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지만, 첫 흑백 장면에 등장하는 두 마리 당나귀를 보며 괜히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1966)를 떠올려본 것이 딱히 이상한 일만은 아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두 단어의 접붙임으로써, 마치 브레송이 무협영화를 만들면 이러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험한 세상 속에 놓인 인물의 내적 갈등, 침묵을 응시하는 것만 같은 고요한 정경이 그러했다. 발타자르는 물론 브레송의 다른 영화 <무셰뜨>(1967)의 무셰뜨가 겪는 고난의 여정만큼이나 섭은낭이 처한 상황(지방 세력인 번진이 저마다 세력다툼을 하던 혼란스런 당나라 시대의 자객)도 그러했다. 우리가 ‘무협영화’라고 상정할 때 예상하는 그 모든 것들을 비켜가는 리듬과 정서의 엮임 또한 그러했다. 그래서 ‘자객 무셰뜨’라는 제목을 붙여도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더 나아가 때로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거미집의 성>(1957)과 <란>(1985)이 겹쳐 보이기도 했고, 화어권 영화의 전통 혹은 멜로드라마로서의 무협영화라는 측면에서 호금전이나 장철이 아니라 <강산미인>(1959)과 <양산박과 축영대>(1962)를 만든 이한상 감독의 쇼브러더스 영화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어쨌건 그런데 (브레송의 영화를 떠올리게 된 직접적인 계기이기도 한) 도입부를 왜 흑백으로 처리했을까. 배형의 원작 <섭은낭>에도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흰 당나귀와 검은 당나귀, 그렇게 두 마리의 당나귀가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그래서 그 도입부에서 두 마리를 분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구별할 일도 없다. 그저 화면을 채우고 있는 두 마리의 당나귀에 불과하다. 그런데 내게는 별 의미 없어 보이는 풍경으로서의 그 도입부가, 섭은낭이 이후 계속 직면하게 될 어떤 ‘선택’의 문제에 대한 암시처럼 느껴졌다. 지난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들에서 이처럼 주인공으로 하여금 어떤 단호한 결단의 순간으로 내몬 영화가 있었던가? 이 혼란스런 시대상 안에서 여협객 섭은낭은 과연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당나라 시대, 배형의 동명 원작과의 비교
영화의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고위관료의 딸로 태어났지만, 정혼자였던 전계안(장첸)과의 이별 후 섭은낭(서기)은 한 여도사에 의해 자객으로 키워진다. 그렇게 5년의 세월이 흘러, 섭은낭은 그 스승으로부터 위박 지역의 절도사이자 한때 사랑했던 전계안을 암살하라는 명을 받는다. 자객으로서의 임무와 인정이라는 선택의 기로 앞에서 섭은낭은 흔들리게 된다. 원작은 장편에 미치지 못하는 분량이기에 감독의 상상력이 많이 더해져서 원작과 상당 부분 다르다.
가장 궁금한 점은 허우샤오시엔이 왜 당나라 시대로 갔을까, 하는 점이다. 여기에는 다소 긴 설명이 필요하다. <자객 섭은낭>의 원작 <섭은낭>은 당나라 시대 소설이다. 과거 한나라 시대 사마천의 <사기> 중 <유협열전>이나 <자객열전>에서 자객이 등장했지만, 본격적인 무협소설이라 말할 수는 없었다. 이후 남북조 시대에 무사가 활약하고 귀신도 등장하는 괴이한 이야기라는 뜻의 ‘지괴소설’이라는 형식이 유행한 뒤, 문학이 융성했던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무협소설의 초창기 형태인 전기(傳奇)소설이 등장했다. 무협소설의 ‘신필’ 김용이 ‘무협소설의 원조’라 불렀던 <규염객전>과 <홍선>을 비롯해 배형 작가가 쓴 <곤륜노> <섭은낭>이 대표적이다. 신선과 귀신 이야기, 그리고 남녀간의 애정 문제가 주요한 소재였다. <자객 섭은낭>의 도입부 배경 설명으로도 등장하는 것처럼, 당나라 중엽 이후 지방 세력인 번진이 할거하던 혼란한 국면과도 무관하지 않다. 당시 각지의 번진 세력들은 서로를 적대시하며 자객을 양성해 상대방을 위협하고 견제했다. 어지러운 현실의 탈출구로서 정의로운 협객에 의지하고 싶은 대중의 욕구였을 텐데, 공교롭게도 ‘홍선’과 ‘섭은낭’ 모두 여협객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중국 전통문화 연구자이자 무협소설 평론가인 량수중의 <강호를 건너 무협의 숲을 거닐다>에 따르면, <섭은낭>은 무협소설의 형식을 가장 잘 갖췄다는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여도사가 제자를 거두고, 심산유곡에서 검술을 익히고, 약물을 복용하여 몸을 가볍게 하고, 수리와 호랑이를 상대로 격투를 하며, 간악한 무리를 주살하고, 새처럼 허공을 날아다니며, 깊은 밤에 두건을 쓰고 잠입하는 등과 같은 무협소설의 요소가 많이 등장한다. 