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통해 배운다고 하지만 실패는 아무리 반복해도 이력이 나지 않는다. 실패할수록 실패할까 두렵다. 그보다는 사소한 성공의 경험이 훨씬 중요하다. 그게 다시 무언가를 시도해볼 수 있게 하니까.” 드라마 <미생>(2014), <시그널>(2016)을 연출한 김원석 PD가 언젠가 했던 이 말을 다시 떠올려본다. 이 말은 그가 만들어온 드라마의 세계, 그 안의 인물들에 대한 정확한 은유로 들렸다. 김원석 PD는 허무맹랑한 성공 신화에는 관심이 없다. 실패를 애써 두둔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가 그리는 인물들은 유난스럽지 않은 소박한 성취의 경험을 통해 다음 한발을 내디딜 용기를 얻는다. 김원석 PD의 작품에 보내는 시청자들의 응답은 바로 이 지점일지도 모르겠다. 과거와 현재가 무전기를 통해 교신하며 장기 미제 사건을 해결해가는 <시그널> 역시도 이러한 연출자의 세계 안에서 움직이고 나아간다. 함께 호흡을 맞춘 김은희 작가는 김원석 PD가 “인물들의 감정을 만들어가는 디테일에 강하다”고 했다. 이는 소품과 로케이션의 치밀한 준비만을 뜻하지 않는다. 인터뷰 내내 그것은 김원석 PD가 인물을 그리는 방식, 사람을 바라보는 애정어린 시선에 대한 말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시그널> 종영 이후, 직접 인터뷰를 한 경우가 거의 없더라. 인터뷰가 성사될까 내심 걱정했는데 흔쾌히 응해줬다.
=영화와 달리 드라마 감독은 작가님이 쓴 1차 창작물을 일차적으로 해석한다. 그런 내 해석이 시청자에게 어떨 땐 너무 과도한 의미가 돼 전달될 때가 있다. 반대로 협소한 의미로 받아들여질 때도 있고. 내가 말을 덧붙이는 것보다는 드라마 자체로 받아들여주는 게 낫지 싶었다. 그럼에도 인터뷰를 하게 된 데는 한국 드라마 현실에 대한 어떤 생각 때문이다. 한국 드라마는 지속적으로 퇴보하고 있다. 한국에는 드라마 시장은 없고 광고, PPL 시장만 있다. 콘텐츠를 만드는 자본은 모두 외국에서 들어온다. 산업의 독과점 등 한국 영화계에도 여러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한국영화는 한국 관객을 대상으로 장사를 한다. 반면 드라마는 해외에서 잘 팔릴 걸 염두에 두고 배우를 캐스팅한다. 완성도에는 관심이 없다. 이런 상황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뭔가 잘 만들어보고 싶은데 그게 안 되니까. 그러던 차에 <몬스타>(2013), <미생>, <시그널>을 하면서 영화 작업의 경험이 있는 촬영감독, 음악감독과 드라마쪽 스탭들이 조화를 이뤄가는 걸 경험했다. 영화를 전혀 모르는 나로서는 나름 도전이었는데 성과가 있었다. 김은희 작가님도 드라마와 영화 모두를 경험한 분이고. <씨네21>에서 그분들에 대한 고마움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같이 작업해보자는 영화계의 연락을 이미 받고 있을 것 같다.
=안 그래도 연락이 온다. 영화사, 투자•배급사와 미팅도 해봤다. 하나같이 내가 공을 들여 만들려고 한 부분을 좋게 봐주시더라. 드라마 감독인 내가 영화에서 가장 많이 배우고 싶은 게 있다. 배우의 리얼한 연기 연출이다. 드라마에는 이른바 ‘연속극적’ 연기라는 게 있다. 거기에서 벗어나 어떻게 하면 실생활 속 실제의 모습을, 미세한 감정의 결까지도 전달하는 연기를 찍을 수 있을까가 내 고민이다. 드라마는 프리 프로덕션 기간이 짧아서 스탭들이 임기응변식으로 현장에 대응해야 할 때가 많다. 그때 그림이 잘 나와야 하는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이 장면에서 캐릭터의 어떤 감정이 시청자들에게 전달돼야 하느냐만 생각하고 현장에 간다. <시그널>의 최상묵 촬영감독(<늑대소년>(2012), <표적>(2013) 등의 촬영감독)과는 연기자의 감정 그 이상의 그림은 없다는 데 동의하며 작업했다.
