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황진미의 영화비평] 인간에 대한 예의
2016-01-05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대호>와 <히말라야>가 삶과 죽음을 다루는 태도
<대호>

일제강점기 호랑이 사냥의 의미

<대호>(2015)는 1925년 일제의 호랑이 수렵을 소재로 한다. 실제로 일제의 수렵에 의해 한반도의 맹수들이 멸종되었다. 이는 물론 제국의 식민지배의 일환이자 자연에 대한 지배를 과시하려는 근대인의 욕망과 관련이 있다. 1907년 조선 군대를 해산한 일본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제정하여 조선인의 총기소지를 금했다. 그러나 1913년 총독부는 호랑이처럼 해로운 짐승을 제거하는 데 협력하는 조선인에게 총포류를 빌려주라는 지침을 내린다. 엔도 기미오의 책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에는 “호랑이를 산신으로 숭배해온 조선에 많은 일본인이 신식의 연발총과 군총을 들고 밀어닥쳐 1897년부터 1926년에 걸쳐 호랑이를 멸종시켜버렸다”는 기술이 나온다.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인간을 해치는 호랑이를 잡아주겠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일본인들에게는 조선의 전 지역에 이동과 정착이 가능하도록 안전을 확보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표면적인 이유 외에 호랑이 사냥이 조선인들의 기세를 꺾어 식민통치를 원활히 하려는 정치적인 이유와 지배계급 사이에서 호피가 고가로 거래되었던 경제적인 이유가 있다. 즉 일제가 조선인 포수들에게 군총을 지급하여 호랑이를 사냥하도록 하고, 조선인들 보란 듯이 호랑이 시체를 쌓아놓고 사진을 찍으며, 지배계급이 호피를 소장품으로 취하는 광경은 식민지배의 정치와 자본주의적 경제를 함축한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는 모두 근대의 산물이며,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복하고 지배하는 인간의 힘을 과시하는 것 역시 근대정신의 산물이다.

<대호>는 일제강점기 호랑이 사냥이 지닌 정치•경제학적인 맥락을 짚는다. 영화의 초반에 ‘지리산으로 숨어든 불령선인들을 토벌하러 들어간 일본군들이 호랑이의 공격을 당했다’는 짧은 보고는 사태를 요약한다. 일제에 호랑이는 불령선인과 마찬가지로 굴복시켜야 할 ‘조선’이다. 여기서 ‘조선’은 땅일 수도 있고, 자연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다. 모두 개척하고 통제하고 개조해야 할 대상이다. 조선인 포수를 앞세워 호랑이 사냥에 나섰던 일본군은 마지막에 아예 산을 폭파해버린다. 영화는 큰 나무가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장면을 천천히 보여준다. 이는 제국이 식민지를 어떻게 대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이자 근대인이 자연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자연과 야생동물에 대한 남벌은 일제만의 행위가 아니다. 신대륙에 들이닥친 백인들이나 식민지를 건설한 서구제국 모두에서 발견되는 모습이다.

당시 일제의 명분이 “사람을 해치는 해로운 짐승을 잡는다”였음은 의미심장하다. 지배자들은 지배-피지배 관계를 지우고, 그 자리에 보편적인 ‘사람’과 ‘짐승’을 놓는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자연과 싸우는 인간’으로 재규정된다. 사실 이는 근대적 세계관의 핵심이다. 여기서 민족을 괄호 치더라도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조선은 일제를 통해 근대화를 맞았기 때문에, 근대의 폭력이 일제의 폭력으로 표상되곤 한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도 지배세력들은 보편적 인간의 이름으로 산을 밀고 야생동물을 멸절시키는 근대화를 계속해왔다. 새마을운동이든, 천성산 터널이든, 4대강 사업이든, 가리왕산이든. 국가와 자본이 바라보는 자연은 개척의 대상이자 자원일 뿐이다.

