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이성민] 인간 이성민의 연장(延長)
2016-01-26
글 : 정지혜 (객원기자)
사진 : 백종헌
<로봇, 소리> 이성민

영화 2016 <리얼> 2016 <검사외전> 2016 <로봇, 소리> 2015 <손님> 2014 <빅매치> 2014 <두근두근 내 인생> 2014 <군도: 민란의 시대> 2013 <방황하는 칼날> 2013 <관능의 법칙> 2013 <변호인> 2012 <마이 리틀 히어로> 외 다수

드라마 2016 <기억> 2015 <구여친클럽> 2015 <화정> 2014 <미생> 2013 <미스 코리아> 2012 <골든 타임> 2012 <더킹 투하츠> 외 다수

“소리, 깨워라. (웃음)” 인터뷰 시작 전. <로봇, 소리>의 주연배우 이성민이 카페 한쪽에 있던 ‘소리’라는 이름의 로봇을 보며 말을 건다. 모르고 들으면 꼭 손님을 맞는 아버지가 자고 있는 자식을 깨우는 소리 같다. 그 말을 용케도 알아들은 건지 로봇이 금세 작동을 시작한다(물론 로봇 조종기를 이용해 움직임을 준 것이지만). “(로봇을 보며) 얘도 주인공인데 무대 인사를 가도 만날 나만 말을 하고. 허허.” 이웃집에 사는 친근한 아저씨 같은, 일상의 시공간에서 부지기수로 마주쳤을 것만 같은 편안하고 평범한 인상의 배우 이성민이라서일까. 무생물인 로봇을 보며 말을 거는데도 그게 영 엉뚱한 소리처럼 들리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지극히 현실적인 대화로 들릴 정도다.

많은 경우 이성민은 평범하고 보편적인 인물을 스크린(<관능의 법칙>의 중년 남편, <방황하는 칼날>의 형사 등)과 TV(<미생>의 회사원)로 옮겨왔다. 그가 연기하는 인물들을 관객은 아무런 이물감이나 거리감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건 분명 이성민이 가진 능력이다. <로봇, 소리> 역시 그의 이 재능에 십분 기댄다. 이번에 이성민은 실종된 딸 유주(채수빈)를 10년째 찾아 헤매는 아버지 해관 역을 맡았다.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쌓인 극도의 절망감, 절대적인 피로감이 꺼칠꺼칠한 피부, 손질하지 않은 꺼뭇꺼뭇한 수염, 간간이 보이는 흰머리, 푹 꺼진 눈두덩이에 뚝뚝 묻어난다. 그런 해관이 어느 날 지구로 떨어진 인공지능 위성 로봇을 발견한다. 소리를 듣고 그 소리의 위치를 추적하고 소리와 관련된 각종 정보를 정리하는 능력을 가진 로봇이다. 해관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로봇과 동행해 딸을 찾으려고 한다.

이성민이 해관을 연기하겠다고 마음먹은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실제로 중3 딸을 키우는 아빠로서 딸을 잃은 해관에게 눈길이 절로 갔다. “부모는 늘 자식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 물론 나는 해관처럼 딸에게 ‘네가 원하는 게 뭔지 너는 아직 모른다’고 말하는 아빠는 아니다. 딸이랑 대화가 많은 아빠다, 정말로.” 영화의 주요 배경이 대구라는 점도 컸다. 2000년대 초반 극단 차이무에 입단해 상경하기 전까지 이성민은 줄곧 대구에서 연극 활동을 했다. 그가 “청춘을 보낸 곳”이다. 게다가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가 극의 중심에 있다. 해관이 실종됐다고 생각하는 유주는 참사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실제 사고를 픽션에 끌어오는 작업이라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촬영 전에 감독님, 스탭들, 소속사 매니저들까지 다 함께 대구 지하철 참사로 희생된 분들을 기리는 대구 팔공산 추모비를 찾았다. 언론시사회 전날에는 혼자 한번 더 다녀왔다. ‘영화 무사히 잘 만들었다’고 그분들께 먼저 전하고 싶었다.” 이번 작품은 배우로서 뭔가 새로운 작업을 해본다는 의미에서도 신선했다. “로봇과 연기할 기회가 얼마나 있겠나. ‘로봇과의 연기가 어렵지 않았냐’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전혀. 로봇이 말을 하는데 해관이 얼마나 생소했을까. 그 감정이 곧 해관이 느낀 감정일 테니 일부러 로봇과 교감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다만 ‘소리’와 액션, 리액션을 만드는 작업은 필요했다. 해관과 소리가 기타 가게에 있는 장면이 있다. 왜 아이들이 엄마랑 어디 가면 가만히 못 있고 왔다갔다 하잖나. 그래서 소리를 막 움직이게 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럼 내가 ‘조용히 해!’라고 소리 지르고. 소리가 고개를 돌리는 타이밍을 계산해서 마치 소리가 삐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걸 감독님과 함께 만들어갔다.”

