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날 속인 게 아니라, 내가 삶을 어떻게 해보려다 실패한 거야.” 드라마 <세 번 결혼하는 여자>에서, 이지아는 자신의 실패를 쿨하게 인정하고 새로운 단계로 발을 내딛는 여자 은수를 연기했다. 지나간 과거는 묻어두고 자기 자신과의 결혼을 선택했다며 왼손 약지에 세 번째 결혼반지를 끼우는 그녀의 모습은 많은 시청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돌이켜보면 이지아는 언제나 유리구두를 신겨줄 누군가를 기다리기보다 직접 백마를 타고 기회를 잡기 위해 나서는 진취적인 여성상을 연기해왔다. 그 과정에서 동료 대신 폭탄 조끼를 입는 일이 생기더라도(<아테나: 전쟁의 여신>), 완벽주의 편집장에게 한바탕 쏘아붙임을 당하는 일(<스타일>)이 벌어지더라도 말이다. 그녀의 첫 스크린 데뷔작 <무수단>도 마찬가지다.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한 의문의 사건을 수사하는 특수부대원들 사이에서 이지아는 홍일점이자 유능한 생화학 전문가인 신유화 장교를 연기한다. 다음은 “여자라는 성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강인하고 절도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이지아가 보내야 했던 치열한 여름 한철의 기록이다. 다시 한번, 신데렐라는 그곳에 없었다.
-데뷔한 지 꽤 됐는데, 영화 출연은 처음이다.
=예전부터 영화에 출연하고 싶었는데 인연이 없었다. 준비하다가 잘 안 된 작품도 있고, 나는 하고 싶은데 소속사에서 드라마를 하자고 해서 그쪽으로 간 적도 있고. 작품을 하려면 운명 같은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연이란 건 따로 있는 것 같다. 영화랑 이렇게 오랫동안 인연이 없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처음 경험해본 영화 현장은 어땠나. 드라마와 많이들 다르다고 하잖나.
=하하. 그런데 우리 영화가 30회차였다. 중간에 우기도 2주 겹쳐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장이었기에…. 나도 영화 현장에 대한 ‘로망’이 있다. 한신 한신 공들여 찍는다고들 하더라. 물론 이번 영화도 열심히 찍었지만 시간상 여유롭지는 못했다. 그런 것들이 아직도 채워지지 않은 로망으로 남아 있다.
-<무수단>의 구모 감독과는 다른 인연으로 예전부터 아는 사이였다고 들었다.
=예전에 작품을 계기로 뵌 적이 있었다. 감독님이 쓴 <비둘기 식당>이라는 시나리오였는데, 실험적이고 독특한 작품이었다. 그 작품을 재미있게 봐서 감독님을 한번 뵙고 싶은 마음에 연락을 드리게 됐다. 당시에 서로 스케줄이 맞지 않아 결국 그 영화를 못하게 됐지만, 우연히 이번 영화를 함께하게 된 거다. <비둘기 식당>과 <무수단>은 작품 성향이 너무 달라서 구모 감독님이 이 영화를 연출한다는 게 놀라웠다. <비둘기 식당>은 마치 영화제에 출품될 것만 같은, 아트영화 느낌이 강한 작품이었거든.
-신유화는 <무수단>의 유일한 여성 캐릭터다. 이제까지 밀리터리 장르의 영화는 많았지만 여군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작품은 드물었다. 이 영화를 위해 어떤 준비를 했나.
=여군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록영상들을 많이 찾아봤다. 훈련 받을 때의 비장한 눈빛이나 힘 있는 동작들은 남녀가 없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는 직업군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한 여자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는 그들을 보면서 <무수단>에서도 그런 모습을 녹여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화 초반부에 군복을 입은 유화가 빨간 립스틱을 바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 장면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원래부터 시나리오에 있던 장면이었다. 감독님께서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모습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여군을 생각하면 갖는 편견이 있잖나. 꾸미지 않을 것 같고, 보이시할 것 같고. 유화가 군인이지만 동시에 여자의 모습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굳이 머리를 자를 필요도 없다고 하셨다. 장교들은 머리를 안 잘라도 된다더라. 항상 묶어야 하긴 하지만.
-<무수단>은 등장인물들을 간략하게 소개한 다음, 빠른 속도로 본론에 들어가는 영화다. 때문에 등장인물의 전사(前事)가 생략되어 있는데, 당신이 생각하고 연기한 유화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무엇이었나.