<대호>는 일제강점기 호랑이 사냥을 통해 일제의 식민지배는 물론이고 그 너머에 놓인 근대의 폭력을 드러낸다.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2014) 역시 이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했다. 일제가 식민지 소녀들의 몸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하여 완벽한 신체기능을 갖춘 전쟁기계로 개조해나가려 했다는 상상은 근대의 본질을 묘파한다. 여기서 식민지 소녀의 몸은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자 개발되어야 할 자연이며, 전쟁 시 동원할 자원이다. 교장(엄지원)은 여성과학자이자 관료로 적극적인 부역을 하는데, 그 이유는 미개한 조선 사회를 벗어나고 싶어서이다. 파우스트적 근대정신을 내면화한 그는 식민지인이라는 자의식을 히스테리적으로 부정한다. 영화는 근대적 개조에 동원된 소녀가 통제되지 않는 괴수로 돌변하는 장면을 클라이맥스로 삼는다. 교장은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같은 최후를 맞는다. 이러한 결말은 근대적 기획의 실패를 보여주지만, 그 너머의 대안적 사유를 품지 못한다. 그러나 <대호>는 근대적 사고를 뛰어넘는 사유의 지평을 보여준다.

포수는 왜 총을 놓았을까

<대호>의 천만덕(최민식)은 호랑이의 이동경로를 잘 알고 호랑이와 마주쳐도 기세에 눌리지 않는 명포수지만, 총을 놓고 약초꾼으로 살아간다.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 지리산 대호를 잡는 작전에 동참하라는 일본군 장교 앞에서 그는 퇴물인 척 연기한다. 그러곤 부대 밖에서 기다리던 아들에게 말한다. “뭔 걱정이냐. 내가 뭐 독립운동이라도 하냐?” 영화는 독립운동을 하지는 않지만 일제가 규율하는 욕망의 질서에서 벗어난 채 사는 천만덕을 통해 친일과 항일의 이분법이 놓치고 있던 제3의 시선을 틔워준다.

호랑이와 명포수가 나오는 영화를 찍는다고 했을 때, 흔히 생각하는 구도는 구경(정만식)를 주인공으로 한 서사이다. 구경은 대호와의 대결에서 동생을 잃고, 얼굴에 상흔을 입었다. 그는 복수를 위해 일본군의 호랑이 토벌에 적극 앞장선다. 일본군의 앞잡이가 되어 조선인들이 숭배하는 산군을 잡는 게 부역행위가 아니냐는 시선에 그는 말한다. “총포류를 모두 일본이 관리하는 세상에서, 포수가 포수로서 일하기 위해서는 일본군에 협조할 수밖에 없다.” 맞다. 그는 매우 익숙한 근대적 주체이다. 그가 포수로서 대호에게 갖는 집착과 원한은 허먼 멜빌의 소설 <백경>의 에이하브를 연상시킨다. 에이하브는 다리를 앗아간 백경을 잡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광기를 보인다. 구경 역시 대호를 반드시 내 손으로 죽기겠다는 열망으로 불탄다. 그에게 대호는 포수로서 대결하고픈 절체절명의 상대이자 출세와 돈을 얻을 수 있는 길이자 복수해야 할 원수이다. 즉 그에게 대호를 죽이는 것은 자아실현이다. 당시 총포류를 일제가 관리했으므로 그의 자아실현을 위해서는 부역이 불가피하다. 그러니까 식민지인으로서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제라는 대타자에게 호명되는 주체가 될 수밖에 없으며, 이를 현재의 시각에서 친일이니 부역이니 재단하는 것은 편협하다는 논리가 가능하다. 이는 매우 익숙한 논법이다.

그것은 <청연>(2005)에서 조선인 여성으로 조종사가 되려면 일제에 부역할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박경원(장진영)의 일만친선비행도 어쩔 수 없는 시대의 비애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로 변주되었다. 또한 만주군 장교가 된 박정희에게 ‘당시 조선에는 군인이 될 수 있는 길이 없었으므로 만주군 장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박근혜의 말도 존재한다. 물론 모두 궤변이다. 당시 조선인 여성으로 조종사가 되기 위해 중국군에 입대한 권귀옥도 있었고, 군인이 되기 위해 광복군에 들어간 사람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적극적인 친일을 한 사람들이 소박한 자아실현을 면피로 내세우는 궤변이 꾸준히 횡행하는 이유는, 당시 훨씬 소극적인 차원의 친일과 자아실현 사이에서 고민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가령 선생이나 은행원이 되려는 사람에게도 약간의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구경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포수가 포수로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 현재의 대다수의 관객도 그렇게 생각한다. 어차피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소수이며, 그외에는 평범한 생활인으로 일제가 강제하는 근대의 질서에 순응하며 살았을 것이라고.

