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안시환의 영화비평]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여주려는 것
2016-03-04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라슬로 네메시 감독이 죄의식의 윤리를 재현하기 위해 시도한 방식은 무엇인가
<사울의 아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했던 아도르노의 선언. 우리는 지옥 같던 그곳을 상징화할 언어(또는 재현 형식)를 ‘아직’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것이 아우슈비츠 영화 대부분이 실패를 반복하는 이유다. 아우슈비츠는 예술적 행위가 끝내 다다를 수 없는 영원한 ‘공백’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공백은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악행이 낳은 결과다. <사울의 아들>로 그 공백이 메워졌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다. 한편의 영화로 채워질 공백이 아니니까. 그럼에도 <사울의 아들>은 어금니 꽉 깨물고 그 공백 위를 뚜벅뚜벅 걸으며, 낡디낡은 명제 하나를 되살려낸다. 우리가 인간의 고통을 인식하고 있는 한,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으로서 예술’은 언제나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헤겔). 감독 라슬로 네메시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아우슈비츠 희생자의 고통을 스펙터클로 소비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그 고통의 표현 형식을 고안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죽은 아들의 장례를 치르려는 욕망. 그것이 사울의 모든 것이다. 우리는 이미 동일한 욕망으로 똘똘 뭉친 인간을 알고 있다. 무덤마저 금지된 오빠 폴로니케스의 시신을 매장하려는 의지 그 자체였던 안티고네. 안티고네는 신의 섭리와 인간이 정립한 규칙의 대립 속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신의 섭리를 지키려 했다. 그것이 안티고네가 선택한 윤리적 삶이다. 사울은 아우슈비츠의 안티고네다. 무시무시한 ‘세계의 밤’ 같던 그곳, 정상적인 윤리적 규칙들이 정지된 그곳에서 사울은 아들의 장례를 치르려 한다. 사울의 이러한 고집이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거니와 동료들의 목숨을, 더 나아가 단 한번의 봉기를 준비하는 필사의 목표까지 전부 위험에 빠뜨린다. 그럼에도 사울은 고집을 꺾지 않는다. 사울에게 아들의 장례는 그 무엇과도 교환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다. 나머지 전체를 단념하더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단 하나의 가치.

하지만 죽은 소년이 아들이라는 사울의 주장과 달리 모든 정황은 그것을 신뢰할 수 없도록 한다. 그의 비타협적 고집이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소년이 사울의 진짜 아들인지 여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라슬로 네메시의 관심은 사울이 누군가를 아들이라는 ‘무한한 책임’의 대상으로 삼는 행위 자체에 있다. 사울은 어느 날 갑자기 죽음보다도 못한 삶 속에 던져졌다. 그 삶을 버텨내기 위해 그는 주변 세계로부터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사울은 ‘모든 일에 무관심한 살아 있는 시체’가 되었다.

그런데 라슬로 네메시는 사울과 그를 둘러싼 세계의 관계를 일반적인 서사가 아닌 시청각적 형식을 통해 보여준다. 사울을 철저하게 화면의 중심에 놓고 전개되는 <사울의 아들>은 영화의 첫 장면부터 주변 배경을 초점이 맞지 않는 흐릿한 영상으로 제시한다. 4:3의 좁은 화각을 사울의 얼굴이나 뒷모습이 채우고 나면 관객에게 전달되는 정보는 더욱 제한된다. 사울과 그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대상만이 선명할 뿐 그의 시선이 닿지 않는 배경은 모두 흐릿하다. 결국 시종일관 흐릿하게 제시되는 배경은 그의 시선이 그저 스쳐 지나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는 세상을 보지도, 듣지도 않는다. 심지어 가스실에서 들려오던 고통의 절규와 비명과 몸부림도 그의 얼굴에 리액션을 새기지 못한다. 세상과의 절연, 그것이 사울이 아우슈비츠라는 지옥을 버티는 방법이다. 육체적 생존과 정신적 죽음 사이의 인간, 그것이 바로 존더코만도(시체 처리반)로서 사울의 삶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 입구에는 철 조각으로 만들어진 녹슨 문구가 여전히 걸려 있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문구. 실제로 사울이 아들을 발견하기 전까지 우리가 목격하는 사울은 노동하는 모습이 전부다. 그 노동의 대가가 ‘죄의식으로부터의 자유’다. 죽음의 가스실에 인간을 밀어넣고,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를 소각하고, 그 재를 강에다 버리는 매일의 삶이 배설하는 죄의식을 감당하며 벼텨낼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 존더코만도에게 ‘토막’은 시체에 대한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그들에게 시체는 정말 토막이어야 한다. ‘모든 일에 무관심한 살아 있는 시체’는 그렇게 완성된다.

