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영화제] 믿고 보는 재미
2016-01-20
글 : 김보연 (객원기자)
제11회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1월21일부터 2월28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워 룸>

2006년에 처음 시작해 올해로 11회째를 맞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의 가장 큰 재미는 영화인들의 각양각색 추천작을 확인하는 것이다. 올해도 허우샤오시엔•박찬욱 감독, 임수정•정재영 배우 등 15명의 ‘친구들’이 16편의 작품을 추천했고(허우샤오시엔 감독이 특별히 두편의 영화를 추천했다), 이들의 다양한 개성에 걸맞게 각 추천작들은 특정 장르나 시대에 쏠리지 않았다. 고전에서 다큐멘터리까지, 멜로드라마에서 호러까지 골고루 분포된 친구들의 선택작을 몇편만 살펴보자.

다큐멘터리: <워 룸>(감독 크리스 헤게두스, D. A. 페네베이커, 1993)

이번 ‘친구들의 선택’ 섹션 중 가장 낯선 작품은 바로 다큐멘터리영화인 <워 룸>이다. 변영주 감독이 추천한 이 영화는 1992년 당시 빌 클린턴과 조지 H. W. 부시(‘아버지’ 부시)의 대통령 선거 과정을 기록한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는 두 대선 후보의 전형적인 대결 구도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대신 빌 클린턴이 얼굴을 내비치지도 않는 선거 캠프의 ‘워 룸’(War Room)에 집중한다. 즉 선거 전략가들이 어떻게 ‘전쟁’을 치르는지 생생히 담아내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재미있는 건 한 나라의 대통령을 결정하는 과정이 그렇게 거창하고 멋있기만 한 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단상이 놓인 각도와 피켓에 사용할 색깔 하나에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갑자기 터진 빌 클린턴의 옛 연인에 대한 민망한 이슈를 덮느라 당사자보다 더 곤란한 순간을 겪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이 지난 다음 찾아오는 마지막 결과 발표의 순간에는 그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긴장과 흥분이 저절로 찾아온다. 정치를 둘러싼 온갖 음모론에 익숙해진 지금의 현실에 비춰봤을 때 ‘정치 노동자’들의 굵은 땀방울에 주목한 선택이 오히려 더욱 신선하게 다가오는 흥미진진한 다큐멘터리다.

<특급 비밀>

코미디: <특급 비밀>(감독 짐 에이브러햄, 데이비드 주커, 제리 주커, 1984)

친구들 영화제의 단골 중 한명인 류승완 감독은 가장 의외의 선택을 보여줬다. 그가 선택한 영화는 바로 <총알 탄 사나이> 시리즈 등으로 유명한 ZAZ 사단의 패러디 코미디 <특급 비밀>이다. 발 킬머의 공식 데뷔작이기도 한 이 영화는 온갖 장르의 클리셰를 비틀며 예상치 못한 웃음을 만들어낸다. 이를테면 차에 탄 사람을 통째로 폐차해버리는 끔찍한 순간도 <특급 비밀>은 기괴한 상상력으로 뒤틀어버린다. 이제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사람이 자동차 부품과 한몸이 된 ‘기계 인간’으로 등장해 돌아다니는 것이다(특정 부품을 만지면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뜬금없는 <푸른 산호초> 패러디, 인간과 동물의 예기치 않은 친밀한 조우 등 앞뒤 가리지 않고 일단 유머를 시도하고 보는 웃음에 대한 강박적인 집념이 강한 인상을 남긴다. 또한 류승완 감독은 이 영화야말로 극장에서 다 함께 봐야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다운 영화”라고 추천했는데, 그런 맥락에서 작품 자체에 대한 반응보다 극장을 찾은 관객의 경험담이 더 궁금해지는 작품이다.

<멋진 인생>

드라마: <멋진 인생>(감독 프랭크 카프라, 1946)

영화의 ‘고전’에 대한 정의는 은근히 애매한 문제다. 이는 단순히 만들어진 시기의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작품으로서의 완성도와 주제의 보편성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랭크 카프라의 <멋진 인생>은 고전의 완벽한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이 영화에는 이상적인 공동체상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있으며,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시도하는 도전 정신이 존재하며, 제임스 스튜어트를 위시한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가 두드러진다. 그리고 순도 높은 해피엔딩과 인생의 쓴맛을 능숙하게 섞음으로써 볼 때마다 각각 다른 감상을 안겨주기도 한다. 다시 말해, <멋진 인생>은 단지 오래된 작품으로서의 고전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동시대성을 획득하는 데 성공한다. 이번 영화제의 개막작이기도 하며, <멋진 인생>처럼 힘든 현실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인간의 따뜻한 마음씨와 부드러운 의지를 그려온 배창호 감독이 추천했기에 더욱 의미가 깊은 영화다.

