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단점이 있지만 <로봇, 소리>는 특수효과가 어디까지나 이야기에 봉사하도록 통제한 드문 한국 SF다. 진화한 인공지능 무인 위성 ‘소리’는, 이 영화의 구경거리가 아니라 가장 사려 깊고 독창적인 캐릭터이며 극중 누구보다 주체적으로 운명을 개척한다. 나아가 쿨레쇼프 효과(?)를 활용한 연기로 <아이언 자이언트>의 감동을 재현하는 돋보이는 배우이기도 하다. CG 대신 실물 로봇을 캐스팅한 효과는 훌륭하다. 소리의 흠집난 패널에 아침 햇살이 떨어지는 장면만으로도 수고가 아깝지 않다. “보호는 고마운 것입니까?” 감정을 덜어낸 간략한 명제로 구성된 소리의 화법은, 대화하는 법을 몰랐던 해관(이성민)을 한 발짝씩 각성으로 이끌어간다. 홀로 남은 소리가, 전동 휠체어를 굴려 도시의 밤거리를 돌돌 가로질러가는 대목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다. 질주하는 자동차, 지치고 취한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 문득 멈춰 길고양이에게 고개를 돌리는 소리는 마치 지상을 여행하는 천사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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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의 캐롤(케이트 블란쳇)과 테레즈(루니 마라)는 <렛미인>의 이엘리(리나 레안데르손)와 오스칼(카렐 헤데브란트) 이래, 시각적으로 가장 예쁜 대비를 이루는 커플이다. 베티 데이비스를 연상시키는 케이트 블란쳇과 오드리 헵번을 닮은 루니 마라는 극중 말투와 나이, 계급과 패션이 하나같이 대조적이다. 게다가 줄잡아 15cm는 키가 더 커 보이는 캐롤은 하이힐을, 테레즈는 플랫 슈즈를 신고 영화에 입장한다. 캐롤은 여자와 사랑을 나눈 경험이 있고 이미 각성한 정체성을 배신하지 않고 살아갈 방도를 궁리 중이다. 테레즈는 여자를 사귀어보지 못했지만 남자에게 욕망을 느낀 적이 없다. 스물 언저리의 테레즈는 성 정체성을 포함해 인생의 많은 것을 아직 모색 중이다. 백화점 장난감 코너에서 일하는 테레즈가 구내식당에서 ‘근무수칙집’을 뒤적이고 직원용 산타 모자를 매니저가 재촉할 때까지 쓰지 않는 모습은, 그녀가 이 장소에 속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테레즈의 막연한 꿈은 포토그래퍼다. 그러나 영화가 초반에 슬쩍 보여주는 그녀의 작품은 주로 풍경이나 사물을 담고 있으며 인물 사진은 그림자나 반영에 숨어 있다. 아직 어떤 자리에 서서 타인을 바라보아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캐롤이 인형 매장에 들어서는 순간, 흐릿했던 테레즈의 삶 전반도 통째로 초점거리 안에 들어온다. 싫은 것과 좋은 것이 분명해진다. 때로 사랑이 우리에게 주는 최대의 선물은 관점이다. 캐롤을 향해 셔터를 누른 이후 테레즈의 카메라는 확실한 관점을 갖고 살아 있는 피사체에 다가가기 시작한다. 테레즈는 놀랄 만큼 배움이 빠른 학생이기도 하다. 점심 메뉴조차 망설이는 사람이었던 그녀는 캐롤과 관련된 결정을 단 한번도 주저하거나 반문하지 않는다. 식사할래요? 예스! 담배 피우겠어요? 예스! 우리 집에 올래요? 예스! 예스! 함께 여행가지 않겠어요? 예스! 예스! 예스! 이 젊은 여성의 내면에 웅크려 있던 의지는 때를 만나 한꺼번에 피어난다. 고작 세 번째 만남에서 테레즈는 캐롤에게 도움을 주는 입장에 서고 싶어 한다. 여행 중 한방을 쓰자고 먼저 제안하는 것도 테레즈쪽이다. 하지만 사랑이 시작됐다고 대뜸 혼란이 그치지는 않는다. 세상 무엇도 겁나지 않는, 막 사랑에 휩싸인 연인을 유일하게 불안에 빠뜨리는 것은 사랑하는 상대의 진심이다. 과연 그녀는 나를 사랑할까?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는 걸까? <리플리> 시리즈로 널리 알려진 원작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범죄소설가로서의 장기가 여기서 빛난다. 