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덕호의 시네마 애드리브]
[황덕호의 시네마 애드리브] 웃음과 노래, 힘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무기
2016-01-13
글 : 황덕호 (재즈 칼럼니스트)
<쿨 핸드 루크>와 랄로 시프린
<쿨 핸드 루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90)에서 신영복 선생은 문신을 “불행한 사람들의 가난한 그림”이라고 말했다. 돈도 지식도 배경도 없는 민초들이 험한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몸뚱이에 그린 그림이 문신이란 이야기다. 그래서 문신은 일견 위협적이지만 본질적으로 서글픈 그림이다. 국내 첫 개봉 때 <폴 뉴먼의 탈옥>이란 제목으로 소개되었고 이후 <폭력탈옥>이란 제목으로 TV에서도 방영됐던 스튜어트 로젠버그 감독의 <쿨 핸드 루크>(Cool Hand Luke, 1967)에서, 도로공사에 투입된 죄수들 중 ‘타투’(워런 피너티)는 잠깐의 휴식 시간이 주어지자 뙤약볕이 내리쬐는 길바닥에 그대로 널브러진다. 헐떡이는 그의 가슴 한가운데에는 붉은 인어가 문신으로 새겨져 있다. 힘에 겨워 일그러진 그의 표정과 땀으로 범벅된 그의 고단한 가슴은 그 순간 문신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낸다.

하지만 <쿨 핸드 루크>는 힘없는 사람들이 문신보다 더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자기 방어수단 또는 저항의 무기를 예리하게 포착해냈다. 바로 웃음과 노래다. 움베르토 에코가 <장미의 이름>(1980)에서 이야기했듯이 웃음이 있는 곳에는 두려움이 없고 두려움이 없는 곳에선 신이 설 자리란 없다. 절대적이고 카리스마적인 권력일수록 그들은 웃음을 멀리하고 엄숙과 비장미로 자신을 치장하려고 한다. 노래 역시 마찬가지다. 절대권력이 필요로 하는 노래는 위에서 하달한 엄숙한 노래이며 반대로 저잣거리에서 불리는 신세타령 혹은 히죽거리는 풍자들은 늘 경계와 감시의 대상이다. 비정치적인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와 유신이 양산해낸 ‘퇴폐음악’과 ‘금지곡’은 그 시대가 근본적으로 노래를 불온시했다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두렵지 않은, 침착한 마음을 의미한다. 보잘것없는 패를 쥐고도 카드게임에서 대범하게 돈을 따내는 루크 잭슨(폴 뉴먼)을 두고 감옥 동료들이 ‘침착한 루크’(Cool Hand Luke)라고 부르자 루크가 대답한다. “잃을 게 없는 자만이 진정으로 침착해지는 법이지.” 전쟁 때(아마도 한국전 또는 베트남전이었을 것이다) 무공훈장을 탄 루크지만 그 시대 많은 참전 군인들이 그랬듯이 그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회의한다. 단적으로 그는 무신론자다. 로버트 N. 벨라가 신이라는 개념이 미국이라는 사회를 근원적으로 통합시켜주는 힘이라고 말했던 것에 비춰보면- 그래서 벨라는 특정한 종교가 아닌 ‘시민종교’란 개념을 사용했다? 루크는 완전한 무국적자다. 당연히 교도관들은 그가 무신론자라는 사실을 탐탁지 않게 바라본다.

