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실험이었다.” 문채원은 <그날의 분위기>의 수정 역에 대해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수정은 화장품 회사 마케팅팀 팀장으로 일하며 하루하루 별일 없이 산다. 연애 중이기도 하다. 10년째 오직 한 남자와만의 연애다. 그게 문제는 아니다. 다만, 그녀는 알고 있다. 자신의 연애 전선에 이상이 생겼음을. 뜨뜻미지근한 상태. 그것을 권태라고 불러도 좋다. 게다가 연애에 있어서는 남들이 답답해 할 정도로 정도(正道)만 걷는다. 서로간의 순순한 믿음이 사랑의 모든 것이라는 확고한 입장이다. 이런 수정을 보고 누군가는 답답하고 미련한 곰, 연애 앞의 ‘철벽녀’라고 할 수도 있다. 돌아가보면, 남들과 다를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남들보다 좀더 꽉 막힌 수정이라는 인물이 문채원의 “실험”의 대상이었다는 얘기다.
그 실험의 이유는 이러했다. “‘수정처럼 평범한 인물을 연기했을 때 과연 내가 배우로서 매력적으로 보일까. 그때 내 연기에서 어떤 좋은 점을 발견할 수 있을까. 독특하고 거대한 사건이 아닌 평범한 인물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큰 스크린 위에 펼쳐놓았을 때 그것대로도 보는 맛이 날까.’ 이런 질문들의 대답이 궁금했다. 내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다. 나에 대한 호기심, 의구심이 생긴 거다.” 돌아보면, 문채원은 종종 극적인 상황 한가운데에서 꿋꿋이 자기 길을 가는 인물들을 연기할 때 빛이 났다. <최종병기 활>(2011)에서는 청나라군에 끌려가 사랑하는 피붙이와 생이별을 해야 했던 여인으로, TV드라마 <공주의 남자>(2011)에서는 수양대군의 딸로서 아버지와 사랑하는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비운의 왕녀 세령으로 등장하며 진한 인상을 남겼다. 그에 비해 수정은 특출난 배경이나 독특한 사연이 있지는 않다. 하지만 문채원은 굳이 캐릭터가 특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본인의 연기로 인물의 평범함을 설득력 있게 표현한다면 그것 자체로 의미있을 테니까.
평범함 속에서도 수정을 빛나게 만드는 건 결국 배우의 몫이었다. “수정처럼 답답한 사람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답답한 건 답답한 거지 그게 매력일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영화에서는 수정의 답답한 성격이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관객이 들이대는 재현(유연석)에게 도통 틈을 안 주는 수정을 보면서 ‘아, 좀 넘어가주지. 참 재미없게도 사네’라고 하지 않을까. 그러다 수정과 재현 사이에 뭔가 잘될 것 같은 분위기가 흐르면 ‘그래, 그래!’ 하며 빠져들지 않을까. 그러면서 관객에게 작은 쾌감 같은 게 전해질 것 같았다.” 평소에도 즉흥적인 연기보다는 꼼꼼한 대본 분석에 기대는 편인데 이번에는 더더욱 캐릭터 분석에 열을 올렸다. “남녀 주인공이 하룻동안 감정이 변해가는 걸 그리다보니 그 세밀한 감정의 변화를 표현해야만 관객에게 흡인력이 생길 것 같았다. 극적인 장면이 없다고 배우가 연기를 후루룩 후루룩 국수 넘기듯 쉽게 넘겨버리면 안 되잖나. 한신 한신 꼭꼭 씹어 넘겼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기하기 위해 최대한 계산을 했다.” 그러면서 문채원은 수정만의 매력을 알아챘다. “자기만의 골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 사람들, 남들이 보면 모난 성격인데 자기는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과 수정은 전혀 다르다. 자신의 성격, 현재의 정체된 연애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고 자기 틀을 깨보려고 노력한다. 그 애씀이 안쓰럽다. 그래서 애정이 간다.” 일상에 지쳐 있던 한 여자가 우연히 기차에서 마주친 낯선 남자와의 짧은 만남으로 행복감을 느껴가는, 그 시작의 순간이 이 영화의 진지한 면이라고 문채원은 귀띔한다.
문채원 역시 지난해는 자신의 한계를 직시해야 했던 시간이었다. “1년에 자신감에 차 있는 날이 며칠이나 되는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로 스스로에게 관대하지 못한 편이기에 내적인 자기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연기든 인간관계든 포기라는 걸 모르고 살았다. 근데 나를 너무 짓이겨가며서까지 붙잡고 있는 건 결과적으로 좋지 않더라. 견적이 안 나온다 싶으면 빨리 포기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웃음) 또 이렇게 인터뷰라도 할 때면 자꾸만 내 말에 살을 붙인다. 내가 마치 엄청나게 멋지고 그럴듯한 작업을 한 것처럼 미화한다. 음식도 느끼하면 금방 싫증나듯 내 말도 좀더 담백해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문채원은 자신을 아끼며 즐겁게 일하는 법, 좀더 성숙한 배우가 되는 길을 찾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부지런히 또 걸음을 옮겨본다. “나의 생각이나 내 연애관, 가족이나 사회에 대해 질문하게끔 만드는 이야기에 끌린다”는 그녀의 다음 선택은 3월 방영예정인 MBC 드라마 <굿바이 미스터 블랙>(2016)이다. 문채원의 또 다른 “실험”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