서부극: <빅 건다운>(감독 세르지오 솔리마, 1966)

친구들 영화제에서 오승욱 감독이 추천하는 사나이들의 영화가 빠질 수 없다. 올해 그의 추천작은 60년대 스파게티 웨스턴인 <빅 건다운>이다. 우리에게는 <석양의 무법자>(1966) 속 멋진 악역으로 익숙한 리 반 클리프가 정의의 총잡이로 나오는 작품이다. 혹시 ‘스파게티 웨스턴’이란 말만 듣고 비슷한 무대와 비슷한 인물들 그리고 비슷한 흐름의 이야기를 예상하겠지만 이는 <빅 건다운>에 해당하지 않는다. 주인공의 설정부터 이야기의 흐름까지 장르의 전형을 하나씩 깨트리는 쾌감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요한 순간마다 악당의 꾀에 빠져 체면을 구기는 리 반 클리프의 모습은 그의 팬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즐거움을 안길 것이다. 또한 서부극의 주요 테마 중 하나인 법과 국경이란 소재는 이 영화에서 예상치 못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고전기 작품으로는 존 포드의 <아파치 요새>(1948)나 프리츠 랑의 서부극, 최근 작품으로는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같은 영화를 연상시키는 <빅 건다운>은 장르적 재미와 묵직한 주제 의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가뿐하게 모두 잡는다.

그리고, <노 홈 무비>(감독 샹탈 애커만, 2015)

지난해 샹탈 애커만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이 상실감을 조금이라도 달래고 싶어서였을까, 우연의 일치로 정성일 평론가와 서울아트시네마가 같은 영화를 선택했다. 바로 샹탈 애커만의 유작 <노 홈 무비>이다. 샹탈 애커만은 이 영화에서, 언제나 그랬듯 정적인 미장센을 바탕으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는 어머니의 방을 찾아가 작은 카메라를 세워둔 뒤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화상통화를 시도한다. 많은 말이 오가지만 그중에는 어머니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처럼 입 밖으로 쉽게 나오지 않는 것도 있다. 그렇게 시간이 쌓이면서 단순한 화면 안에 묘한 긴장감과 여러 개의 의미층이 발생하고 그럴 때 감독은 문득 사막의 황량한 풍경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렇게 영화의 내용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는 이 영화를 제대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영화에 출연한 두 사람은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 사실이 <노 홈 무비>의 내용과는 별개의 복잡한 감정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대한 냉철하고 본격적인 논의는 아마 좀더 시간이 흐른 뒤에야 가능할 것 같다.

아직 소개하지 못한 작품이 훨씬 더 많지만 한 작품만 더 언급하고 싶다. 이번 친구들 영화제에는 특별한 손님이 있다. 바로 허우샤오시엔 감독이 두편의 추천작 <부운>(감독 나루세 미키오), <무셰트>(감독 로베르 브레송) 그리고 자신의 신작 <자객 섭은낭>과 함께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을 계획이다. 신작에 대한 이야기는 이창동 감독과의 특별한 대담으로 꾸려질 계획이라고 하니, 어쩌면 이날 대담을 손꼽아 기다릴 관객이 가장 많을지도 모르겠다. 이 행사를 포함해 모든 친구들이 관객과 대화의 시간을 한번씩 가질 예정이며, 샹탈 애커만에 대한 비평 좌담, 최근 부산국제영화제 사태에 대한 논의의 자리도 준비되어 있다. 15명의 친구들, 그리고 28편의 영화와 함께하는 이번 ‘2016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1월21일(목)부터 2월28일(일)까지 열린다. 각 영화의 재미는 물론 영화인들의 서로 다른 개성까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길 바란다.

2016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상영작

친구들의 선택작

•배창호 감독 <멋진 인생>(프랭크 카프라, 1946)
•박찬욱 감독 <호프만 이야기>(마이클 파웰, 에머릭 프레스버거, 1951)
•최동훈 감독 <가방을 든 여인>(발레리오 주를리니, 1961)
•오승욱 감독 <빅 건다운>(세르지오 솔리마, 1966)
•류승완 감독 <특급 비밀>(짐 에이브러햄, 데이비드 주커, 제리 주커, 1984)
•이해영 감독 <어둠의 사투>(조지 로메로, 1988)
•김홍준 감독 1월15일 현재 미정. 추후 공개 예정
•변영주 감독 <워 룸>(크리스 헤게두스, D.A. 페네베이커, 1993)
•장건재 감독 <증오>(마티외 카소비츠, 1995)
•정재영 배우 <아들>(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2002)
•임수정 배우 <허공에의 질주>(시드니 루멧, 1988)
•손아람 작가 <포레스트 검프>(로버트 저메키스, 1994)
•정성일 평론가 <노 홈 무비>(샹탈 애커만, 2015)
•정한석 평론가 <게으름뱅이 병사>(장 르누아르, 1928)
•허우샤오시엔 감독 <부운>(나루세 미키오, 1955) <무셰트>(로베르 브레송, 1967)

샹탈 애커만 회고전 <잔느 딜망>(1975) 등 11편
관객의 선택 <미치광이 같은 사랑>(자크 리베트, 1969)
특별상영 <자객 섭은낭>(허우샤오시엔, 2015)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