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행_눈길을 걷다>(이하 <설행>)는 지난해 제16회 전주국제영화제의 ‘전주 프로젝트: 삼인삼색 2015’ 중 한편으로 만들어졌다. 알코올중독 치료차 외딴 수도원을 방문한 정우(김태훈)의 혼몽을 그리며, <열세살, 수아>(2007)와 <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2011, 이하 <청포도 사탕>)에 이은 김희정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다. 전주에서 소개된 이후 제50회 카를로비바리국제영화제, 제5회 사할린국제영화제, 제46회 인도국제영화제, 제39회 예테보리국제영화제 등 세계 각지를 돌다 마침내 3월3일 정식으로 국내 개봉한다. 서늘하고 정적인 영화의 무드와 다르게 김희정 감독은 수다스럽고 뜨거운 사람이었다. 관객과 만날 준비를 하며 숨을 고르고 있는 그를 만나 상징과 혼돈으로 가득 찬 영화의 찰나에 대해 물었다.
-많은 나라를 돌았다. 상영 뒤, 각국의 반응과 시선이 제각각이었을 것 같다.
=정말 그랬다. 인도에선 500석의 큰 극장에서 상영했는데 중간에 100명쯤 우르르 나가더라. 춤추고 노래하는 영화가 아니라서 나간 거 아니겠냐는 얘기도 있었다. (웃음) 인도여서인지 환생에 관해 묻는 관객도 많았다. 예테보리에선 잉마르 베리만의 영향을 물어왔다. 어떤 장면에서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 생각난다는 관객도 있었다. 제16회 샌디에이고아시안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노트엔 ‘마초적인 한국영화 풍토에서 나온 다른 영화’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게 참 좋았다. 신기하고 새로운 반응들이었다.
-<설행>은 어떤 것을 맹목적으로 쫓던 남자가 그것을 떨치고 일어나는 이야기다. 시나리오를 쓸 땐 어떤 생각들을 했나.
=나는 술을 참 좋아한다. 우리집 피가 그런 것 같다. (웃음) 핏줄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았고, 내가 술 마시는 걸 적당한 선에서 조절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인터뷰나 행사를 앞두고 술을 못 참는 정도는 아니지만! (웃음) 중독이라는 소재 자체가 창작자들을 자극하는 게 있잖나. 단편 <아버지의 초상>(1999)을 제외하곤 다 여성주인공을 그렸는데, 그래서 여성영화만 찍는 감독이라는 오해도 있는 것 같다. 거기에 대한 해명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작품에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상실과 그 뒤에 남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살피려는 정서가 있다. 수녀 마리아(박소담)는 “상처는 매번 나타나지만, 우리는 기도를 통해 기적이 나타난다는 것을 믿어야 해요”라는 말로 정우를 독려한다.
=아마도 내가 남은 사람이라서 그런 것 같다. 사랑하는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나는 살아야 했으니까. 상처를 갖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생각하는 건 그 사람이 예민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다. 뭐든 자연스럽게 넘길 줄 모르는 서툰 사람들 말이다.
-정우는 성당 일을 도와달라는 원장 수녀의 말에 덜덜 떨리는 손을 내밀며 자신의 무능력을 이야기하지만, 곧 의도치 않게 마리아를 도우며 자립의 가능성을 확인한다. “서툰 사람”이란 그런 사람을 말하는 건가.
=맞다. 마리아도 마찬가지다. 수녀이자 어떤 영험한 능력을 가진 사람인데 동시에 보통의 여자아이다. 한번도 서울 땅을 밟아본 적이 없어 무구하게 서울 얘기를 묻잖나. 그런 인간적인 터치가 좋다.
-버석버석하게 말라가는 정우의 혼몽을 배우 김태훈이 섬세하게 표현했다.
=사할린에서 상영했을 때는 정우에 관한 질문이 많았다. 러시아가 알코올중독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는 곳이라서다. 나중에 태훈씨에게 러시아 사람들까지 인정한 알코올중독 연기였다고 말해줬다. (웃음) 태훈씨와는 최대한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려고 했다. 배우가 내 언어에 익숙해지길 바랐기 때문이다. 저예산영화는 사람들끼리 소통이 안 되면 끝장이다. 술집에서 나는 술을 마시고 태훈씨는 사이다를 마시면서 서너 시간 동안 작품 얘기를 한 적도 있다. 정우가 수도원에 가기 전의 이야기를 프리퀄처럼 쓴 시나리오를 따로 보내주기도 했다. 내가 보여준 레퍼런스 중 태훈씨는 제임스 그레이의 <투 러버스>(2008)에 나오는 호아킨 피닉스를 가장 좋아했다.