그러나 <대호>는 구경이 아니라 천만덕을 주인공의 자리에 놓음으로써 순응도 저항도 아닌 탈주의 길을 보여준다. 최고의 포수였던 천만덕이 포수로서의 삶을 포기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산군을 잡아 먹이사슬을 교란시키지 않고, 다른 짐승들도 마구 죽이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닌 포수였다. 비록 살업을 쌓으며 살지만, 자연과 조화 속에서 ‘산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살겠다는 직업적 철학이다. 그러나 일제통치와 자본주의적 질서에 의해 그의 직업적 원칙을 더이상 고수할 수 없게 되자, 그는 포수의 삶을 접는다. 그가 총을 내려놓은 계기도 중요하다. 호랑이를 사냥하는 과정에서 아내가 죽자 그는 총을 내려놓는다. <백경>의 에이하브나 구경처럼 반드시 호랑이를 잡아 죽이겠다는 집착에 사로잡힐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자신의 총에 혈육을 잃은 짐승들의 고통에 동감하며 살업을 그만둔다. 자신을 피해자의 위치에 놓고 복수를 다짐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자신이 가해자로서 쌓은 죄업을 성찰한다. 이는 대단한 윤리의 경지이다. 가령 테러를 당한 직후 복수를 위해 폭격에 나서는 길과 그동안 가해자였던 자신의 대중동 정책을 반성하는 길이 있다. 미국도 프랑스도 전자를 택했다.

구경과 일본군은 새끼호랑이를 미끼로 대호를 잡으려다가 실패하자, 호랑이 사냥에 천만덕을 끌어들이기 위해 아들 석이(성유빈)를 미끼로 사용한다. 석이는 새끼호랑이와 동일한 위치에 놓인다. 이러한 병치는 천만덕과 대호가 동일시되는 효과를 낳는다. 영화는 아들을 얻은 천만덕과 새끼를 얻은 대호를 나란히 놓고, 새끼를 잃은 대호와 아들을 잃은 천만덕을 겹쳐놓는다. 이러한 구도는 대호가 천만덕에게 석이의 시체를 물어다주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영화는 대호와 명포수를 (대결이 아닌) 동일시의 구도로 그리고, 포수를 사냥을 거부하는 존재로 그린다. 포수가 <백경>의 에이하브적 주체가 아니라, 허먼 멜빌의 또 다른 단편 <필경사 바틀비>의 바틀비적 주체라니, 굉장한 파격이 아닐 수 없다. 천만덕은 아들이 죽자 비로소 총을 잡는다. 이제 동일한 처지에 놓인 대호와 천만덕이 어쩔 수 없는 대결에 내몰려 서로를 죽이는 자멸적 비극으로 마무리되는 것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둘이 대결하여 서로를 죽였다고 보기 힘들다. 오히려 삶에 미련이 없어진 자들끼리 동병상련의 교감을 통해 서로의 자살을 도와 동반자살에 이른 것으로 읽힌다. 이들의 죽음은 권력과 자본의 질서에 포획되지 않은 죽음이기에 세속의 경계 바깥에 놓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선이 되었다고 믿는다.

<히말라야>

인간에 대한 예의, 시신에 대한 예의

<히말라야>(2015)는 2005년 존재했던 ‘휴먼 원정대’의 실화를 담는다. 히말라야 14좌 등정에 성공하고 은퇴한 엄홍길(황정민)은 후배 박무택(정우)이 히말라야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시체 수습을 위한 원정대를 꾸린다. 영화는 극한의 배경을 그린 산악영화지만, 공연한 비장미를 품지 않는다. 이는 <남극일기>(2005)와 비교하면 명확해진다. <남극일기>는 음산한 침묵 속에서 모호한 추상성을 향해 뚜벅뚜벅 걷는 영화다. 영화는 ‘도달 불능점’에 가겠다는 집착에 빠진 탐험대장(송강호)의 광기를 그린다. 역시 <백경>의 실패한 판본으로 볼 수 있는데, 탐험대장의 기괴한 목표지향에 대해 영화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인간의 의지’에 발을 걸치는 듯한 모호한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19세기 제국주의는 물론이고, 20세기 개발 독재의 폐해를 거친 21세기 한국에서 강박적 목표를 향해 동료와 자신을 죽음으로 밀어넣는 리더십에 대해 감상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반동적이다.