전쟁에서 돌아온 그는 남부의 한 시골 마을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날 밤 술에 취해 마을 주차장에 서 있는 주차요금 징수기들을 댕강댕강 잘라놓는다. 기물파손혐의로 경찰이 그에게 다가오자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파란 눈을 반짝이며 천진한 웃음을 터뜨린다. 그는 이 죄로 징역 2년에 처해져 당시 미국 남부에서 진행된 도로건설 현장에서 수감자들과 함께 하루 종일 뼈빠지게 일한다. 하지만 루크는 오기와 반항의 인간이다. 그리고 이 기질은 그가 늘 안면에 머금고 있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통해 감춰지고 때론 드러난다. 감옥에 들어오자마자 내무반장이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수많은 규율을 들을 때도 루크는 고개를 숙이고 웃고 있고, 가장 힘겨운 도로포장 공사 때 그는 오히려 신명나게 뛰어다니며 삽질을 하는 바람에 그날 일은 예정보다 두 시간이나 빨리 끝난다. 주말에 수감자들에게 약간의 자유 시간이 주어졌을 때 루크는 한 시간에 삶은 달걀 50개 먹기 내기에 참가에 불굴의 의지로 승리할 만큼 무모하고 천진난만한 인간이다. 처음 수감되었을 때 늘 비웃는 것 같은 얼굴의 이 반항아를 왕초 격인 드래그라인(조지 케네디)이 가만둘 리가 없다. 주말에 두 사람은 권투시합을 벌이는데 체격이 루크보다 훨씬 큰 드래그라인에게 루크는 완전히 묵사발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크는 피떡이 된 얼굴을 하고도 다시 일어나 드래그라인에게 덤벼든다. 쓰러져도 일어나고 쓰러져도 또 일어난다. 보다 못한 동료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고 드래그라인마저 그만하자며 등을 돌리는데도 루크는 여전히 비틀거리며 상대를 찾는다. 멀리 있는 카메라가 부감으로 혼자 갈지자로 걷는 루크를 잡았을 때 그의 울퉁불퉁한 얼굴에는 여전히 흐릿한 미소가 번져 있다. 그리고 그 위로 랄로 시프린의 <메인 타이틀>이 흐른다. <디어 헌터>(1978)에서 존 윌리엄스가 연주한 <카바티나>보다 무려 11년 먼저 만들어진 이 기타 선율의 음악은 세상과 웃으며 맞설 수밖에 없는 왜소한 우리의 루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권투경기 이후에 드래그라인이 오히려 그의 추종자가 되었던 것처럼.

이 영화에서 노래는 웃음만큼이나 명백한 울분의 표현이다. 얼마 전 면회를 온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전갈을 받고 루크는 내무반 자기 침대로 간다. 그러고는 만돌린을 꺼내 아마도 어머니가 어릴 적 불러줬을 <예수님 인형>(Plastic Jesus, 이 민요는 국내 ‘오란C’ 음료 광고로 쓰였다)을 무표정하게, 하지만 사무치는 그리움을 담아 부른다. 그리고 어머니 장례식 기간에 탈옥할 소지가 많다는 이유로 보통 규율 위반자들이 들어가는 좁은 ‘상자’(나무로 된 별채 독방)에 하루 반나절 동안 갇힌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루크는 단 2년의 복역기간을 참지 못하고 진짜로 탈옥을 시도한다.

물론 반항이란 본질적으로 무모한 것이다. 루크의 두번의 탈옥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그는 특별관리대상이 되어 참혹한 노동과 구타에 시달린다. 형량은 불어나고 두꺼운 쇠사슬 두개가 두 발목 사이를 붙들고 있다.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루크만은 하루 종일 사람 키만큼 땅을 팠다가 덮고 다시 파는 일을 반복할 때, 동료들은 저만치 떨어져 앉아 흑인 영가 <날 가둘 무덤이란 없네>(Ain’t No Grave Gonna Hold My Body Down)를 부른다. 교도관에게 맞아 루크가 쓰러질 때 노래는 잠시 숨을 죽이고 멈추지만 다시 그가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면 수감자들은 마치 응원가처럼 이 노래를 부른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어머니의 면회 장면이다. 동생 존이 루크의 어린 조카와 함께 작은 트럭을 몰고 면회 왔을 때 트럭 짐칸의 간이침대에 어머니(조 반 플리트)가 누워 있다. 어머니는 병색이 완연하지만 담배를 물고 여유만만한 미소를 짓는다. 어머니와 아들은 맞담배를 피우고 웃으며 서로를 위로한다. 짧은 면회가 끝나고 트럭이 떠날 때 다시 부감으로 비친 어머니는 소리 없이 울음을 삼키고 있다. 그 위로 한 수감자가 부르는 <주님께 더 가까이>(Just a Closer Walk)가 흐른다. 하지만 권력은 그 슬픔을 그대로 놔두지 않는다. 화면은 다시 도로공사 현장으로 나가는 여러 대의 트럭으로 오버래핑되면서 음악은 육중한 오케스트라 음악인 <길 위의 무리>(Road Gang)로 뒤덮인다. 이 시퀀스는 음악으로 표현된 저항과 억압의 한판 대결이다.

영화의 결말은 루크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그럼에도 영화는 루크의 승리를 이야기한다. 세 번째 탈옥 끝에 총에 맞고 죽을 때조차 그는 미소를 짓고 있기 때문이다. 그 현장에 있었던 드래그라인은 수감자들에게 전설의 루크에 대해 이야기한다. 진정한 ‘쿨 핸드 루크’. 루크 본인의 말처럼 그는 “몽둥이로는 길들여지지 않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미소 짓는 루크의 여러 컷 위로 애잔한 <메인 타이틀>이 대미를 장식한다. 웃음과 노래의 승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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