물론 모든 열정에는 기본적으로 비밀스런 범죄의 속성이 있으며, 특히 <캐롤>에는 사회의 단죄로부터 탈주하는 로드무비의 요소가 포함돼 있다(권총과 도청기도 등장한다). 그러나 그보다 깊숙이 <리플리> 연작과 <캐롤>을 연결하는 고리는, 절체절명의 ‘거사’-범죄/사랑- 앞에서 흥분하고 고양되어 온갖 조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인물의 심리다. 사랑에 빠진 테레즈는 캐롤을 읽기 위해 필사적이다. 그리고 토드 헤인즈 감독과 에드 라흐만 촬영감독은 영화가 전환점을 맞이할 때까지 테레즈의 시야에 몰입한다. 테레즈가 캐롤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그녀의 집을 방문하는 길에 링컨 터널을 통과하는 장면은 이 초조한 황홀경의 결정판이다. 히터를 만지는 캐롤의 장갑 낀 손, 극접사로 찍힌 캐롤의 옷자락, 터널이 만드는 웅웅거리는 음향, 스테레오에서 흐르는 <당신은 내게 속해요>(You Belong to Me)의 가사까지 모든 것이 의미심장하다. 이 신 전체가 마치 하나의 어항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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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때 사람들은 아마추어 기호학자가 된다. 연인들은 서로가 타전하는 신호를 열렬히 기꺼이 해독한다. 토드 헤인즈 감독이 <파 프롬 헤븐> <밀드레드 피어스>(TV시리즈)를 통해 리메이크한 할리우드 고전 멜로영화에서 정념을 드러내는 지배적 기호는 의상과 세트, 소품이었다. 한편 <캐롤>을 지배하고 움직여가는 기호는, 응시다. 시점과 시야, 시선의 움직임이다. 원작의 무대미술가에서 사진작가로 바뀐 테레즈의 직업이 명시하는 대로다. <캐롤>은, 저택의 대문처럼 보였던 철 구조물이 실은 뉴욕 지하철의 환기구였음을 드러내는 숏으로 시작한다. 아직 인물이 소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숏은 영화에서 시점의 결정적 역할을 짚고 넘어가는 ‘일러두기’처럼 보인다. 곧이어 거리를 건너간 카메라는 한 남자를 따라 호텔 안으로 들어가고 마침내 마주 앉은 테레즈와 캐롤의 테이블에 도착한다. 서사와 거의 무관한 행인으로부터 주인공 연인들에게로 이동하는 도입부의 이 흐름과 아무것도 모르는 방해자로 인한 밀회의 중단은 데이비드 린의 <밀회>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캐롤>은 영화 후반에 이르러 첫 번째와는 다른 카메라 앵글로 다시 이 장면으로 돌아온다. 처음에 캐롤을 주도적이고 자신만만한 인물로 받아들였던 관객은, 두 여자가 거쳐온 사랑의 과정을 알고 난 다음 돌아온 같은 자리에서는 구애하는 약자로 캐롤을 바라보게 된다. 관객에게 더 많은 정보를 준 후 원점으로 돌아오는 구조는 <밀회>뿐 아니라 많은 시나리오가 채택하는 기법이다. 그러나 <캐롤>에서 이 구성은 영화 전체가 치밀하게 수행한 시선의 교직과 맞물려 한층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대원칙은 더 사랑하고 욕망하기에 연애의 약자이며 멜로 서사에서는 제1주체가 되는 인물에게 프레임을 동조시키는 것이다. 고전적 이성애 멜로에서 이 역할은 주로 사랑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며 흔히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을 담당하기도 하는 여주인공의 것이다. 독자가 시종 테레즈- 작가 하이스미스의 분신인- 의 피부 밑에 머무르는 원작 소설과 달리 <캐롤>은 2/3지점에서 이 역관계를 뒤집는다. 한번 테레즈를 떠났던 캐롤이 이혼의 분쟁을 통과하며 테레즈가 현재 자신의 삶에서 불가결함을 깨닫기 때문이다. 시점이 확실히 전도되는 지점은 캐롤이 길을 건너는 테레즈를 택시 안에서 우연히 발견하는 순간이다. 이별 이후 신문사에 취직한 테레즈는 캐롤의 기억과는 다른 옷차림으로 (굽 있는 구두를 신고) 세상 속으로 거침없이 혼자 나아가고 있다. 