지만, 정작 관객의 마음을 뺏은 것은 중반부 이후의 시칠리아였다. 여자가 실종된 뒤, 두 주인공, 곧 클라우디아(모니카 비티)와 산드로(가브리엘레 페르체티)가 그녀를 찾기 위해 시칠리아를 돌아다닐 때다. 기찻길 옆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시칠리아의 바다, 아랍 문화가 끼어 있는 오래된 궁전들, 육지와 달리 너무나 가난해 보이는 벽돌집들, 여자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남자들만 몰려 있는 광장 등 말 그대로 이국 정서의 향연이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 하나만 꼽자면 ‘바로크의 도시’ 노토(Noto)이다. <아이들 도둑>에서 경찰과 아이들이 잠시 소풍을 즐기던 도시이기도 하다(아멜리오는 노토를 통해 안토니오니에게 오마주를 표현한 것 같다).

클라우디아와 산드로는 서로에 대한 호감을 여기 노토에서 고백한다. 실종된 여자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동안 숨기고 있던 감정이었다. 조그만 도시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약간 높은 곳에 지어진 노토의 거대한 두오모는 이곳을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보이게 했다. 말하자면 잠시지만 현실의 이성이 풀어지는 곳이다. 화려한 바로크 양식으로 장식된 두오모의 맞은편에 숙소를 잡은 이들은 처음으로 환한 웃음을 짓는다. 두 남녀는 두오모 근처의 ‘산 카를로 보로메오 교회’(Chiesa di San Carlo Borromeo)의 지붕에서 장난스럽게 종을 치기도 한다. 이들의 행복한 마음은 교회 종소리의 메아리처럼 도시 전체로 퍼져나간다. 체념과 고독의 죄의식이 지배하던 영화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소의 기쁨이 잠시 머무는 곳이 노토였다(<아이들 도둑>에서도 그랬다). 그만큼 <정사>에 표현된 시칠리아의 외로움은 컸고, 그래서 노토의 미소는 가는 빛 같은 존재였다. 소설가 비토리니처럼 말하자면, <정사>는 ‘추상적인 외로움’에 빠진 영화였다. 안토니오니에게 시칠리아는 결국 그 격리의 외로움을 배가하는 공간이었다.

외로움, 고립 같은 소외의 감정을 삶의 운명적인 조건으로 받아들인 남자가 <레오파드>(1963)의 주인공 돈 파브리치오(버트 랭커스터)이다. 루키노 비스콘티의 이 걸작은 시칠리아에 대한 오마주로 봐도 된다. 돈 파브리치오의 캐릭터, 곧 존재의 마지막 품위를 지키기 위한 자발적 고립은 바로 시칠리아의 운명인 듯 그리고 있어서다. 가리발디의 통일운동이 시칠리아에도 불어닥쳤을 때, 구질서를 상징하는 돈 파브리치오는 가족과 함께 돈나푸가타(Donnafugata)로 피난을 간다. 영화의 전반부는 팔레르모 근처에 있는 돈 파브리치오의 저택인 ‘보스코그란데 궁전’(Villa Boscogrande)에서, 그리고 중반 이후는 돈나푸가타가에서 주로 전개된다. 그런데 돈나푸가타는 허구의 도시다. 원작자인 주세페 토마지 디 람페두사가 지어낸 공간으로, 주인공 돈 파브리치오가 바캉스 때면 지내는 피서지로 제시했다. 먼지가 풀풀 나는 마른 땅에, 주민들 대부분은 가난한 농부들인 시골이다.

비스콘티는 허구의 공간과 비슷한 곳으로 팔레르모 근처에 있는 치민나(Ciminna)를 선택했다. 인구 4천명 정도 되는 작은 마을이다. 광장 한가운데는 영화에서 보듯 진홍색 전면이 특징인 ‘산타 마리아 막달레나 교회’ (Chiesa di Santa Maria Maddalena)가 있고, 바로 그 옆의 황금색 건물이 돈 파브리치오의 저택이다. 왕정, 입헌군주국, 또 공화국 지지자들이 충돌하는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시칠리아는 흡수통일의 대상이다. 시칠리아 스스로 자결권을 가진 게 아니었다. 왕정이든 공화국이든 그것은 외부에서 유입된 제도이지, 시칠리아에는 맞지 않는 것이라고 돈 파브리치오는 생각한다. ‘하이에나’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돈 파브리치오는 체념했고, 또 속으로 분노한다. 북부의 정치가가 나타나서 시칠리아에 무슨 시혜를 베풀 듯 이야기를 하는 데서는 모욕감마저 느낀다. 그는 재산과 명예를 노리는 다른 귀족들처럼 시대의 흐름에, 변화에 ‘슬기롭게’ 적응하기보다는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그것이 그나마 존재의 마지막 품위를 지켜내는 태도라고 여긴 것이다.

<정사>. 노토에서의 모니카 비티.

소설가 비토리니가 시칠리아에서 나눈 대화

<시칠리아에서의 대화>의 중반부 이후에서 밝혀지는데, 소설가 비토리니의 ‘추상적인 분노’도 모욕에 원인이 있었다. 그가 말한 모욕은 개인적이기보다는 사회적이다. 고향을 찾은 남자가 분노하는 이유는 파시즘이 세상을 모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자기 일에는 분노하면서, 모욕당하는 세상 때문에는 괴로워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은 계속 모욕당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이 모욕의 분노는 언제 끝날 것인가! 남자가 감추고 있는 분노의 마음을 처음으로 보여주는 상대는 칼을 가는 남자다. 알다시피 직업이 ‘칼갈이’라는 점은 대단히 예시적인 장치다. 파시스트 정부는 언제까지 사람들을 이리도 모욕할 것인지, 칼갈이는 눈물을 삼키며 가슴으로 운다. 이탈리아 감독들이 만든 시칠리아 배경의 영화들을 관통하는 감정도 비토리니의 추상적인 분노와 엇비슷할 테다. 고립과 부조리의 ‘모욕에서 느끼는 분노’의 감정 말이다. 지금까지는 모두 시칠리아의 이야기였다. 다음엔 비토리니가 한때 인쇄공으로 일했던 르네상스의 도시, 예술의 도시 피렌체로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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