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근처 공원에 놀러간 날이었다. 회사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였지만 오르막길이었던 탓에 입사 3년 만에 처음 가본 신세계가 눈앞에 펼쳐지려던 순간, 옆에 있던 선배가 탄성을 질렀다. 여기 늙은이들 되게 많다! 선배의 얼굴은 해맑았다. 응? 왜? 안 들리잖아! 선배, 늙으면 잘 안 들리긴 하는데… 자기 욕하는 건 다 들어요. 결국 우리는 그 신천지에 발도 들이지 못하고 노인들의 눈총을 받으며 쫓기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1937년생으로 의심의 여지없는 노인이었던 2000년에 이미 <아름다운 노년을 위하여>를 썼으며, 현대인의 수명 연장을 온몸으로 증명하며 15년째 노년에 관한 책을 쓰고 있는 고광애씨에 따르면, 노인들은 안경보다 보청기에 반감이 크다고 한다. 가는귀 먹었다고 하면 왠지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김만석 노인(이순재)이 보청기 소리만 나왔다 하면 호통을 치는 것도 그래서였나, 원래 성격이 나빠서가 아니라? 노인들은 또한 말이 많다. <아름다운 노년을 위하여>에는 어찌나 떠들고 싶었던지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노인들이 모여 ‘재잘거릴’ 수 있는 프랑스 병원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에 대한 저자의 논평은 이렇다, “늙은 사람이 말도 안 하고 무슨 재미로 살까.”
그렇다면 잘 들리지도 않는데 말은 많은 노인들이 모이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나는 안다. 파리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내 옆에 앉은 사람이 노인 단체여행 가이드였던 것이다. 하늘도 무심하여라. 물 한잔을 마시고 싶어도 다 함께 몰려와 가이드를 부려먹던 (한국인 승무원도 있는데, 왜죠?) 노인들은 심심했는지 나에게도 말을 걸기 시작했다.
“(목청껏) 아가씨는 혼자야?” “네? 저요?” “(아랑곳하지 않고) 유럽에 가본 적 있어?” “네.” “(느닷없이) 저기 있는 우리 영감님이 대학 교수님이야(본인 남편은 ‘님’이라며 나한텐 반말). 그래서 (아무 상관없이) 내가 유럽을 아주 많이 가봤는데 말이야, &%$#^%**(%&(무한대의 수다 이후 의사 사모님에게 나를 인수인계).” 저기, 저 마감 안 하고 도망 나와서 지금 일해야 하는데요, 엉엉. 파리로 떠난 <꽃보다 할배>를 보면서 재밌기보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는데, 그 무렵 주부 커뮤니티엔 시부모 모시고 해외여행 다녀온 며느리들의 원한 맺힌 시청 소감이 메아리치곤 했다지.
잭 니콜슨하고 모건 프리먼이 만만한 제작자 하나 골라 후려서 효도 관광 떠난 게 아닐까 의심이 드는 영화 <버킷 리스트: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을 봐도 눈에 들어오는 건 돈 많은 노인네 따라다니면서 막말 듣는 짐꾼 겸 매니저 총각뿐, 남의 일 같지가 않았어. 낼모레 일흔인 어르신 모시고 출장갔다가 그 지방 음식 먹자고 해서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던 짜글이를 노래 부르면서 먹고 있는데 (맛있는 걸 먹으면 왠지 모르게 노래가 나옴) 무슨 김치만 처넣는 식당 왔냐고 욕먹었거든, 이거 ‘김치’ 짜글이라고요.
그러고 보면 사람은 말이 많아지면서 더불어 욕도 느나보다. 황혼 로맨스라는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최고의 명장면은 욕쟁이 할매(김수미) vs 욕쟁이 할배(이순재)의 배틀이며, 주연이 박근형이라서 로맨스 그레이가 나오는 줄 알았던 <장수상회>는 순재 형님 영화 못지않게 욕설이 작렬하니 나도 늙으면 마음껏 쌍욕 해도 되는 걸까요, 이미 실력은 충분한데요.
하지만 가이드나 짐꾼 없이 노인들만 있어도 재미있게 놀 수 있다. 일흔 먹은 노인 넷이 총각파티를 하러 떠나는 <라스트 베가스>는 노인 여행의 나아갈 바를 제시하는 ‘올드 플래닛’이라고나 할까. 지극히 독립적이고 발랄하며 난잡한, 아니 이건 빼고, 여행의 진수를 보여준다. 술 마시고 여자 만나고 도박하는 데 무슨 짐꾼이 필요하랴, 필요한 거라곤 비아그라뿐(이건 슬픔).