결정적으로 테레즈는 캐롤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캐롤은 테레즈를 ‘재평가’한다. 이제 유리창 안쪽에 갇혀 바라보는 쪽은 캐롤이고 욕망의 대상은 테레즈다. 이 영화가 캐롤과 테레즈의 시선이 마침내 절묘하고 아슬아슬한 균형에 도달하는 순간 멈추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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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얇은 막이 되어 눈을 묘하게 가렸다. 너무 얇아서 남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소설 <캐롤> 중에서)
<캐롤>은 응시의 영화이기에 응시를 가로막는 장애물과 곤경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테레즈와 캐롤- 그리고 관객- 의 시야는 많은 경우 실내를 구획하는 벽과 문, 수증기로 흐려진 창에 의해 부분적으로 차단된다. 두 여자 중 캐롤은 공간뿐 아니라 의상과 액세서리 안에 밀어넣어져 있다. 옷은 행동의 폭을 문화가 허용하는 범위로 제약하는 틀이기도 하다. 테레즈와 함께 있는 캐롤은 핀을 뽑아 머리를 헝클어뜨린다. 구두를 벗고 있다가 남편이 들이닥치자 급히 손에 들고 나오는 장면도 있다. 그러나 <캐롤>의 미술과 촬영은 결코 노골적으로 스스로를 보라고 가리키지 않는다. 이 점이 더글러스 서크의 클래식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에 대한 일종의 메타영화였던 <파 프롬 헤븐>과 감독이 직접 각본을 쓰지 않고 배우(케이트 블란쳇)보다 나중에 프로젝트에 합류한 <캐롤>의 양식 차이이기도 하다. <캐롤>보다 몇년 뒤인 1950년대 후반 아이젠하워 시대 코네티컷을 배경으로 한 <파 프롬 헤븐>에서는 모든 물건이 강렬한 색채로 빛나고 반들거린다. <파 프롬 헤븐>의 아름다운 공간은 좌절된 욕망을 투철히 은폐함으로써 역으로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표면으로 기능한다. 반면 <캐롤>의 1950년대 초 뉴욕은 훨씬 사실적이다. <캐롤>에서 가장 현저한 시각적 요소는 유동적인 투명한 것, 즉 계속해서 재구획되는 시선의 영역이다. <캐롤>의 스타일이 평범하다고 느끼는 관객이 많다 해도 놀랍지 않다. <아메리칸 시네마토그래퍼>에 실린, 촬영감독에게 토드 헤인즈가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 보냈다는 노트를 옮겨 적어두기로 한다. “<캐롤>은 공격적인 앵글과 카메라 움직임, (표현적) 조명보다 시선과 손가락을 더 필요로 하는 영화입니다. 카메라는 인물과 더불어 움직이며 의도를 품은 프레이밍을 수행하지만 그 계기는 반드시 사물과 인물의 운동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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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물어도 될까요?” “제발 그래줘요.” 테레즈와 캐롤에게 사랑 고백은 이 문답으로 충분하다. <캐롤>에서 욕망의 응시를 간절하게 강화하는 요소는 당연히 주인공들의 호모섹슈얼리티다. 내가 그녀/그의 존재를 세상에서 처음으로, 유일하게 발견했다는 확신과 환희는 모든 사랑에 따르는 감정이지만, <캐롤>의 헤테로섹슈얼 관객은 이 퀴어 멜로드라마를 통해 사랑의 본질적 고립감과 해방감을 한층 높은 밀도로 경험하는 수혜를 누린다. <캐롤>의 배경인 1952년 무렵은 동성애를 심리적 질환으로 간주하던, 개명 이전의 시대지만 퀴어영화로서 <캐롤>은 단호하고 모던하다. 캐롤은 비단 남편에게 정이 없어서 여성에게 눈을 돌린 게 아니다. 그녀와 절친한 친구 애비(사라 폴슨)와의 연인 관계는 이혼 결심 전에 이미 끝났다. 테레즈는 여자보다 남자들과 어울려 여가를 보내기를 즐기지만, 섹스 문제에 이르면 남성과의 접촉에 무감동하다(원작자와 10년간 친분이 있었던 각색자 필리스 나지의 인터뷰에 따르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도 비슷한 패턴이었다고 한다). 