하지만 <히말라야>는 모호한 겉멋을 취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등정은 훈련과 도전과 성취의 스포츠이지 개똥철학의 기행이 아니다. 등반대의 분위기는 밝고 일상적이며, 동료들은 신뢰와 우애로 가득하다. 이들은 조난된 동료를 구조하거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 이러한 모습은 일반적인 산악문화와 사뭇 다르다. 영화에도 언급되듯이, 해발 8000m가 넘는 곳에서 조난자를 구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실제로 구조에 나선 이들은 모두 죽었다. 또한 산에서 죽은 등반가의 시신은 따로 수습하지 않는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동료를 구조하러 나선 사람이 있었고,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원정대가 실제로 꾸려졌다. 이 예외적인 사건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그리고 오늘날 이 사건의 환기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현재 히말라야 등정은 기업후원을 받아 이루어지는 스포츠다. 등반가로서 등정의 기회를 얻기 힘들지만, 성공하면 보상과 명예가 주어진다. 영화는 그러한 정황을 잘 보여준다. 한편 셰르파의 도움으로 히말라야 등정하는 코스가 귀족 스포츠로 상품화되어 있기도 하다. 그래서 단순히 히말라야 등정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는 서구의 등반가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국내 등반문화는 여전히 ‘14좌 등정’ 같은 양적 성과를 중시한다. 엄홍길은 이러한 국내 문화에서 가장 확실한 성공과 인정을 얻은 사람이다. 등반가들은 ‘정복’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16좌 등정’ 같은 그의 꿈은 여전히 성과주의 문화와 닿아 있다. 그런데 시신 수습을 위한 원정은 이러한 성과주의와 전혀 다른 결을 지닌다. 등정보다 훨씬 힘든 미션이지만 아무런 영광도 보상도 없다. 산 사람을 구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희생을 감수하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나 <마션>(2015)에 대해서도 무모함과 숭고함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존재한다. 하물며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희생을 감수하는 것에 동의할 수 있는가.

영화는 천신만고 끝에 시신을 찾은 엄홍길이 베이스캠프에 와 있던 유족과 통화하는 장면을 인상적으로 담는다. 이는 실화와 다르지만, 관객의 고조된 감정이 응결•정화되는 장면이다. 유족은 남편을 위해 최선을 다한 등반대에 고마움을 담아 더이상 운구하지 말 것을 부탁한다. 등반대는 양지바른 암벽에 돌무덤을 만드는 것으로 미션을 마친다. 이는 효율과 성과를 중시하는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바보짓이다. 죽은 지 1년이나 된 시체를 빙벽에서 떼어내어 고작 100여m 떨어진 암벽에 묻기 위해 생업까지 포기한 등반대들이 50일간 히말라야를 헤맸단 말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죽은 동료가 바로 자신일 수 있으며, 내가 같은 사고를 당했을 때 그도 그리 했을 거라는 강력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너와 나의 몸이 자일로 묶여 있듯이, 우리의 삶과 죽음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원초적 감각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효율이나 성과가 아닌 ‘인간에 대한 예의’를 논할 자리가 생겨난다. 인간의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도 소중하기에, ‘시신에 대한 예의’도 존재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죽음과 동시에 사물로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시신은 아무 의미가 없는 유기물이 아니다(세월호의 시신들을 어묵에 비유한 행위가 끔찍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과 시신에 대한 예의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무택의 시신을 중심으로 등반대원들과 유족은 모두 새로운 화해의 관계를 맺는다. 박무택에게 품었던 질투, 죄의식, 그리움 등이 최선을 다한 애도행위에 의해 비로소 소멸된다. 그리고 엄홍길과 여성대원의 등정 장면이 보여주듯이, 이들은 새로운 관계를 맺어나간다. 세월호에서 숨진 이들의 시신과 세월호를 인양하는 것이 무의미한 낭비일 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에게 <히말라야>는 말한다. 부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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