=그렇지 않아도 유화의 비하인드 스토리에 대해 감독님께 여쭤봤었다. 독일에서 유학하고, 굉장히 우수한 성적으로 생화학과를 졸업한 엘리트라고 하시더라. 나라에서 중요한 사건이라고 여기는 프로젝트에 유화를 차출해서 투입할 정도로 에이스급의 군인이다. 그래서 <무수단>을 찍으며 가장 염두에 두었던 건 정말로 엘리트처럼 보여야 한다는 거였다. 작전에 투입됐을 때도 여자라는 성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강인하고 절도 있는 모습을 보여주려 애썼다. 남자들 사이에서 혼자 여자인 데다 체구도 작아서 조금만 허술한 모습을 보여도 금방 눈에 띄더라. 시사 끝나고 어떤 분이 남자 군인들 사이에서 잘 어우러졌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내게는 정말 큰 찬사였다. 유화를 연기하며 중점적으로 노력했던 부분이라서.
-반면 <무수단> 현장에서 유일한 여배우이기 때문에 유화 캐릭터에 대해 당신만이 할 수 있었던 어떤 조언도 있었을 것 같다.
=<인터스텔라>의 머피(제시카 채스테인)가 그랬듯, 여자의 직감이 남자들보다 뛰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여자라면 군인이라 할지라도 무조건 명령에 복종하기보다 직감으로 사건을 유추해나가고 추리하는 부분이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화의 직감적인 면모를 살리고 싶다고 감독님에게도 계속 말씀드렸었다.
-군대 용어가 끊임없이 등장하더라. 금방 적응되던가.
=군대 용어가 정말 입에 안 붙었지만, 연습을 많이 했다. 급박한 현장에서 발음이 너무 어렵더라. “추계 ATT 사격 측정 탑이라고 들었는데. 맞나?” 이런 대사를 빠르게 말해야 했으니까.
-거의 군복 한벌을 입고 촬영을 진행했다고 들었다.
=한벌로 촬영하는 건 괜찮았다. 꾸미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아서 너무 좋더라. 문제는 옷을 빨지 못하는 거였다. 연결이 튈까봐 흙이나 피를 그대로 군복에 묻히고 있어야 했으니까. 촬영 막바지에는 거의 40시간 가까이 그 옷을 입고 있었다. 찝찝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거의 여자이길 포기했다고 할까. (웃음) 군복이 더러운 게 문제가 아니라 제발 세수라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하는 마음이었다. (웃음)
-현장에서 실신했다는 게 그때였나.
=그때는 아니고, 그 이전이다. 폭염주의보가 내린 날 야외에서 촬영했는데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촬영하다가 땀을 너무 많이 흘렸나보더라. 내가 곰처럼 무디고 좀 미련한 구석이 있어서, ‘저 힘드니까 잠깐 쉴게요’ 이 말을 못하고 계속 참았다. 결국 그래서 더 큰 피해를 드렸지만. 속상하더라. 내 마음과 의지와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체력의 한계가 있더라. 그 한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데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 자존심이 상하고 속상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힘든 일이 있으면 말을 잘 안 하는 편인가.
=진짜 말을 잘 못하는 편이다. 예전에 <아테나: 전쟁의 여신>을 찍을 때에도 촬영 중에 발가락이 아팠는데 일주일 동안 아무 말도 못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뼈가 부러졌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미련한 거다. 아프면 얘기를 해야 하는데, 나 때문에 촬영이 지장이 생기는 게 죄송스러워서…. <무수단> 찍을 때 상황이 웃겼던 게 내가 실신했던 장면이 공교롭게도 유화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가는 이 중사에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장면이었다. 정작 내가 안 괜찮은데, 다른 사람에게 괜찮냐고 묻는 장면에서 쓰러지다니. (웃음)
-무수단과 싸우는 장면의 액션 신이 격렬하던데, 직접 소화한 장면인가.
=맞다. 물론 대역배우 분이 계셨지만, 그 부분은 거의 다 내가 직접 소화했다. 액션 장면에 대한 욕심이 많다. 힘들긴 한데, 대역을 쓸 수 있는 상황에서도 내가 직접 연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 방독면을 쓰고 하는 액션 장면도 직접 한 건데 얼굴이 안 보여서 아쉬웠다. (웃음)
-<무수단> 외에도 드라마 <태왕사신기> <아테나: 전쟁의 여신> 등 액션 신의 비중이 큰 작품에 출연해왔는데, 액션 신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상당한 것 같다.