-<시그널>에 과거와 현재의 대화로 공조수사를 펼치게 하는 무전기를 등장시킬 때, 그 득과 실을 따져봤을 것이다.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 애초의 대본에는 무전으로 할 수 있는 게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시그널>의 시작은 장기 미제 사건이라는 걸 생각했다. 작가님도 무전 신이 너무 없는 것 아니냐며 걱정하셨고, 회사에서도 이 불가사의한 무전이 어떻게 오게 됐나에 대해 좀더 설명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했다. 무전에 따르는 여러 제약들, 무전의 규칙, 누가 무전을 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어떻게 달라질까 등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는 걸 넣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고민도 있었다. 그때 내가 “이 정도가 딱 좋다”고 말했다. 무전이라는 장치를 과도하게 극으로 들여오면 시청자들은 낯설게 여긴다. 그냥 이재한(조진웅)의 한이 서려서 무전이 시작됐다고 설득하면 된다, 그러니 좀더 뻔뻔하게 가자고 했다. 어느 순간 시청자들이 여기서 무전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눈치챈 것 같다. 타임 패러독스를 기대한 분들은 실망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더 잘할 수 있는 것, 사건 상황과 추리 과정의 디테일에 힘을 쏟자고 했다. 일선 경찰이나 프로파일러들에게 자문을 구했을 때 ‘과장은 있으나 가능한 선’이라는 데까지 밀고 갔다. ‘이건 엉터리’라고 하면 절대 찍지 않았다.
-‘김원석 감독은 디테일에 강하다’는 평은 주연뿐 아니라 조•단역 배우들의 감정 연기나 동작까지도 세세하게 그려가는 데서 나오는 것 같다.
=감정, 그게 내가 드라마를 보는 이유다. 나는 휴먼다큐멘터리뿐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인 <해피선데이-1박2일>을 보면서도 운다. 그런데 점점 드라마를 보며 운 적이 없더라. 눈시울이 붉어지는 순간을 드라마가 만들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물론 영화도 마찬가지다. <인생은 아름다워>(1997)와 같은 영화를 좋아한다. 내공이 쌓이면 페이소스가 느껴지는 슬랩스틱 코미디를 해보고 싶다.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이 성취한 ‘웃픈’ 감정이야말로 감정의 최고봉이 아닐까. 오히려 판타지가 지나치게 강한 SF물을 잘 못 보겠더라. <블레이드 러너>(1982),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 <그래비티>(2013), <마션>(2015)과 같은 경우는 가슴을 울리는 뭔가가 있더라.
-연기 연출의 지론은 뭔가.
=연기를 체계적으로 공부하진 않았지만 상업 매체에서 연기는 메소드형은 아닌 것 같다. 배우가 캐릭터를 자기쪽으로 끌어와 자기와 섞인 묘한 그 무엇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래서 캐스팅할 때부터 그런 게 가능한 배우를 찾는다. 또 촬영현장에서 연기 선생님 역할을 해줄 배우가 굉장히 중요하다. 연기에 대한 갈망이 있거나, 연기에 대해서 오랫동안 고민해온 배우가 같이 할 때 후배 연기자들도 도움을 받는다. <미생> 때 이성민 선배가 그랬다. 김 대리 역의 김대명 배우는 연기하며 여러 번 실패의 경험을 해봤고, 연기 경험이 많지 않던 임시완은 꼭 장그래 같았다. 연기자들끼리도 드라마 속 영업 3팀과 같은 상황이었던 거다. 그렇게 배우들이 캐릭터와 함께 성장해갔던 것 같다.
-꼼꼼한 연출로 나름 ‘악명’이 높다. 스탭들도 상당히 긴장하고 있을 것 같은데.
=디테일한 연출은 결국 스탭들을 통해 구현될 수밖에 없다. 소품이 어느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식이 아니라 연기자의 디테일한 감정이 나오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 내가 그런 걸 좀 과하게 요구하다보니 스탭들이 먼저 눈치채고 준비해준다. KBS <대왕세종>(2008) B팀 연출을 할 때였다. 보조출연자들이 환호성을 쳐야 하는데 하나같이 두손을 들고 뛰고 있더라. 그게 너무 싫었다. 내가 막 뛰어가서 (실제 행동을 해보이며) “한분은 박수를 막 치시고요, 다른 분은 가슴을 막 두드리세요, 또 주먹을 내지르시고요!” 설명을 30분 넘게 했다. 그러다보니 조연 연기자가 누굴 찍으러 온 거냐고 화를 낼 정도였다. (웃음) 그때 성균관 유생 최만리 역으로 출연한 이성민 선배도 처음 만났다. 아마 나를 현장에서 왁왁거리고 아등바등하는 연출자라고 생각하셨을 거다. 나중에 <미생>으로 다시 만났을 땐, “당신이 왜 그랬는지 알겠다”며 ‘리얼 라이프’를 담으려는 내 시도를 정말 좋아해주셨다.
-Mnet, KBS, 다시 CJ E&M으로 일터를 옮기면서 좋은 선배들을 많이 만났다고 했다. 후배들에게는 어떤 선배인가.
=<미생>의 오상식은 순간순간 감동을 주는 리더다. 내가 인복이 많아 오상식 과장 같은 선배님들을 많이 만났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 예전에 PD 교육원에서 영화 제작자인 차승재 대표의 강의를 들었다. “주변 사람이 본인 인간성을 좋다고 평가하느냐 아니면 사람들이 힘들어하나. 전자면 프로듀서, 독고다이면 디렉터”라고 하시더라. 주변에서 다 나를 힘들어한다. (웃음) 원하는 바를 직설적으로 확실하게 말한다.