가스실에서 살아남은 한 소년의 숨소리. 사울은 천천히 다가가 소년을 바라본다. <사울의 아들>에서 등장하는 첫 시점숏과 함께 흐릿함의 안개가 걷힌다.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도 붙들지 못했던 사울의 시선을 발가벗은 한 소년이 낚아챈 것이다. 소년의 장례를 치르겠다는 결단과 함께, 사울은 말하고 듣고 보는 인간이 된다. 더이상 노동이 그를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죄의식으로부터의 자유도, ‘모든 일에 무관심한 살아 있는 시체’의 삶도 끝맺어야 한다. 그렇게 그는 살아 있는 인간의 삶을 회복하려 한다. 사울은 그렇게 안티고네가 된다. 죽은 자를 위한 장례.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우리는 과연 아우슈비츠 희생자들에게 올바른 장례를 치러왔는가, 그리고 아우슈비츠 영화는 그 희생자를 올바른 재현 방식으로 애도해왔는가, 라는 질문. (이후에 언급하겠지만) 라슬로 네메시가 아우슈비츠 희생자를 스펙터클로 미학화하거나 소비하지 않으려고 그토록 안간힘을 쓰는 것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의 결과다.

<사울의 아들>에서 감지되는 종교적 층위를 고려할 때 사울이라는 이름은 다분히 의도적인 설정처럼 보인다.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사울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바울이 된다. 알랭 바디우는 예수의 행적 중 사울-바울이 믿었던 것은 단 하나, 바로 예수의 부활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이미 죽은 예수를 만난 뒤 사울이 바울이 되듯, 모두가 죽은 가스실에서 살아남은 소년과 마주한 후 사울은 인간의 삶으로, 죄의식의 삶으로 회귀한다. 엔딩에서 드러나듯 <사울의 아들>에는 부활의 메타포가 깔려 있다. 대속을 위해 이 땅에 온 예수처럼, 아들-소년의 부활이야말로 바로 존더코만도-사울의 속죄를 완성한다. 그것은 죄의식을 벗어던지는 속죄가 아니라 죄의식을 떠안는 행위를 통해 완성되는 속죄다. 결국 소년은 사울의 아들이자 모든 존더코만도의 아들이고, 그의 부활은 사울의 속죄이자 모든 존더코만도의 속죄의 행위다.

사울은 아들의 시신을 발견한 직후부터 유대식 장례를 위해 랍비를 찾는다. 거절, 그리고 또 이어지는 거절. 하지만 그는 랍비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라슬로 네메시는 사울이 랍비를 찾는 일련의 상황 뒤로 아우슈비츠의 잔혹성, 그러니까 가스실에서 죽은 시체들의 소각과 처리 과정을 포개놓는다. 그러니까 죽은 자에 대해 예의를 갖추려는 자의 의지가 왜 숭고할 수밖에 없는지, 그 배경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토막들의 처리 과정이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가장 처참한 상황은 한꺼번에 너무 많이 몰려든 유대인을 소각로가 감당하지 못하자 구덩이에 빠뜨려 죽이는 장면일 것이다. 이 장면은 왜 아우슈비츠가 지옥이었는지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라슬로 네메시는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숏을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는다. 사울이 그 지옥의 일부이듯, 카메라도 그 안에서 언제나 파편화된 상황만을 기록할 뿐이다. 그것이 아우슈비츠의 리얼리티를 영화에 새기기 위해 라슬로 네메시가 선택한 재현의 윤리다.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흐릿한 이미지와 마주했을 때, 관객은 시선을 돌릴지언정 완전한 이미지가 시야에 펼쳐지기를 원한다. 오랫동안 카메라와 관객은 이러한 포르노그래피적인 욕망의 공모자였다. 아우슈비츠 영화 역시 예외일 수 없었고, 그것이 <쇼아>의 클로드 란즈만이 아우슈비츠의 실상을 (허구적으로) 재현하는 작업을 격렬히 반대했던 이유다. 배우와 카메라가 만나 아우슈비츠를 재현할 때, 제아무리 처참한 광경이라 해도 아우슈비츠를 하나의 스펙터클로 격하시킬 위험이 내재한다. 아우슈비츠의 재현이 카메라(와 관객)의 윤리 문제를 제기하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이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긴 하지만) 스티븐 스필버그가 <쉰들러 리스트>에서 범했던 오류다. 미치광이 나치 장교가 유대인 여인을 강간하는 장면과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결혼식, 그리고 쉰들러의 생일잔치가 교차편집으로 연결된 장면을 보라. 이 장면은 비극적이지만, 그것을 교차시키는 스필버그의 섬세한 손길은 너무나 아름답다. 수용소의 비극은 그렇게 스펙터클이 된다. 그것은 에릭 샌트너가 말하는 일종의 서사 물신(narrative fetishism)으로 작용하면서 역사적 트라우마의 자취를 그 대체물로 지워버리고, 환상 속에서 역사의 애도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든다. 제아무리 아우슈비츠라 해도, 스펙터클은 모든 것을 삼킨다.