이런 요소들은 후세의 무협소설에 부단히 반복되고, 비슷한 형태와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자, 그런데 영화에는 정작 이런 요소들이 도무지 관객을 현혹하려 들지 않는다. 진산의 <중국무협사>에 따르면, 심지어 김용은 <섭은낭>에 대해 말하길 “여도사가 섭은낭에게 검술을 지도하는 상세한 단계는 이후 무협소설에서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에 무척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까지 말했었다. 말하자면 허우샤오시엔은 섭은낭이 자객으로서 키워지는 수련의 과정, 도술에 가까운 기예로서의 액션 장면 연출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이인형 술법이 등장하는 것 정도를 제외하고는 지극히 사실적인 액션 연출이다. 결국 그는 시대극의 틀을 빌려 현실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단호한 선택과 결단의 문제에 직면한 여자객
다시 초반부로 돌아와, 섭은낭은 “그자의 아이가 너무 귀여워 차마 죽일 수 없었습니다”라며 한 암살 임무에 실패하게 된다. 그러니까 죽여야 할 남자와 그자의 아이 둘 다 죽이지 못하고 돌아선 것이다. 하지만 원작에서는 그 아이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서 다소 암살이 지체됐을 뿐, 임무에 실패한 것은 아니다. 원작에서는, 빨리 일처리를 하지 못한 섭은낭에게 도리어 스승이 “그럴 때는 아이부터 먼저 죽여라”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자, 다시 영화로 돌아오면, 영화는 그 아이로 인해 머뭇거리는 섭은낭의 표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후 계안을 마주하면서 겪게 될 오래도록 억눌러 온 감정 분출의 전조로서, 그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이다. 허우샤오시엔의 상상력이 가장 많이 발휘된 부분이 바로 그 지점이다. 절도사인 계안과 특별한 과거가 있었고, 그로 인해 내면의 상처를 머금고 있는 여협객이라는 것이다. 또한 원작에서는 마경소년(쓰마부키 사토시)이 남편으로 등장하여 의지할 수 있게 만든 데 반해, 영화의 섭은낭은 아직 미혼이다. 삶의 기로에서 여러 번의 흔들림을 겪는 인물이다. 더불어 페미니즘 멜로드라마라 불러도 좋을 만큼, 허우샤오시엔의 <자객 섭은낭>은 혼란스런 시대 속에 놓인 여성들의 이야기로 완성됐다. 굳이 ‘연대’의 제스처라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겠으나, 섭은낭의 지난 이야기를 들은 계안의 또 다른 여자는 “섭은낭이 안됐어요”라며 슬퍼한다. 또 이후 섭은낭은 그녀를 도와주기도 한다. 다른 여자객 정정아(영화에서 금빛 복면을 쓴 자객)와의 결투도 원작처럼 극한의 대결구도가 아니다. 혼란스런 시대 속에서 자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두 여자객의 동지애마저 은근히 풍긴다.
한편, 원작에서는 마지막에 이르러 구체적인 이유를 제시하지 않은 채 섭은낭의 행방을 신비롭고 묘연하게 만들었다. 감사의 표시로 건네진 비단을 하나도 받지 않고 술만 취하도록 마신 뒤 떠나간 것. 그래서 ‘그 후 아무도 섭은낭의 모습을 본 이가 없다’고 마무리한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와 결말의 전개는 다르다. 원작과 달리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스승도, 남편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허우샤오시엔의 섭은낭에게 중요한 것은 파격이라 해도 좋을 정도인 스승과의 작별, 그리고 원작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닌 모습으로 새로운 세상과 만나는 것이다. 그렇게 <자객 섭은낭>은 마치 공기의 감촉마저 느껴지는 것 같은, 이제껏 보지 못한 스타일의 무협영화로서의 품격을 갖췄음은 물론이고, 원작과의 비교 속에서 여주인공을 중심에 둔 그 서사의 품격으로도 새로운 경지로 나아간 허우샤오시엔의 현재를 보여준다. 물론 그가 언제나 그래왔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