그렇다면 노인들과 잘 지내는 비법은 무엇일까,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말은 많고 잘 듣진 않으니까, 말을 아끼고 잘 듣는 척하면 된다. 소경 삼년, 귀머거리 삼년, 벙어리 삼년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2005년에는 할머니 영화였지만 10년이 지나고 나니 아주머니 내지 언니 영화쯤으로 보이는(이것도 슬픔) <마파도>만 봐도 그렇다. 키 작고 말 많은 충수(이문식)보단 역시 키 크고 잘생기고 과묵한 재철(이정진)이 마파도의 왕자님, 하지만 속편엔 충수만 나오지. 그리고 함부로 반말 쓰면 안 된다. 그쪽은 함부로 반말 쓰시지만. 마파도는 아무리 중요한 걸 물어봐도 반말하면 안 알려주고, 조난당해 거지꼴이 돼도 일단 존댓말 먼저 챙기는, 예민한 할머니들의 섬나라.
그런데 노인의 적은 진정 젊은이일까, 아니, 여기 노인을 향한 최고의 독설가가 있다. 버트런드 러셀은 에세이집 <런던통신 1931-1935>에서 여든 넘은 노인의 재산과 선거권을 박탈해야 한다는 조너선 스위프트의 제안을 지지하며 이렇게 썼다. “나라면 그들을 남태평양의 섬으로 옮겨놓겠다. … (노인들은) 젊은이들을 억압하거나 세상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것을 방해하는 자리에서 벗어나 말년의 행복을 누릴 것이다.” 이때 러셀의 나이 58살, 그가 태어난 19세기 후반 유럽 선진국의 평균 수명은 45살가량이었으니 누가 봐도 어엿한 노인이었다(근데 40년 더 살았음).
하지만 세상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데 적극 협조했더니 노인 또한 불행해졌다. 가난한 내 친구의 어머니는 정권이 바뀌면서 장애수당이 없어졌다. 모두에게 연금 20만원 준다더니, 정말 공평하게 20만원만 주는 거였어, 장애가 있든 없든, 잘살든 못살든. 공산당을 무찌른다더니 이게 웬 공산주의. 평균 나이 76.5살의 할머니 탐정단을 이끄는 소설 <맛있는 살인사건>의 글래디 골드는 노인 상대 연쇄살인범을 체포하고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 노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직접 싸워 되찾았다.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권리를 말이다.” 젊은이들의 권리를 빼앗는다고 노인들의 권리가 새로 생기는 건 아니다. 자기 권리는 그냥 알아서 지키기만 하면 된다.
마지막 하루까지 충만하게
백세인생을 위해 미리 준비하면 좋을 두세 가지 자산
일꾼
싸가지 없기로 명성 높았던 내가 함께 농활 나간 모두의 경악 속에 맏며느릿감으로 등극한 이유는 단 하나, 일을 잘해서였다(더불어 얼굴도 보름달처럼 둥글어서 맏며느리 관상이라고 칭찬받았지만… 할머니들, 속상했어요). 동글동글한 아가씨가 총각들보다 삽질을 잘한다고 소문이 나서 아침마다 할머니들이 숙소로 원정 나왔다, 나 먼저 데려가려고(근데 동글동글한 아가씨가 누군지 대번에 알아봐서 정말 속상했어요). <마파도>의 재철이는 땅도 잘 파고 지붕도 잘 이고 못하는 일이 없어서 사랑받지, 일을 못해도 충수보단 사랑받을 것 같지만.
일탈
<라스트 베가스>의 아치(모건 프리먼)는 심장병 환자라서 담배와 술, 나트륨을 금하고 밤 9시 이후에는 자야 한다. 백세인생이라는데 앞으로 30년을 그렇게 살아야 한다니 진정 “늙은 사람이 말도 안 하고 무슨 재미로 살 수 있을까.” (그런데 모건 프리먼은 1990년에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에서 봤을 때도 노인인 것 같았는데, 착각이겠지). 그래서 일탈이 필요하다. 30년쯤 일찍 죽으면 어떠랴, 언젠가 가는 거.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만석은 상가에서 죽어도 좋은 나이가 어디 있느냐고 호통치지만 그럼 30년 뒤에도 죽어도 좋은 나이는 아니니까, 그때 죽으나 지금 죽으나… 응? 러셀은 80살에 네 번째로 결혼하면서 너무 늙은 게 아닌가 고민했다지만 그러고도 18년을 함께 살 줄은 몰랐을 거다.
일감
<스페이스 카우보이>는 인력 재활용의 모범적인 사례로서, 구닥다리 인공위성을 고칠 사람은 구닥다리 노인들밖에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영화다(하지만 연애는 젊은 여자랑). 웬만한 아는 사람은 다 죽었지만 그래도 우리가 넘버원이라며 자신감 충만하니 젊은 여자들도 막 꼬이고… 아니, 이건 영화라 그럴 거고. <마파도2>의 할머니들도 재벌 회장 마다하고 섬에서 농사나 짓고 조개나 캐며 살겠다고 우긴다. 하지만 오는 일꾼 막지 않고, 이왕 왔으면 김수미 비키니 입던 시절부터 쌓인 일감까지 발굴해서 부려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