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크로스피트
2016-04-14
글 : 김혜리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크로닉>

<크로닉>의 데이비드(팀 로스)는 중병 말기 환자를 마지막까지 돌보는 간병인이다. 죽음 앞에 신체 기능이 쇠약해진 환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가족보다 생판 남인 데이비드에게 마음을 연다. 그러나 데이비드의 헌신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이 남자는 환자를 가상의 가족으로 여기고 과거 자신의 어떤 기억을 보상하려는 듯하다. 오랜만에 내면으로 수렴하는 연기를 보여주는 <크로닉>의 팀 로스는, 데이비드가 가진 이타적 면모와 병적 측면을 모두 과하지 않게 표현한다. 아무도 언성을 높이지 않는 이 고요한 영화에서 제일 동적인 대목은 데이비드의 러닝 장면이다. 처음에는 체력관리로 보였던 이 광경은 서너 차례 반복되면서, 마음의 응어리를 육체의 고역으로 전치(轉置)하려는 몸부림으로 읽히기 시작한다.

03/25

후환이 있을 줄 알았다. <맨 오브 스틸>의 대량 파괴 시가전 말이다. 잭 스나이더 감독과 작가들은 전작에 쏟아진 비난을- 원래 이럴 의도였다는 듯- 속편의 출발점으로 채용했다. 슈퍼맨(헨리 카빌)과 조드 장군의 공중 육탄전을,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지상의 인간 시점으로 이동해서 보여주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이하 <저스티스의 시작>)의 시작은 결코 나쁘지 않다. 대체 몇 번째 재탕이냐는 원성을 사고 있는 토마스 웨인 부부의 피살 장면도 나름 존재 이유가 있다. 미장센을 원작 중 하나인 코믹스 <다크 나이트 리턴즈>의 컷에서 그대로 따오면서도 이 신의 웨인 부부는 예전 버전들과는 다르게 강도를 물리적으로 제압하려는 시도를 한다. 영화는 뒤로 가면 웨인 가문이 대대로 사냥꾼이었음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배트맨은 원래 전사였고 비폭력주의와 거리가 먼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포석이다.

잭 스나이더 감독의 전작이 슈퍼맨 영화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저스티스의 시작>은 매몰차다 싶을 만큼 슈퍼맨/클라크 켄트 캐릭터에게 무심하다. 반면 새로운 배트맨의 형상화에는 많은 공을 들였다. 벤 애플렉의 나이 든 브루스 웨인은 세상을 속이기 위해 방탕한 척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향락과 폭력에 적당히 중독된 남자다. 그는 진저에일을 샴페인으로 속이는 크리스천 베일의 브루스와 달리 진짜 알코올을 들이켜며 테이블에는 약품도 보인다. 여자들과도 가볍고 소모적인 관계를 갖는다. 벤 애플렉의 캐스팅은 이 영화에서 가장 즐길 만한 요소 중 하나다. 190cm가 넘는 거구를 단련해 만들어낸 애플렉의 두터운 역삼각형 실루엣은 만화를 찢고 나온 배트맨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자력으로 ‘거인’이 된 인물과 어울린다. <데어데블>의 실패 이후 슈퍼히어로 연기를 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40대에 다시 불려나와 마스크와 케이프를 쓴 이 배우의 영화 밖 히스토리도, 극중 성나고 지친 장년의 배트맨과 묘한 화음을 낸다. 제레미 아이언스가 그려낸 쿨한 알프레드 집사와 막무가내 배트맨의 케미스트리도 좋다. 관객이 웃음을 터뜨리는 <록키>식의 지옥훈련 몽타주 시퀀스마저 충분히 납득이 가는 바다. 그는 바야흐로 초월적 힘을 지닌 신적 존재와 대적해야 한다. 크로스피트 아니라 더한 트레이닝으로도 될까 말까다.

그러나 좋은 캐스팅과 일부 적절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저스티스의 시작>의 관객은 마음 둘 데를 찾기 어렵다. 잭 스나이더 감독과 작가진은 배트맨에게 그럴듯한 외양은 부여했지만 제대로 된 언어는 주지 않는다. 아무리 배트맨이 우익 히어로라지만 “나는 자경단 역할을 해도 괜찮고 슈퍼맨은 외계인이라 믿을 수 없다, 1%라도 우리에게 등 돌릴 가능성이 있다면 짓밟는 게 안전하다”는 요지의 아전인수 및 인종주의적 발언은 딕 체니나 도널드 트럼프라면 모를까, 우리가 아는 브루스 웨인의 프로필을 벗어난다. 범죄자들에게 박쥐 낙인을 찍어 교도소에서 죄수들로부터 린치를 당하게 만든다는 설정도 쓸데없이 사악하다. 반면 슈퍼맨의 극중 행보도 배트맨의 주장에 이렇다 할 안티테제를 보여주지 못한다. 클라크 켄트가 배트맨의 초법적 치안 활동에 반발하는 동기와 논리는, 브루스 웨인의 슈퍼맨에 대한 반감보다 더 허약하게 제시된다. 게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저스티스의 시작>은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조하는 슈퍼맨의 활약을 미심쩍은 시선으로 그렸다. 신념대로 활약하면서도 영웅의 표정은 우울하고 시민들을 재앙에서 건져내는 슈퍼맨의 움직임은, 종종 무감동하게 거리를 치우는 환경직 공무원의 그것처럼 보인다. 화재 현장에 고립된 어느 가족을 구하러 날아간 장면의 연출은 특히 이상하다. 잭 스나이더 감독은 구조의 손길을 내밀기 전 공포에 질린 피해자들을 공중의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슈퍼맨을 찍었다. 생사여탈권을 쥔 우월한 존재의 권위와 희미한 경멸을 느끼게 하는 이상한 숏이다. 슈퍼맨의 권위와 경멸감을 암시했다는 점이 이상한 게 아니라 이 내포가 영화 전체의 이야기에 어떻게 통합되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 이상하다.