즉, 남자들의 성적 접근이 특별히 폭력적이라 환멸을 느낀 경우가 아니다. 무엇보다 흥미롭게도 <캐롤>의 모든 인물들은, 동성애가 사회적 터부임을 전제하면서도 캐롤과 테레즈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공공연히 드러낼 수 없을 뿐 여성끼리의 성애가 엄연한 현실이라는 사실은 은연중에 인지된다. 리처드는 테레즈가 캐롤에게 “반했다”는 표현을 쓰고 하지는 캐롤 곁의 테레즈를 보자마자 “대담하군”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2016년 현재에도 여전히 도발적으로 느껴지는 관점의 대전환을 캐롤의 결단을 통해 감행했다. <스텔라 달라스>(1937), <밀드레드 피어스>(1945) 같은 클래식 여성영화(woman’s film)에서도 여성들은 일의 성취와 성적 욕망을 위해 남편과의 연은 끊어내는 용단을 내렸다. 그러나 자식의 행복이 볼모로 잡히면 주저앉았다. 캐롤은 전부는 가질 수 없는 사회적 제약 속에서 다른 타협을 택한다. 딸의 양육권을 포기하고 방문권을 요구하는 선으로 물러서며 그녀는 반문한다. 엄마가 자신을 부정하며 사는 모습이 딸의 삶에 정말 도움이 되겠냐고. 그녀는, 순교자가 될 의향이 없으며 본성을 부인하는 삶이야말로 타락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이 장면에서 우아하고 단정한 매너를 무너뜨리되, 더 큰 긍지를 지키는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는 무너지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모습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멜로드라마는 전통적으로 여성의 장르이면서도, 남성이 현실의 주도권을 쥔 이성애 프레임 안에서 여성의 사회적, 성적 욕망이 부딪히는 좌절로부터 피학적 쾌감과 아름다움을 찾아왔다. 미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가 동성결혼을 법제화한 2015년산 여성-여성 멜로드라마 <캐롤>은 이 제약을 벗어난 장르의 새로운 경지를 예시한다. 나는 <캐롤>을 보고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인지하고 긍정하는 관객이 있을 거라고 감히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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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동의 애도
케빈 스미스 감독(<점원들> <체이싱 에이미>)이 지난 1월15일 본인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할리우드 이러쿵저러쿵>(Hollywood Babble-on) 공개방송에서 최근 타계한 앨런 릭먼을 회고하며 울먹였다. <다이하드>에서 릭먼이 연기한 악당 한스 그루버를 숭배하던 스미스는 1999년작 <도그마>에서 릭먼을 캐스팅한 행운에 한번 감격했고, 현장과 생활에서 릭먼이 보여준 배려에 영원한 존경을 품게 됐다며 장장 20여분간 추억담을 멈추지 못했다. <도그마>에서 육중한 날개를 메고 대천사 메타트론을 연기했던 릭먼은, 대배우의 고초를 보다 못한 감독이 다른 날 찍자고 말하자 “안 돼요 케빈. 우리 영화 저예산이잖아요”라고 일축했다고 한다(깊은 발성의 대명사였던 릭먼은 적절하게도 <도그마>에서 신의 대변인으로 분했다). 케빈 스미스의 집 자동응답기에는 아직도 17년 전 릭먼이 걸어온 전화가 녹음돼 있다고 한다. “한스 그루버가 우리집에 전화를 하다니!” 울컥이면서도 내내 앨런 릭먼을 성대모사한 스미스 감독은, 고인을 애도한 수많은 영화인들의 의견에 정확히 동의했다. “앨런은 내가 아는 어떤 배우보다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오직 세상에 관심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