-<시그널> 제작 보고회 때 “만듦새에 있어서 부끄럽지 않길 바란다”고 했다. 완성도를 복기해 자평해보자면 어떤가.
=만듦새는 많이 아쉽고, 시청자들의 반응은 만듦새에 비해 과하다 싶을 만큼 좋았다. 내가 예상한 반응이었다면 덜 불안했을 텐데 그 이상이다보니 지금 많이 불안하다. 내가 장르물은 처음이라 작가님과 사전에 얘기를 많이 나눴다. 그래서 막상 프리 프로덕션을 늦게 시작했다. 현장에서도 너무 많은 타협을 했다. 드라마 연출자가 되면 포기하는 법부터 배운다. 너무 쉽게, 너무 일찍부터. 그게 정말 안 좋은 거다. 상자 안에서 뛰던 벼룩이 상자가 없어져도 그것밖에 못 뛰는 것과 같다. 처음 연출자가 됐을 때 작품의 퀄리티를 100으로 두고 80 정도 채우면 오케이, 60이 되면 상황에 따라 오케이하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런데 80에 가깝게 된 게 많지 않았다. 만듦새만 놓고 본다면 해보고 싶은 걸 많이 구현해본 <몬스타>가 제일 좋았다. 하지만 <몬스타>를 보는 이들은 유치한 걸 좋아하는 사람 정도로 평가됐다. 해외 판매도 잘 안 됐고.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드라마 감독이 됐다”고 말했다. <성균관 스캔들>(2010), <몬스타>, <미생> 못지않게 <시그널>에서도 그런 바람이 엿보인다. 진실을 밝히려다 어른들에게 무참히 짓밟힌 선우(찬희)에 대한 이재한의 미안함이 어쩌면 <시그널>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처럼 보인다.
=이 사회의 윗세대는 젊은이들에게 살기 좋은 세상을 물려주지 못한 데 대한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점점 그런 게 없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어떻게 해야 한다고 드라마를 통해 말하는 건 옳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된 건 문제라고는 말해야 한다. 사실 나도 처음에는 과연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싶어 작가님께 못하겠다고 했다. 그때 작가님께서 “바뀌었겠죠. 20년이나 지났는데”라는 말씀을 하시며 <시그널>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라 하더라. 나중에 이재한의 대사가 된 이 말을 듣는데 마음을 굳혔다. 15회에 재한이 김범주(장현성)에게 “니가 그러고도 어른이야?”라고 말하는데 조진웅씨가 그 대사를 얼마나 많이 연습해왔는지 목이 다 쉬었더라. (눈가에 눈물이 핑 돌며) 그 신이 너무 슬프다.
-지금도 울컥하는 게 있을 만큼 그 장면의 여운이 컸나보다.
=그 신 찍을 때 되게 힘들었다. “니가 그러고도 어른이야”라는 대사는 내가 현장에서 추가한 거다. 너무 선언적인 말이라 결과적으로 안 좋은 신이 됐다. 하지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끝까지 찾아내 처벌하는 것, 그게 결국 미래를 바꾸는 일이다. <시그널>의 메시지는 과거의 과오를 제대로 처벌하면 과거는 바뀌고 그러면 미래도 바뀐다는 데 있다.
-<시그널>의 이 메시지는 당신이 <미생>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로 꼽은 “내일 봅시다”와 이어지는 것 같다.
=미래를 얘기한다는 건 엄밀히 말해 현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의미다. 현재의 “내일 봅시다”는 너와 내가 지금 잘해보자는 거다. 그래야 미래도 있다. 시간은 늦지 않았다.
-마지막 회는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포석들로 채워진 열린 결말로도 읽힌다. <시그널> 시즌2 제작의 가능성이 꽤 높아 보인다.
=내 생각에 작가님은 무조건 시즌2를 하셔야 한다. (웃음) 물론 연기자들도. 나는 하고는 싶은데 모르겠다. 그래도 작가님과 같이 고민해보기로 했다. 하려면 정말 잘해야지, 아니면 안 하는 게 맞고. 작가님은 장르물에 타고난 분이다. 근데 나는 사람을 죽이는 얘기를 하는 게 힘들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회의 때마다 “어디서 죽이지? 어떻게 죽이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말에 익숙해지는 게 싫다. 사실 나는 로맨틱 코미디를 정말 좋아한다. 낭만 가득한 로맨스보다는 먹고사는 일상에서 느끼는 로맨틱한 감정을 그리는 거다. 김은희 작가님도 코믹 본능이 상당하다. “코미디로 장르물을 쓰시라”고 하고 있다. (웃음) 조금은 쉬어가고 싶다. 대본만 받아서 찍는 걸 못하는지라 적어도 한 작품을 위해 1년 반은 걸린다. <시그널2>를 하게 되면 조금 빨리, 그게 아니라면 내년 여름쯤 다음 작품을 선보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