라슬로 네메시는 카메라의 포르노그래피적인 욕망의 위험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카메라가 갖는 재현의 힘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우슈비츠가 재현되지 않기를 가장 바란 것은 아마도 나치였을 것이다. 실제로 나치는 모든 증거를 말살하려 했다. 소련군이 조금만 늦게 도착했다면, 아우슈비츠는 역사상 가장 잔혹한 루머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아우슈비츠를 재현하기를 포기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만 본다면) 나치의 바람을 실현시켜주는 아이러니를 낳는다.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재현의 가능 여부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고통을 표현할 수 있는 형식에 얼마나 충실한가, 라는 질문이다. <사울의 아들>을 두고 리얼리즘을 이야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사울의 아들>이 리얼리티를 담고 있다면, 그것은 고증에 입각한 사실적 세트나 의상, 사건의 묘사 등에 있지 않다. 이러한 요소들은 아우슈비츠를 다루는 대부분의 영화가 리얼리즘으로 치장할 때 사용하는 액세서리이거나 재현의 윤리 문제를 비켜나기 위한 자기변명인 경우가 허다하다.

라슬로 네메시는 스필버그와 클로드 란즈만 사이 어딘가에서 제3의 길을 모색한다. 그것은 단순한 양비론이 아니라, 그가 이 둘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하는 방식으로 아우슈비츠의 리얼리티를 담아내려 한다는 의미다. 대표적인 장면이 가스실을 묘사하는 장면이다. 라슬로 네메시는 가스실에서 그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보여주지 않은 채 비명과 절규, 그리고 처절한 몸부림의 증폭된 사운드를 활용한다. 왜냐하면 가스실을 경유한 자는 모두 죽었고, 그 안에서의 처참한 광경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존더코만도는 그 바깥에서 들었던 소리만 증언할 수 있다. 가스실 내부의 상황은 시각적 재현 너머의 영역이다. 라슬로 네메시는 증언의 영역으로 재현의 범위를 철저하게 한정한다.

<사울의 아들>은 재현의 힘과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의 위험성 사이에서 아우슈비츠의 고통을 표현할 수 있는 형식을 발견한 영화다. 그리고 그것이 <사울의 아들>이 구현하는 리얼리티다. 재현과 비재현의 통합. 흐릿한 이미지 역시 마찬가지다. 아우슈비츠(와 그와 관한 논쟁)는 언제나 재현과 비재현의 경계 위에 위치해왔다. 그것이 아우슈비츠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적 지배를 꿈꾸는 역사학자들을 늘 곤경에 빠뜨린 이유였다. 보여주면서도 관객의 포르노그래피적인 욕망을 끊임없이 배신하기, 그럼으로써 스펙터클이 아우슈비츠를 대체하지 못하도록 망막에서 미끄러지는 이미지 만들기. <사울의 아들>의 흐릿한 이미지는 아우슈비츠가 불러일으킨 ‘재현의 딜레마’ 그 자체의 구현이고, 아우슈비츠의 리얼리티이며, 라슬로 네메시의 재현의 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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