=(주먹을 꼭 쥐고) 예에~! 완전 관심 많다. 어릴 때부터 액션영화를 너무너무 좋아했다. 화려한 액션 장면을 보면 멈췄다가 다시 돌려보기도 한다. 보면서 ‘대단하다’, ‘저거 진짜 힘들었을 텐데’ 하며 감동받는 스타일이다. 특히 1 대 다수로 싸우는 장면을 좋아한다. 말도 안 되지만 정말 멋있는 것 같다. (웃음)
-좋아하는 액션영화 취향이 궁금하다.
=최근에 재밌게 본 영화는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시간이 없어서 못 봤는데 가장 기대하고 있는 작품은 <데드풀>이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나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처럼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속시원한 액션을 선보이는 영화들도 좋아한다. 하여간 액션영화나 첩보영화가 개봉하면 거의 다 찾아보는 편이다.
-액션영화 외에 좋아하는 영화들이 있다면.
=뭐가 있을까…. 지금 생각나는 작품으로는 <그녀>와 <이터널 선샤인> <블랙스완> 정도가 떠오른다.
-소재가 독특하고 인상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이다.
=생각해보니 그렇네. 관점이 독특하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주는 영화에 끌린다. 그리고 인간 심리의 어두운 부분을 유려하게 묘사하는 감독들의 작품도 좋아하는 것 같다. 데이비드 핀처의 <세븐>과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 같은 영화도 좋아한다.
-당신은 미국을 기반으로 활동이 가능한 흔치 않은 여배우라는 생각이 드는데. 해외 진출에 대한 생각은 없나.
=생각이야 늘 있는데, 어쨌든 기회라는 것도 주어져야 하는 거잖나.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기사부터 나오는 게 좀 부담스러워서, 할리우드 진출에 대한 부분은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성격상 뭔가를 미리 얘기하고 그런 걸 안 좋아한다.
-미국 드라마 <컨셔스 퍼셉션>의 시나리오도 썼는데.
=아직까지는 배우가 글을 쓰거나 다른 작업을 하고 있다고 회자되는 게 부담스러워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얘기를 할 수가 없다.
-배우가 시나리오를 쓰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한국에도, 해외에도.
=좋게 생각해주시는 분도 있는데, 책(대본)을 주실 때 ‘너 글 쓴다며’ 하는 분들도 있어서, 아직까지는 배우로서 조심스럽다.
-이지아라는 배우를 떠올리면 도회적이고 활력 넘치는 여성상이 떠오른다. 작품마다 다소 맥락은 다르지만, 그동안 신데렐라와는 거리가 먼, 스스로 성장해나가는 인물들을 연기해왔다. 당신의 실제 모습과도 비슷한가.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다. 실제로도 의존적인 캐릭터가 아닌 건 분명하다. 예를 들면 우리 집엔 드라이버, 드릴부터 시작해 각종 장비가 다 있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걸 잘 못해서 집안일도 직접 다 하는 편이다. 이번 <무수단> 시사회 때에도 지인들에게 좀 와달라고 해야 하는데, 결국 부탁을 못했다. 무엇이든 혼자 해결하는 성격이 마냥 좋은 건 아닌 것 같다. 누군가에게 의존도 좀 하고 그래야 하는데. (웃음) 작품 선택에 있어서도 가능성을 열어두려 한다. 지금까지 독립적인 캐릭터를 많이 연기해왔는데, 때로는 여성스럽고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캐릭터도 연기해보고 싶다.
-지금까지 다작의 배우는 아니었다. 작품을 선택할 때 고민이 깊은 편인가? 아니면 마음에 드는 역할이 오기까지 오래 기다리는 편인가.
=고심을 심하게 하는 편은 아니다. 시나리오를 읽으면 빨리 답하는 편이거든.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오래 기다리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인연’이 중요한데 지금까지는 그 인연을 기다리는 시간이 다소 길었던 것 같다. 앞으로의 바람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더 자주 보여드리고 싶다는 거다. 그럴 기회가 자주 찾아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