-최근 드라마 <응답하라 1988>로 새삼 주목받은 배우 최무성과는 세 번째 함께하는 작업이다.
=VIP 시사회 때 내가 그렇게 박보검을 부르라고 했는데…. (웃음) 뭐랬는 줄 아나. “내가 누구랑 그렇게 쉽게 친해지는 사람이야?” 최무성씨는 낯을 많이 가리고 말수도 적은 사람이다. 어디 집착하는 게 없고 항상 자기 중심을 유지한다. 특유의 무심함이 너무 좋다. 본인이 연극 연출가라서인지 시나리오도 잘 보는 편이고, 연기도 힘빼고 남 얘기하듯 한다. 그게 정말 최고다.
-장편영화 세편에 모두 그림이 중요한 모티브로 쓰인다. <설행>에선 <쳉스토호바의 검은 성모>가 소개됐다.
=<열세살, 수아>에선 밀레의 <만종>이, <청포도 사탕>에선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해변의 수도승>이 사용됐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는 내가 영화 찍을 때 매번 그림을 사용한 걸 최근에서야 알았다. 즉흥적이고, 날마다 그때의 삶이 너무 중요한 인간이어서인 것 같다. 무슨 말을 할 때나 심지어 술 취해 주정을 부릴 때도 평소에 생각만 하던 걸 그때그때 얘기하는 편이다. 그림 보는 건 원래 좋아해서 영화제 돌면서도 꼭 한번씩은 그 지역 미술관을 방문하는데 그 영향도 있을 거다. <청포도 사탕>으로 제28회 바르샤바국제영화제에 갔을 때 겸사겸사 베를린에도 들렀다. 국립미술관에 갔는데 거기 <해변의 수도승> 진품이 있었다. 알고 간 게 아니라 우연한 만남이었다. ‘이걸 보러 내가 여기까지 온 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꼭 그렇게 설명되지 않는 순간이 있더라.
-촬영지인 나주의 노안성당은 시공간을 흐리게 해 영화의 혼곤한 무드를 고조시킨다.
=그 성당을 찾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저예산영화는 시간도 회차도 돈도 부족하니까 장소를 많이 옮기면 독이 되더라. 그래서 더욱 시대성을 없애려고도 했다. 내 영화엔 휴대폰도 잘 안 나온다. 미사 장면에선 실제 노안성당의 신부님께서 출연해주셨다. 성당의 방 하나를 개조해서 원장수녀 사무실과 정우 방을 만들었다. 마을 부녀회 분들이 밥도 해주셨다. 우리가 비용을 지불하긴 했지만 그 돈으로는 그만한 수준의 음식을 절대 먹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제작부에서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모른다. 장례식장 장면에 출연도 하셨다.
-그해 겨울엔 눈이 많이 오지 않았을 텐데 엔딩에 눈발 날리는 장면이 아름답게 찍혔다.
=기적적으로 촬영된 장면이다. 휴식 중에 우연히 잠깐 눈이 막 왔는데 그때 부랴부랴 나가서 찍었다. 피치 못하게 서울에 일이 생겼던 단 한번을 제외하고는 태훈씨가 계속 나주에 머물러 주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던 장면이었다. 평소 준비를 많이 해뒀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몰입도 가능했던 거다. 그날 말고는 눈이 너무 안 와서 고생했다. 덕유산 무주리조트 정상에서도 30분을 더 올라가야 하는 곳에서 눈밭 장면을 찍었다. 딱 하루, 그것도 네 시간 만에 찍어야 했는데 네 시간 만에 눈밭이 걸리는 모든 장면을 다 찍었다. <청포도 사탕>으로 장편 데뷔한 박정훈 촬영감독이 고졸에 영화학교도 안 나온 사람인데 정일성 촬영감독님 밑에서 십년을 공부했다. 그래서 정해진 틀이 없고 감각이 젊은 친구다. 실제로도 젊어서 종일 카메라를 들고 찍어도 견디는 대단한 체력을 지녔다. 자기가 하는 영화를 사랑해주는 것도 참 고맙고.
-영화를 찍는 동안 가장 많이 생각한 것은 뭔가.
=눈이 언제 올까. (웃음) 내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영화를 계속 찍어야 할까 정말 고민이 많았다. 감독조합 인터넷 카페에 <설행> 하면서 힘들다는 글을 올렸더니 어떤 분이 “힘든 만큼 좋은 결과 있길 바랍니다”라고 댓글을 다셨기에 “힘든 만큼 결과가 나온다면 우린 엄청난 결과가 나오겠다”고 답했던 게 생각난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