그렇게 애정을 갖고 완성한 <로봇, 소리>는 이성민에게 지금껏 한번도 느끼지 못한 감정까지 불러일으키는 중이다. “어젯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요즘 멍한 채로 시간을 보낸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뭔가 판결을 기다리는 것 같은.” ‘첫 번째 단독 주연작’이라는 무게감 때문이었다. 연극, 영화, 드라마 등 매체를 타지 않고 연기해온 노련한 배우에게도 종잡을 수 없는 영화 시장에서 극을 이끈 배우로서의 책임감이란 상상 이상이었다. “상업영화에서 내 이름이 크레딧의 맨 처음에 나오는 게 처음이다. 그만큼 내가 영화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져야 한다. 왜 주연배우들이 촬영장에서 모니터를 꼼꼼히 보는지도 조금은 알겠고. 어서 개봉(1월27일)하고 스코어가 나와서 하루빨리 이 모든 상황이 끝났으면 좋겠다.” 작은 배역만 하다 처음으로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했던 <고고70> 때 그는 “신을 온전히 책임진다”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로부터 시간이 흘러 지금은 이성민에게 거는 관객과 영화계의 기대감이 커진 것이다. “그나마 언론 배급 시사회 후 반응이 호의적인 것 같아 시름의 반을 놓았다”는 그가 양손으로 얼굴을 한번 쓸어내렸다.

홀로 극을 이끈 경험은 많지 않다지만 흥미롭게도 이성민은 극 안에서 종종 리더의 면모를 보였다. 최고 결정권자로서의 리더는 아니다. 넘어설 수 없는 견고한 힘 앞에 놓인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다. <군도: 민란의 시대>에서는 지리산 추설의 수장으로서 “약한 자의 힘이 되어 힘 있는 자와 싸워 하늘 아래 형제의 의의를 다시 세울 것”을 천명했다. 공동체의 목표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조윤(강동원)의 “미끼”로 던지는 투사이기도 했다. 드라마 <미생>의 오상식 차장도 그렇지 않았던가. 조직에서 개인은 할 수 있는 일보다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는 게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는 냉철한 현실 인식을 가진 중간 책임자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애는 쓰는데 자연스럽고 열정적인데 무리가 없”는 인턴 사원 장그래(임시완)를 마음으로 품어주고, 혼자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는 다른 팀 후배 안영이(강소라)에게 따뜻한 말을 건넬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부터 원하지 않아도 어느새 반장이 돼 있었다. 심지어 초등학교 때는 전교 어린이회장도 했다. 하기 싫어서 도망까지 갔다니까. 군대에서는 내무반장을 했고. 그런 인생의 흔적이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내 몸에, 얼굴에 묻어나나 보다. 원하는 대로 골라서 살거나 연기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배우는 누군가에게 쓰이는 존재니까 나를 쓰는 사람들에게 그런 이미지로 찜을 당한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지금껏 익숙하게 봐온 배우 이성민은 인간 이성민이 가지고 있던 모습들의 연장일 가능성이 크다. 가지고 있던 성정을 끄집어냈기에 그 과정은 발견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제 이성민은 자신을 두고 새로운 걸 창안해내는 작업을 해보고 싶어 하는 눈치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절대적으로 새로운 걸 만들고 싶다. 철저히 계산된 연기를 해야 하니 분명 고통스러울 테지만 쾌감이 있을 거다. 눈빛 하나하나 계산해 연기했던 <손님>의 촌장도 그런 시도의 하나였지만 그보다 좀더 잔인한 그 무엇에 도전해보고 싶다.” 어떤 작품으로 이어질지는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일단은 <로봇, 소리>에 이은 <검사외전>의 개봉과 <리얼>의 촬영이 그를 기다린다. 연극도 꾸준히 할 생각이다. “연극 작업은 일 때문에 어떤 책을 계속 보다가 내가 좋아하는 책을 보는 느낌이다. 힐링이 된다. 근데 이젠 연극 말고 가족 여행으로 힐링을 해야 할 텐데. 가족들의 원성이 장난이 아니다. <로봇, 소리>가 잘되면 가야지.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웃음)”

<로봇, 소리>

이름을 하사하는 남자

이성민에게서 ‘평행이론’을 하나 발견해보자. 그는 누군가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는 사람이다. <군도: 민란의 시대>의 추설의 수장 대호는 백정 돌무치(하정우)에게 도치(倒置)라는 이름을 준다. “(돌무치를 안아주며) 니 이름은 인자부터 도치여. 뒤바꿈한다는 뜻이제. 아무리 지 잘나고 대갈빡에 든 게 겁나게 많아도 사람이 배려버리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겨. 사람이 쪼까 모잘라도 된 사람이 되거라.” <로봇, 소리>에서 해관은 장황한 로봇의 이름을 걷어치우고 ‘소리’라는 이름을 붙인다. “너는 세상 소리 다 듣는 녀석이니까. 소리 해라, 소리!” 새 이름은 곧 새 사람, 새 인생의 시작을 뜻한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그 이름을 가장 먼저 불러주는 사람은 이름의 주인공에게는 누구보다 소중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다. 배우 이성민이라면 ‘그럴 만하다’는 수긍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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