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통•번역가, 각색작가로 살아가던 스물세살의 김수빈 감독은 의도치 않은 임신으로 엄마가 된다. 급박하게 진행된 결혼과 출산과 육아와 시집살이 과정을 김수빈 감독은 집요하게 카메라에 담았다. 김수빈이라는 한 개인의 셀프다큐멘터리로 시작한 <소꿉놀이>는 혼전 임신한 딸을 시집보내야 하는 친정어머니, 좋은 사람이 되고 싶으나 갱년기 중년여성이 돼 피로해진 시어머니, 뮤지컬 배우의 꿈을 접고 요리 유학을 떠나게 된 남편의 이야기까지 담으며 새로운 ‘역할 놀이’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가족 구성원들까지 들여다본다. 요즘은 뮤지컬 <뉴시즈>의 각색작가로 일하고 있다는 김수빈 감독. “어린이집에서 애 데리고 곧장 왔다”며 영화에서 보다 훌쩍 자란 딸과 함께 인터뷰 장소에 나타났다.
-영화를 본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나.
=아빠는 영화 보기를 미루고 계시고, 엄마는 요상방통한 딸내미 때문에 가정사가 까발려졌다 하시고, 시어머니는 “네가 삶의 단편을 잘 캐치해냈구나” 하시면서 형님에게는 “내가 그렇게 잘 못했니?” 그러셨다고. (웃음)
-영화는 임신 테스트기의 빨간 두줄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임신과 출산, 육아와 시집살이 과정을 카메라에 담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언제였나.
=영화에 나온 것이 세 번째 임신 테스트기다. 첫 번째, 두 번째를 확인할 때는 경황이 없었다. 자아부정의 단계를 거친 뒤 세 번째를 확인하고서야 ‘이건 현실이구나’ 싶더라. 그 순간 사건을 겪는 1인칭 자아와 창작자로서의 3인칭 자아가 분열됐다. ‘이 사건은 뭐지? 이걸 찍으면 뭐가 될까?’ 그런 지극한 호기심에서 출발해 6년을 찍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호기심은 절박한 행위로 바뀌었다. 애 봐야 하고, 돈 벌어야 하고, 학교 다녀야 하고, 집안일 해야 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없다 보니 숨통을 잘라놓은 것처럼 답답했다. 이거(영화 촬영)라도 하지 않으면 나라는 인간이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영화를 찍는 건 곧 나를 지키기 위한, 치열한 행위였다.
-젊고 능력 있는 여성이 의도치 않은 임신을 하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셀프다큐멘터리인 줄 알았는데, 누군가의 며느리로 살아야 했던 갱년기 시어머니의 이야기 등이 보태지면서 한국의 보편적 여성 이야기로 영화가 확장된다.
=이건 나의 이야기인 동시에 한국에서 결혼하고 애 낳아 기르는 여성이라면 한번쯤 겪었을 법한 이야기다. ‘네이트 판’이나 아침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이고. 또 기록의 힘이기도 하고 시간의 힘이기도 한데, 어느 순간 가장으로서의 무게에 짓눌린 남편의 입장이 보이고 시어머니의 입장이 이해되는 인식의 확장 단계를 거치게 됐다.
-무시무시한 부부싸움 장면도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나와 남편은 어느 순간 자신의 캐릭터를 객관화하게 됐다. ‘여기선 내가 나쁜 사람으로 비쳐지네’가 아니라 그 싸움하는 장면의 의미를 파악하게 된 거다. 남편이 적극적으로 촬영을 도와줬기에 가능한 측면도 크다. 이제 진짜 못하겠다 싶어 카메라를 끄려 할 때 다시 켤 수 있게 해준 것도 남편이고, 내가 집요하게 찍으려고 할 때 (카메라를) 던져버리려 한 것도 남편이다. (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울고 불고 싸우고, 시부모님한테 혼나는 상황에서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찍었는지 모르겠다. ‘이 상황을 어쩌지’ 하면서도 ‘녹화가 잘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정신분열의 상태였달까. (웃음) 사람들이 눈물셀카를 찍는 심리와도 비슷한 것 같다. 지금 너무 슬프지만 배도 고프고 웃음도 나고 사진도 찍고 싶고. 사람이란 게 결국 모순된 존재니까.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딸 (하)노아와 둘이 있는 시간이 많은데, 같이 있다보면 경이로운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아이가 더 탁해지기 전에 딸과 나의 관계를 치열하게 찍어보면 재밌는 게 나오지 않을까. 요리 유학간 신랑이랑 형님이 돌아오면 그들의 요리사 창업 도전기를 찍어봐도 재밌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