03/26

배트맨과 슈퍼맨의 싸움은 흥미로운 대결이다. “누가 이겨?”를 떠나서 왜 서로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는지 세계관의 충돌이 스토리텔러의 야심을 자극할 만하다. 유한한 수명의 인간으로서 늙어버린 지상의 영웅과 신적 소명을 가진 성자는 왜, 어떻게 투쟁하는가? 프랭크 밀러의 코믹스 <다크 나이트 리턴즈>는 이 주제를 멋지게 형상화했다. 만화에서 배트맨이 슈퍼맨에게 속삭이는 대사 한줄이 이 이야기가 닿을 수 있는 깊은 딜레마를 예시한다. “나는 정치적 골칫거리가 됐고 자네는 농담거리야.” (나는 워너브러더스가 그동안 많은 영화에서 연을 맺어온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배트맨으로 캐스팅해 늙지 않는 청년 슈퍼맨과 이데올로기를 논쟁시키는 장면을 보고 싶다는 망상을 한 적도 있다.) 그러나 <저스티스의 시작>은 철학과 정치관의 차이라는 주제의 변죽만 초반에 울리고, 이 지상 최대의 대결을 평범한 인질극으로 축소해버린다. 막상 배트맨과 슈퍼맨이 결전을 벌이는 이유는 서로가 아니라 제3자 렉스 루터의 별로 교묘할 것도 없는 계략이다. 비영어권 12살 관객도 문제없이 이해할 수 있는 갈등이 아니면 흥행이 불안하다고 생각해서일까? 우리가 <슈퍼맨> 영화들과 TV시리즈 <스몰빌>을 통해 알고 있는 렉스 루터의 캐릭터를 감안해도 싸움의 구도는 아리송하다. 렉스 루터의 1차적 증오 대상은 슈퍼맨이다. 높은 지력을 가졌지만 존중받지 못하는 성장기를 보내다가 가업을 이어받아 드디어 파워를 갖게 된 렉스 루터는 다시 마주친 절대 강자 슈퍼맨에게 증오를 느낀다. 슈퍼맨에 대한 배트맨의 경계심과 접점을 찾을 수 있는 대목이다. 슈퍼맨이 초법적 자경활동을 제어하려 한다면 (영화가 보여주듯) 사병을 거느린 렉스 루터도 브루스 웨인 못지않게 그가 반대할 만한 사회악이다.

심오한 이야기는 요란한 파괴를 웅장한 구도로 찍는다고 완성되지 않는다. 잭 스나이더 감독의 의견은 다른 것 같다. 예를 들어 <저스티스의 시작>은 둠즈데이를 크립토나이트 창으로 찌른 후 산화한 슈퍼맨의 몸을 여성 캐릭터인 원더우먼(갤 가돗)과 로이스 레인(에이미 애덤스)이 받아 안는 이미지를, 서양 회화 속 예수의 십자가 강하와 피에타를 정확히 연상시키는 구도로 연출했다. 그러나 영화에서 장엄미는 하나의 멋진 프레임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소멸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슈퍼맨이 크립토나이트 무기를 손에 쥐기까지 불가피성이 그려져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뇌관이 터진다. 이것을 성취하려면 캐릭터의 사고방식이 액션의 전술과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하고, 미시적으로는 왜 배트맨과 원더우먼이 그들에게는 무해한 최종병기를 슈퍼맨 대신 잡을 수 없었는지 동선과 플롯이 명확해야 한다. 큰 폭발과 종교화의 미장센을 따오는 것은 다음 문제다. <저스티스의 시작> 상영관을 나오면서 마치 2시간 반의 크로스피트 코스를 마친 듯한 피로를 느꼈다면, 영화가 전제한 톤과 이야기의 실체 사이의 갭을 유추로 바쁘게 메우느라 무리했기 때문이다.

<헤일, 시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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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사들

<헤일, 시저!>는 영화 예찬이자 하염없이 영화를 만들고, 영화를 만듦으로써 평화를 얻는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 고백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코언 형제의 애착은 과거 할리우드에는 있었으나 오늘날은 사라진 존재들, 재주꾼 스타들을 향한다. 특수효과나 대역 없이 실시간으로 말 등에서 재주를 넘고 싱크로나이즈드스위밍을 척척 해냈던 ‘초능력자’들. 메소드 아티스트는 아니지만 타고난 탤런트로 영화의 몇분 몇초를 마법의 시간으로 승화시켰던 특별한 사람들을 <헤일, 시저!>는 경애한다. 로데오 출신 카우보이 영화 전담 스타 호비 도일(엘든 이렌리치)은 허영도 야심도 없어 보이는 청년이다. 그는 카메라 앞에서와 똑같은 진지함으로 데이트 상대 앞에서 스파게티 면으로 밧줄 재주를 시연한다. 신인 동료 여배우 집 앞에서 동아줄 묘기를 부리며 기다리던 호비는 마침내 나온 그녀에게 묻는다. “당신은 뭘 잘해요?” 마치 새로 동네에 이사 온 아이와 처음 친구 먹는 꼬마 같다. 그렇다. 영화는 뭔가 한 가지를 아주 잘하는 철없는 이들의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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